회사는 능력자들과 깊게 관계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회사였다. 금전이나 지위를 분배하는 방식은 비교적 성과 위주였고, 업무는 능력을 기반으로 분배했다. 덕분에 타국 출신인 그도 회사의 업무에는 비교적 충실히 임했다. 그렇다보니 바쁠 때 자신을 부르는 상관이란 썩 좋은 존재는 아니었다.
"오늘 바쁘다. 빨리 끝내라."
"알겠습니다. 바로 말씀드리죠. 저번에 주신 보고서 기억하십니까?"
두 사람은 회사 밖에서도 개인적으로 속내를 터놓는 사이였지만, 크루그먼의 성격상 회사 내에서는 절대로 그에게 말을 편히 하지 않았다. 한동안 업무상 직책과 대비되는 두 사람의 기묘한 어투는 화제가 되려다가, 다리오 드렉슬러가 제명되면서 급격히 가라앉고 '귀족들이란', 하는 시선과 제명에 관한 이슈만 왕창 부풀어 올랐었다가, 이제는 그나마도 가라앉아 있었다.
"아공간?"
"예."
크루그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서 하나를 꺼내 건넸다. 맨 앞장에, '능력자 간 전투 공간 추가 개방에 관한 보고서'라고 쓰여 있었다. 찰나,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일지를 보고는 괜히 이사는 아닌가 보군, 따위의 가벼운 생각을 하다가 그의 손을 정중히 사양했다.
"아서라. 전부 기억 난다."
"좋습니다. 많이 바쁘신 모양이군요. 그럼. 제일 중요한 점은 어떤 부분입니까?"
그는 크루그먼이 2인자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 이상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요약정리를 바라며 물어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능력자 간 갈등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었다."
보고서에는 지나가듯 언급되어 있던 내용이다.
"초기 의도와 반대되는 일이군요."
"예상 못한 건 아니었잖아?"
공격적인 능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생겼으니 법보다 주먹이, 주먹보다 능력이 우선일 것이고, 얼마 되지 않은 만큼 기틀을 잡기 전까지는 당분간 계속 그럴 것 같다는 전망을 내놓으며 보고서는 마무리 되어 있었다. 능력자 안팎으로 어수선한 시대에 갈등이란 제법 큰 위험부담이었다.
"범위 안이라고 해도……. 큰 편입니다. 외부에서 위협이라고 볼 소지가 충분한 수준이더군요."
"그렇겠지. 클랜 간 싸움으로 번진 경우도 제법 되니까. 그래서?"
드렉슬러는 슬슬 본론이 듣고 싶었다.
"회사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빨라."
"회사측에선 손실을 최소화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더더욱 안 되고. 연합에서 어떻게 나올지 보고 결정해도 안 늦는다."
크루그먼은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봤고, 그도 질세라 눈길을 맞부딪쳤다. 진심이었다. 두 사람 다 서로와 기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크루그먼은 보고서를 다시 갈무리할 겸 시선을 돌렸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군요."
"지금 개입했다간 부작용을 회사가 전부 부담하는 꼴이고. 어차피 처리할 거, 나눠서 해."
"알겠습니다."
크루그먼은 그를 내보내려다 문고리를 잡은 그를 돌려세웠다.
"아,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왜."
"알베르토 경이 부탁하고 가신 물건입니다."
"그놈 아직 안 돌아왔을텐데?"
"외근 가시기 전에 시기까지 알려주고 가셨습니다. 가져가시죠."
크루그먼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물건을 받아들며 크루그먼의 집무실을 나섰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기나긴 외근중이었다. 그의 힘이 필요한 곳이라면 귀족으로서의 지위가 필요한 곳이 아니면 무력을 사용하는 장소였으므로, 그는 알베르토 경의 외근을 대놓고 귀찮아했다. 알베르토 경의 업무가 끝난다는 것은 곧 그의 업무가 쌓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업무를 수행하느라 손상된 장비들을 손보는 것도, 외근이 끝난 뒤 알베르토 경의 상태를 점검하는것도 순전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한 몇 년을 보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인데, 그냥, 그날따라, 드렉슬러는 궁금했다.
왜?
알베르토 경이 그의 주요 고객이기는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그 범위를 한참 넘어 있었다. 창 만들어 달랬으니 창이나 쥐여주면 그만이고, 갑주 만들어 달랬으니 갑주 만들어 놓으면 그만인 것을, 그를 수행하는 사용인들보다 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것 까지는 없다. 요컨대.
내가 그놈 상태까지 체크할 건 없잖아?
그것도 썩 중요한 깨달음이었지만, 그는 그 생각을 떠올리자 마자 좀 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놈이 나한테 이걸 다 맡길 이유도 없잖아?
"그런가?"
"그래."
알베르토 경이 잉글랜드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머잖아 저를 찾아온 알베르토 경에게 대뜸 제 생각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그는 얼굴을 붉혔지만, 곧 잔기침을 몇 번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말했다.
"사과하지. 자네에게 부담일 거란 생각을 못 했군."
"아니."
그러나 드렉슬러는 요상하게 표정을 구기며 받아쳤다.
"난 상관없는데, 너."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군."
"모르겠다고?"
"그래."
드렉슬러는 답답하다는듯 죽 이어갔다.
"네 무구도 모자라서 네 사생활까지 전부 나한테 풀어놓고 있다고. 내가 다른 맘 먹으면 한 방에 갈 정도로."
알베르토 경은 그의 말을 경청하더니,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드렉슬러는 이제서야 깨우친 듯한 눈앞의 드라군에게 조금 더 아량을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놈들한테도 이러냐?"
"그럴리가 있겠나. 그냥……."
"그냥?"
"기쁘군."
"기쁘다고?"
검룡이 광룡이 됐나?
"이제라도 알아줘서……. 말이야."
"뭐?"
뭘 알아줘?
"오늘 자네 생일이기도 해서 저녁에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드렉슬러."
자각하지 못했지만, 드렉슬러는 잉글랜드로 건너온 이래로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서, 알베르토 경은 그 못지않게 멍청한, 혹은 민망함이 섞인 이상한 얼굴로 말했다. 그와중에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데.
"잠깐."
드렉슬러는 어떤 내용이 나올지도 모르면서 들어선 안 될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잠시 멈춰보고자 했으나.
"난 예전부터 자네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잠깐만."
"목숨을 맡겨도 될 사람이자, 뒤돌아서면 곁에 있어줄, 그러니까."
"알베르토 로라스."
그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자네를 사랑하고 있었어. 예전부터."
"야, 멈추라니까. 잠깐. 뭐?"
무슨 소리야?
ㅡ
드렉슬러 생일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