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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2018. 7. 23. 16:30


 드렉슬러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자 말 한 마디 없이 쫓기듯 차에서 뛰쳐 나왔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친우의 끝날때 쯤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 더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았던 그는 바로 앞의 헬리오스 본사로 도망치듯 들어가 숨을 몰아 쉬었다.


"드렉슬러."


 그는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건 온갖 방향으로 생각을 펼쳐 나가는 그의 천재성이 그를 가만 두질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건 순전 로라스 덕이었다. 로라스는 그가 꺼릴 상황에 처하는 것 자체를 제 선에서 끊어 왔는데, 그는 그런 로라스의 행동 만큼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인 사이에서 귀찮은 일을 대신 쳐내는 배려로 받아 들였다. 뒤집어보면 지금까지 둘의 관계가 큰 탈 없이 이어진건 드렉슬러가 둘 사이의 관계를 친한 지인 관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드렉슬러가 자문하기를,


"드렉슬러?"

"어, 어. 카페로 가?"

"아뇨, 7층 갑니다. 방문대장 작성하러 가시죠."


 지인이 아니었나?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방금 전 로라스와의 대화를 되새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구태여 이야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별 것 아니던 일들이 로라스의 말 몇 마디에 하나 둘 의식 밖으로 끌려 나오면서 그 자신에게 정말 별 것 아닌 일이었던 건지 되묻고 있었다. 일단, 로라스 가의 사람들이 그에게 로라스 가에 오라 제안하는 것 자체는 드렉슬러의 기준에서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리오 드렉슬러와 드렉슬러 가의 관계가 부정적이라는 건 알 사람들은 다 알았고, 개중에 드렉슬러나 드렉슬러 가를 설득해 자신의 가문에 다리오 드렉슬러를 들이려는 사람들이 한두 명은 있었다. 실제로도 당사자만 동의한다면 혼맥이건 입양이건 방법은 많다며 제안 자체는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지만 드렉슬러가 거절했을 뿐이다. 차를 얻어타는 것도 빈도가 잦긴 했어도 지인이라면 부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거기에, 제 일거리는 자기가 챙겼다. 헬리오스와의 연결 고리는 크루그먼 교수를 통해 직접 만들었던 그다. 


"그리고보니, 오늘은 로라스 경이 안 보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드렉슬러 씨가 헬리오스에 다녀가면 그 검은 차에 대한 이야기가 늘 도는 걸요."


 하지만 드렉슬러의 연구실 후배였던 룬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녀가 말하는 검은 차란 드렉슬러가 가끔씩, 혹은 매번 신세를 지는 로라스 가의 차를 뜻했다.

 

"친구 차 가끔 얻어타는 건데 유명은 무슨."

"친구라니?"

"나이 차이 두 살 밖에 안 나. 차이도 아니잖아."


 회의라고는 해도 참석자가 세 명 뿐인 회의였고, 세 명 모두 서로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회의인 듯 아닌 듯 근황을 주고받던 중 로라스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드렉슬러는 눈을 피했다. 평소에는 업무 이야기만 하고 깔끔히 보내주던 사람이 뜬금없이 신변잡기를 왜 터는 건지, 하필 왜 오늘 이러는 건지, 그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나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저런 건가요?"

"여전합니다."


 죽을 맛인건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드렉슬러는 자각하지 못하던 것들 중 하나는, 본의 아니게 그와 생활 동선이 겹쳤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로라스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로라스의 시선은 드렉슬러 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까지 닿아 있었다. 룬데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드렉슬러의 마지막 1 년차에 크루그먼의 랩에 들어갔는데, 그런 그녀마저 드렉슬러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히스테리를 부릴 만 하면 귀신같이 랩을 찾아오는 로라스를 알고 있었다. 


"까먹을 만 하면 랩에 찾아와서 저 사람 찾던 사람이 그 로라스 경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람 맞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당연하다는듯 되물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책상 한 켠에는 그때 그 시절에 로라스가 선물한 작은 선인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안 사귄다고요?"

"내가 걔랑 왜 사귀냐."

"……?"

"친구끼리 무슨 사귀니 마니……."

"그런 관계에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당신들 밖에 없을 거예요."


 드렉슬러는 고개를 돌려 크루그먼에게 은근히 도움을 요청했지만, 크루그먼은 이미 룬데와 한 통 속이 다 되어선 모른척 자료 몇 장을 뒤적였다.


"이유나 들어보자. 왜?"

"정말로 이유를 몰라서 물어보는 것 같은데, 상태가 제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군요."


 드렉슬러는 별 헛소리를 다 한다는 듯 말을 무시하며 가방을 뒤졌다. 그새 사레가 들린 크루그먼은 숨을 고르고는 말을 받아쳤다.


"친구 사이에 포옹이 그렇게 일상적이진 않습니다."

"포옹 한 번 못 하냐?"

"한 번이 아니니까요. 박사 시절에 항상 로라스 경에게 안겨 출근했던 걸 제가 기억하는데."

"항상은……. 아니지. 가끔 졸릴때 부축 좀 해준 정도 가지고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괜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던 드렉슬러는 그에게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매일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둘둘 말려서 안겨 들어왔었죠. 커다란 체크무늬 담요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예, 그 담요 저도 기억 납니다. 그때 이미 결혼한 줄 알았는걸요, 그럴 사이거나. 로라스 경의 인내심을 생각하면 간혹 사람이 맞긴 한가 궁금할 정도입니다. 그 사람은 드렉슬러 씨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봄이었는데, 그대로 십 년 쭉 한결같다면 무섭기까지 하네요. 드렉슬러 씨 한테나 그렇지, 평소엔 진중한 사람이니 굶어죽진 않을 겁니다…….


"둘이 오늘 점심 뭐 먹었어? 뭐 이상한 거 먹은 거 아냐?" 

"이 회의실 안에 로라스 경과 당신의 관계만큼 이상한 건 없습니다."

"걔랑 내가 꼭 언젠가는 같이 살 것 처럼 이야기 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될 테니까요. 그 로라스 경이 한 번 마음 먹으면 못 할 것 같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툭 내뱉으면서도 그의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 마음 먹은 로라스가 어떤 일을 해내는 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드렉슬러를 바라보던 크루그먼은 혀를 한 번 차곤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행동을 돌아 보십시오. 로라스 경이 관여하지 않은 게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드렉슬러는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마자 몸을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볼수록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지인 한 명이 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 지나치게 익숙해 졌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기준에서 할 필요 없는 생각을 해야하는 상황을 가장 꺼렸다. 세금을 낼 일이 생겨도 세금 만큼이나 납부 절차를 싫어하는 사람이 그였고 인간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식의 생활 태도는 프리랜서로 살다보면 밥줄 끊기기에 딱 좋은 스타일이었지만, 그는 어째선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섭외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마저도 그의 인맥을 로라스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자신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남아 있는지를 따져봤지만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편했지만, 역으로 그의 주변을 그가 아니라 로라스가 꾸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관계가 이어진지 한참 뒤인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로라스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정도까지 누군가를 신경쓰는 관계를 지인이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지부터 다시 돌아봐야 했다. 그러려니 지나간 그에게 그러려니 맞춰준 로라스의 태도가 시너지를 내며 그에게 별 일 아니겠거니 신경쓰지 않도록 부추긴 탓에 그대로 넘어 갔더니, 정신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렇게 하나 둘 넘기다가 제 삶의 주도권까지 넘긴 셈이 됐다. 그리고 인간은 삶의 주도권을 공유하는 관계를 지인 관계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하고싶은 걸 하고 살기 위해 자신을 구속하려 드는 가문과 거리를 둔 것인데, 실은 알베르토 로라스의 배려를 기반으로 살고 있던 게 된다. 로라스와 그의 관계조차 원래부터 지인 관계라기엔 너무 멀리 나간 관계였던 게 맞았다. 그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을 때 로라스가 그런 그를 묵인했기 때문에 겉으로나마 지인 관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로라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제 곁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드렉슬러는 눈을 뜨고 1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7층에서 멈춰 있던 엘레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이런 종류의 배려도 구속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실은 구속하는 주체나 방식이 바뀐 것일 뿐이라면? 자기 자신의 인생이 아닌 알베르토 로라스가 허락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거라면? 


 잘 생각해 보게. 자네가 제일 잘 하는 일 아닌가.


 차에서 로라스가 건넨 한 마디가 그의 머릿속에서 웅웅 메아리쳤다. 그 한 마디 만으로는 둘의 관계 사이에 알게모르게 그여 있던 경계선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는 동안 자신이 차 뒷좌석에서 로라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마치고 왔나?"


 당연하다는 듯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모른척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래."


 무른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랬다. 삼십 사 년 한 평생을 살며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된 적은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어렵게 생각을 펼쳐 나가며 낸 결론은 자신과 알베르토 로라스는 더이상 지인 관계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곁에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자신을 데리러 온 이 사람만큼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며, 그런 로라스의 행동을 자신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사실 마저 부정하기엔 그가 이미 너무 깊게 종속되어 있었다. 


"얼굴 빛이 안 좋아. 고됐던 모양이지?"

"별 일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도 이런 종류의 제동이 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 세 명을 고르자면 드렉슬러의 차기 가주인 레오노르와 크루그먼 교수, 그리고 로라스가 있겠는데 레오노르는 가문 내 상하관계를 무시할 수 없어 그를 견딜 필요 없이 명령만 해도 충분한 사람이라 그를 어딘가에 묶어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크루그먼은 그에게 제동을 걸 필요성을 못 느꼈다. 결국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곤 못할 드렉슬러를 견뎌가며 그에게 제동을 걸 사람은 로라스 한 사람 뿐이었지만, 설마하니 그 알베르토 로라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의 판단은 이런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건 됐고, 너."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이 직접 받아 들였다는 구실이라도 가지고 맞은편의 사내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그런 명분 마저 놓치고 사내의 뜻대로 얽힐 것인지를 고를 권한 뿐이었다. 그는 가까운 미래가 보였다. 그가 본 미래에서 그는 자신을 넝쿨째 뜯어다가 그에게 갖다 바치고 있었다.  


"……네 뜻대로 해, 결혼."

"진심……인가?"

"그래."


 그의 생이 마지막으로 한 번 들썩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2편 / 3,4편으로 나눠서 볼 걸 전제로 쓴 생님 리퀘글이었습니다.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이었다가, 그걸 알게 된 내용이었는데 

아 게임의상태가.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notice/topic/2748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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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7. 23. 16:30



"너네 응접실에 그거 아직도 있냐?"

"마상창을 말하는 거라면 늘 그 자리에 있지."

"여전하네."


 로라스 가의 초대를 받아 본가 응접실에 가면 누구든지 볼 수 있는 무구가 하나 있다. 손잡이만 남은 마상창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그 창이 로라스 가의 용기사가 세상을 구했다는 증표라는 이야기를 갓 걷기 시작했을 때 부터 들었다. 창의 주인이었던 용기사는 유사시 자신의 무구를 가문의 그 누구라도 볼 수 있게 처리하라는 유언을 한참 전 부터 남겨 두었지만 그 용기사는 세상을 구한 전투에서 폭발의 여파로 마상창의 손잡이 부분만 남기고 보존이 불가능한 잔해만 남기고 사라졌기에 손잡이나마 보존한다는 다소 자세한 내막은 나이가 조금 들고난 뒤 부터 서른 살이 넘은 지금까지 듣고 있다. 학창시절의 그는 본가에 들러 그 무구를 볼 때면 창의 주인이었던 용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을지 상상했다. 백 년이면 그리 먼 과거도 아닌데 그 용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가문에 전해지는 것 조차 심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 말고는 별 다를 게 없어 상상만 할 수 있었다.


"가문이 굳건하다면 몇십 년 뒤에 와도 그대로일걸세."

 

 그에게 용기사는 성역이었다. 가문의 사람들이 방향이 엇나간 정의를 실현하려다 모든 것을 잃은 선조들의 최후를 들려줄 때면 자신의 가치관에 혼란이 오던 어린날의 알베르토 로라스는 본가 응접실에 홀로 머무는 마상창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아 자신이 하려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었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건데, 손잡이만 남아있는 걸 그렇게 공개된 장소에 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귀한 거라며."

"창의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전했다더군. 마지막 임무 직전에 가문의 사람에게 부탁했다고 해."


 그는 그 용기사를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용기사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초상화로나 볼 수 있는 초대 가주보다도 먼 사람으로 생각하며 거리를 뒀다. 마음 한 구석에 막연한 지향점 하나 정도는 두고 싶었던 그의 선택이었다.


"그정도는 나도 알아. 유명하잖아. 잘 풀리건 그렇게 되지 않건 자신의 의지는……."

"…변하지 않으니, 본가에 들어오는 그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공개된 곳에 두라고."

"그래, 그래. 그러건 말건 부서지면 어쩌려고?"

"뜻이려니 하겠지. 느낌있지 않나?"


 아마도 그 용기사에 대한 알베르토 로라스의 태도는 성년식을 치른 날의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이번 생이 다할 때 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겹도록 봤으니까 하는 소리지. 다른 건 못 보냐? 검 같은 거."

"무슨 검 말인가?"
"왕실 하사품."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년식을 기점으로 뒤집혔다. 로라스 가의 성년식은 가문을 일으킨 초대 가주가 정한 방식을 기반으로 하되, 성년식을 주최하는 그 대의 가주가 성향을 반영했다. 이번 대의 가주는 초대 가주가 왕에게 하사받았다던 예식용 검을 꺼내 성년식을 주관했는데, 가문의 일원인 그 또한 실물은 자신의 성년식 날에 처음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귀한 보검이었다. 제 삶 한 부분을 가문에 두는 사람인 그에게 검은 제법 의미가 컸다.


"그 검은 본가 사람들도 가주님께서 성년식 때 꺼내신 것 말고는 본 적이 없어."


 그 당시, 그는 본가가 있는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에 있었다. 잉글랜드에 머물면서도 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식성은 그때 생겼다. 당연히 성년식은 본가로 가서 치러야 했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본국에 다녀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완성되는 바람에 누구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그는, 어렸을 적 부터 이상하게 동선이 안겹칠듯 겹치다 대학교까지 같은 곳으로 진학해 기숙사마저 옆방을 쓰던 다리오 드렉슬러를 붙잡았다. 그는 이야기를 쭉 듣더니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제 졸업 선물이나 챙겨 오라며 세상 태평한 소리나 좀 하다가 로라스의 방에서 맥주를 두어 캔 까고는 낮잠까지 자고 갔다. 조기 졸업을 앞두고 바쁘단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긋한 행동이었다. 얼결에 그의 태도에 휩쓸린 로라스는 덩달아 느긋해졌다. 성년식을 치르고 온다고 해서 제 주변이 송두리째 바뀌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은 덤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본가의 응접실에 들어서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느긋하게 미래를 생각하던 그는 응접실에서 마상창을 바라본 순간 20 세기를 살았던 가문의 용기사가, 마상창의 주인이었던 그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궁금한데."

"정 궁금하면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자네 도움이 필요해."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기억을 영혼에 새기기로 한 결정이 그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가문의, 혹은 그 당시 가주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대 안타리우스 전쟁과 관련된 일도 아니었고, 아틀라티코 드라군과 관련된 일도 아니었다. 그가 기억을 영혼에 새기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건 다리오 드렉슬러를 붙잡겠다는 의지였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의지는 큰 굴곡없이 살며 갓 성년이 된 21 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가 받아 들이기엔 지나치게 강렬했다. 그는 그렇게 과거에 처박혔다.


"뭔데."

"가문 내에 성년식 급의 행사가 있으면 가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지."

"너희 가문에서 행사 하는 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야."


 로라스 가의 성년식 이후, 그와 얼굴만 알고 지냈던 사람들조차 그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부분이 변한 건지 콕 찝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달라졌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게 체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받아 들이고 나니 알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용기사 시절의 기억에 잠식된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21 세기에 태어난 알베르토 로라스가 20 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는 타자기보다는 키보드가 익숙했다. 전화기에 선이 없다고 놀라지도 않았으며, 거리낌없이 터치 스크린을 썼다. 다만, 그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그는 망설임없이 대답할 것이다.


"자네가 로라스 가의 일원이 되는 걸세." 

"검 하나 보겠다고 성을 갈아치워?"

"어차피 뗄 성씨라면 바꾸는 것도 방법이지. 마침 자네에게 꾸준히 청혼하는 로라스 가의 사람도 있고 말이야."

"또 그 소리 하네."


 나는 과거의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알게 된 덕에 지금의 나 또한 누군가를 자각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힘들다고 해야 할 지 민망하다고 해야 할 지는 알수 없으나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너랑 결혼을 왜 하냐."

"스페인에서 성 하나만 가지고 살기엔 거슬리는 점이 많아서 귀찮단 이야기는 자네가 했었어."


 그 시절의 다리오 드렉슬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무구를 만들고 지원사격, 단어를 고르자면 지원투창이 좀 더 옳은 표현이겠지만, 어쨌건, 자신과 많은 순간을 함께 해왔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자신은 그런 사람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잉글랜드서 살잖아."


 20 세기의 자신과 함께했던 드렉슬러는 꽉 막힌 놈 관심 없다며 대번에 쳐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자신을 곁에 둔 걸 보면 인간적인 호감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로라스가 두 번의 생을 살며 곱씹은 것과는 감정의 궤도가 다른 것 같았다. 그건 꼭 20 세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로라스는 여전히 양쪽 머리끝에 새치를 달고 사는 사내를 어떻게 요리해야 제 옆구리에 끼고 살 수 있을지 늘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민 거리가 생길 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했다. 본가를 떠올리거나, 무게를 덜어줄 사람을 찾거나, 기타등등, 기타등등.


"자네 부탁으로 끊은 스페인 행 비행기 표만 벌써 열 장이 넘어간 건 알고 있나?"

"너도 갈 일 있다고 매번 두 장씩 끊었으니 그렇지."

"자네가 간다고 하니 동행했을 뿐이야."


 이번에는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다리오 드렉슬러를 따라 다녔다. 그가 로라스 가의 사람으로 태어나 시간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금전이 부족하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 지금 내가 스페인 간다고 하니까 따라간 거라는 소리 하고 있는 거냐? 아니지?"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이번에는 내 청혼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 보겠나?"

"야." 

"가문의 사람들이 자네에게 로라스 가에 오라고 이야기 한건 항상 진심이었지. 왜 그랬을 것 같나?"


 지금까지도 그런 그를 자각하지 못했던, 그 와중에 어김없이 로라스 가의 차를 얻어탄 채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다리오 드렉슬러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 한 번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 그의 친우이자 스승인 크루그먼 교수의 오 년도 더 된 일갈이 시간을 건너 내리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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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7. 6. 00:52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텀블러에 담아서. 맞으시죠?"


 사내는 말없이 카운터에 제 텀블러를 내려 놓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넉살좋은 성격은 아니었으며 그런 그를 아는 카페의 직원들도 보통은 별 말 없이 주문만 받았다. 늘 그렇듯 그는 열 시 정각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카운터까지 걸어와선 가방을 뒤적여 텀블러를 찾아 카운터에 꺼내 놓은 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니, 조금 기다리면 그의 앞에 서 있던 끝자락을 푸른빛으로 물들인 금발 직원이 다른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 보다 진한 농도로 커피를 내린 뒤, 텀블러에 얼음을 함께 담아 내놓을 것이다.

 그는 카운터 바로 앞 테이블에 대충 걸터 앉았다. 그의 집 주변에는 카페가 많았지만 규모가 있는 카페들은 너무 시끄러웠고 작은 카페는 꾸준히 들락거리면 자꾸 말을 걸어서 문제였는데, 프랜차이즈 카페의 틈바구니서 신기할정도로 오래 버티고 있는 카페 래빗은 그의 이런저런 조건을 다 만족하는 몇 안 되는 카페였다. 적당히 한산한 분위기에 직원이 자신에게 딱히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커피도 그럭저럭 괜찮았으니, 그가 카페 래빗의 단골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그가 카페 래빗의 쿠폰을 받기 시작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가끔은 카페 마감시간이 아슬아슬한 시간에도 슥 와서는 늘 시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어 잔을 포장해 가기도 했고, 서너시 쯤 와서는 커피와 함께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켜두고는 노트북으로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하다 간 적도 제법 있었다. 이쯤 되니 일 좀 오래 했다 싶은 직원들은 사내를 발견하면 그가 텀블러를 꺼내기도 전에 커피 내릴 준비를 하러 갈 정도였는데, 클레임이 들어와도 할 말 없는 고객 응대를 그는 오히려 반겼다. 이런 면이 마음에 들어 매일같이 카페에 오는 사람에겐 오히려 제대로 된 응대였던 것이다.


"혼자 오셨네요."


 하지만 그것도 어제가 마지막 이었는지, 몇 개월 동안 주문 말고는 말을 한 적이 없던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못들은 척 텀블러만 받아들고 갈지 고민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늘 혼자 왔는데."

"요 며칠 새 일행이 생기셨대서."


 새로 이야기가 오가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 제 집 근처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몇 번 데려온 게 화근이었다. 그는 직원이 건넨 제 텀블러를 받으면서 카페 래빗 대신 갈 만한 카페를 몇 군데 떠올렸다. 맞은편에 있는 길 건너 카페 하나는 끔찍하게 맛이 없는 커피를 판다. 두 블럭 옆 카페는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어느 시간대에 가도 사람이 바글거린다. 역 앞 카페는 쿠키를 자꾸 끼워팔려 수작질을 한다.


"누구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 좀 무겁고 찬데 잘생긴 사람? 미아 언니가 그랬어요."

"짐작가는 사람이 없어. 다 따로면 모를까."


 그는 대체제가 없는 현실을 슬퍼하며 대강 대답했다. 내일도 카페 래빗의 첫 손님은 그일 듯 했다. 그는 담당자를 근처로 불러올 다른 카페를 찾을 시간에 제가 직접 찾아가는게 낫겠단 생각을 하며 막 손에 든 제 텀블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 닫힌 뚜껑 아래서 잘각이는 소리가 났다. 


"L 어쩌구라고 했었는데."

"L? …로라스?"

"어, 맞아요. 그 사람."

"걔 분위기가 무겁고 차다고?"


 그의 목소리가 괴상하게 튀었다.



 다리오 드렉슬러의 성격과 능력은 독보적인 면이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보단 어딘가 한 구석은 괴상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많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도 그랬다. 두 사람 다 그 물이 그 물인 계층 사회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다가 지인이 된 경우라, 그 로라스 만큼은 드렉슬러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축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됐지만,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사람들은 로라스가 드렉슬러의 몇 안 되는 지인 중에서도 독보적인 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애초에 그의 곁에 다가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능력은 받아 들일지언정 성격은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드렉슬러와 몇 십년째 연락을 이어간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그 로라스는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문도 던져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맛에 인생을 사는 그 드렉슬러조차 그의 시선이 정중앙에 내리꽂히면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다만, 로라스는 그를 대할 때 언제나 밑바탕에 배려를 깔았다. 당사자인 드렉슬러도 그건 알았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친우의 눈길이 파스텔 톤의 빛깔과 온도를 띤다는 걸 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손길에는 자신을 향한 신뢰가 깃들어 있다는 것도 안다. 제 연락이 뜸할때면 가끔은 와인 한 병 사들고 와선 주말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로라스였고, 그에게 이런 저런 일이 있을 때면 가족보다도 먼저 연락하는 사람도 로라스 였으며, 때로는 아무말 없이 찾아가 초인종을 누른다 해도 별 말 없이 그를 안으로 들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도 로라스였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알베르토 로라스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때면, 그는 자신이 아는 알베르토 로라스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물러.

 그렇지만 그의 말만 듣고 알베르토 로라스를 찾아간 사람들은 늘 그의 말과는 한참 다른 알베르토 로라스를 감당하기 바빴다. 그를 처음 마주본 사람은 사람을 주눅들게 할 정도로 맑다 못해 시리기 까지 한 눈빛을 견뎌야 했고, 하나 하나가 절제된 행동거지는 저도 모르게 매무새를 정돈하게끔 행동을 경직시켜 지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아틀라티코 드라군을 배출하는 가문이라 그런지 분위기마저 은근히 고압적인 그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맞은편에 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주눅들기까지 했다. 물론, 몇 마디 주고 받다 보면 그가 누군가를 찍어 누르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걸 쉽게 알게 된다. 원체 올곧아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려다 본의아니게 그런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첫인상이야 어느정도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년 정도 교류를 이어가더라도 드렉슬러가 이야기했던 알베르토 로라스의 무른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을 본 사람들은 그 드렉슬러의 시선 조차 부드럽게 바꿔놓을 수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나이가 아예 적거나, 아예 많거나, 하는 식이다.


"로라스."


 그는 인연이 깊지 않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인간 관계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신경쓸 일이 생기면 철저히 사실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은 통찰력과 함께하는 터라 체면이나 염치, 배려와 같은 것들은 그의 시선을 흐트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겪은 로라스와는 또 다르게 그가 아는 로라스는 실제로도 무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먼저 와 있었나? 내가 좀 늦었나 보군."


 그 부분까지 생각이 닿은 사람에겐 남는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그가 알베르토 로라스에 대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이야기한 게 아니라면, 역으로 알베르토 로라스 그를 대할 때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와는 좀 다른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분명 통상적인 사람들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만 한 선택지인데도, 그 대상이 알베르토 로라스가 되는 순간 가장 마지막까지 선택하지 못할 선택지가 되는 그것.


"안 늦었어. 이 근처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먼저 와 있었다."


 요컨대 이렇다. 누군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시선을 왜곡할 수 있는 사람이 알베르토 로라스란 말을 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겠지만, 알베르토 로라스가 다른 사람과 다리오 드렉슬러를 차별대우 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 로라스가 그럴리가 없단 반응이 먼저 돌아올 것이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알베르토 로라스는 좀 딱딱하기는 해도 사람 가려가며 태도를 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라스의 곁에서 그를 직접 겪어온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도 사람이었고, 개중에서도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연락해서 차를 보내둘 걸 그랬어."


 그런 그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그의 주변에선 다리오 드렉슬러밖에 없었다. 그의 지인들 중에선 그 드렉슬러만 빼고 다 아는 사실이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가 자신을 찾아 올때면 늘 그랬듯 그의 차를, 정확히 말하면 로라스 가의 차를 얻어 탔다. 그는 드렉슬러를 만날 때면 늘 가문의 차와 기사를 대동해 마중 나왔던 터라, 어느새 맨 뒷 좌석, 그의 바로 옆자리는 드렉슬러의 고정석이 다 되어 있었다. 드렉슬러는 늘 그의 손에 이끌려서 에스코트 아닌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에 안기듯 앉곤 했다. 그러고 나면, 특유의 무관심으로 그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걸 무시한 듯 굴었다. 그런 태도는 간혹 앞좌석에 로라스 가의 사람이 같이 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본래 제 지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이어갈 가치를 못 느끼는 드렉슬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되도 않는 가십거리를 늘어놓는 대신,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로라스 가에 몸을 의탁하는 건 어떻냐며 드렉슬러에게 농인듯 아닌듯 제안을 던지곤 했다. 그마저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드렉슬러는 제 가문에서 성씨를 가지고 자신을 휘두르려 할때면 눈 딱 감고 로라스 가에 몸을 의탁해버릴까 가볍게 저울질을 할 정도였다. 그가 바라 마지 않는 방향이었다.


"요새는 좀 어떤가?"

"늘 똑같지. 카페가서 커피 사고, 집이나 사무실가서 근무하고, 운동 좀 하고 와서 일 좀 더 하다가 자고……. 아."


 드렉슬러는 저를 바라보며 한 손을 내민 그에게 제 코트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 왜, 예전에 내가 개인 교습하던 애 있잖아. 윗머리 노랗고 아랫머리 퍼런 애."

"맥고윈 양, 드렉슬러."

"와, 너 걔 이름 어떻게 기억했냐. 난 걔 이름 기억 안했는데."

"중요했나?"

"아니 별로. 여튼, 걔가 너보고 분위기 좀 무겁고 찬데 잘생긴 사람이라더라."


 너처럼 물렁대는 놈이 몇이나 된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 잘생긴 거 말고 맞는 게 없어서 네 얘기 하는지 처음엔 눈치도 못 챘다. 드렉슬러는 낄낄대며 시트에 몸을 기댔고, 그는 드렉슬러의 코트를 옆에 두는 척 하며 고개를 돌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숙녀에게 찬사를 다 듣다니, 오늘은 성공할 지도 모르겠군."

"왜, 생긴거로 밀고갈 일 있어?  잘 생겼잖아. 자신감을 가지라고."

"자네가 안 넘어 오잖나."


 그는 놀리듯 진심을 한 번 흘렸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유통기한 한참 전에 지난 장난 언제까지 치고 있냐."

"늘 말하지만, 장난,"

"이겠지."


 거절 아닌 거절도 일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어깨에는 착실히 기대는 사람이 드렉슬러기도 했다.


"……."

"그렇지?"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는 드렉슬러의 시선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이었으므로 드렉슬러의 길을 가문의 힘을 빌려서라도 미리 닦아 놓거나, 드렉슬러가 귀찮아 할 선자리 같은 것들은 제 손을 써 근본부터 잘라내거나, 긴 세월 내내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 자리를 놓치지 않는 등의 몇몇 사소한 일들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잘 해냈다. 그러다 가끔씩은 드렉슬러 가에 직접 찾아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처우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그정도까지 사려깊게 신경을 쓸 만한 사람은 거의 없어 그를 제지할 만한 사람도 차기 가주 정도 뿐이었는데, 차기 가주 조차 그의 이야기는 신중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히려 드렉슬러 가 내부에서는 가문의 이단아와 대화하고 싶다 직접 찾아가기 전에 그를 먼저 거쳐야 한다는 인식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아직은."


 아무렴, 꼭 그런 요소를 떠올리지 않아도 기억 속의 그는 테라듀에 꿰뚫린 드렉슬러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떤 상황을 갖다 대도 그 시절 그 순간 보다야 훨씬 나았다. 드렉슬러는 살아 있었고 전쟁이 터지지도 않았으며 몇십 년 새 그들의 조국은 동성혼을 포용하는 나라가 되어 있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제법 해볼 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21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였.


"피곤하지 않나? 가방도 이리 주게."

"어어, 도착하면 깨워줘."


 그는 제 품에 굴러들어 온 드렉슬러의 어깨 위에 담요를 둘러주며 잔잔하게 웃었다. 드렉슬러는 한 평생 그를 자신보다 이 년 덜 산 사람으로 대하겠지만 그의 뒤에는 몇십 년이 더 있었다. 상황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곧 끝이 보일 참이었다. 그 때가 되면 드렉슬러는 그를 흘려보내지 못할 거란 걸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벌써부터 조바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


 세월을 건넌 그에게는 이전에 쥐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제 손아귀에 떨어질 날이 머지 않았단 점이 더 중요했다. 기다림마저 행복이 된 그는 그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아직은 친우인 사람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내리며 제 앞에 펼쳐질 앞날을 그렸다.




생님 리퀘.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 다음편이 붙을진 잘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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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7. 3. 21:35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스페인 왕실 측에서 정말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용기사를 길러낸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세상을 구했다. 안타리우스가 세상을 판돈으로 내민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틀라티코 드라군이 꼭 필요했고, 상황을 지켜보며 비공식적으로 회사를 돕는 선에서 그쳤던 그들은 최후의 전투를 눈앞에 두고 나서야 기사단을 파견하며 공식적인 참전을 선언했다. 덕분에 회사-연합 연맹 측은 극비로 강습 작전을 꾸릴 수 있었고, 로라스는 그 작전에 적격 판정을 받아 차출되었다. 이전부터 강습 성공을 전제로 하는 임무를 수행해온 그를 선택한 건 연합의 두뇌요 연맹의 참모가 된 토니 리켓이었지만 그는 결단을 내리기 까지 시간을 더 요구했는데, 강습 직후 일시적으로 모든 공격이 집중될 그를 안전히 탈출하도록 지원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로라스를 엄호하려면 그와 같은 아틀라티코 드라군 소속인 드렉슬러를 함께 투입한 뒤 그의 지원을 받도록 작전을 짜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란 건 모두가 알았지만, 그 드렉슬러는 납치 당한 토니 리켓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안타리우스의 강화 인간에게 테라듀로 심장을 꿰뚫려 사망한 뒤였다. 거기에 기존 임무와는 다르게 작전을 완벽하게 성공시켜도 작전에 투입된 인원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걸, 로라스는 작전서를 받아든 순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 점 만큼은 안타리우스 조차 알고 있을 정도였으며 그 뜻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만에 하나, 동료의 죽음에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잠시 솟아 올랐다가도 오히려 드렉슬러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안타리우스의 샘플이 되지 않도록 사체를 직접 불에 태우는 모습을 직접 본 토니 리켓은 그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견서를 연맹 측에 직접 전달하기까지 했다. 토니 리켓에게는, 혹은 사이퍼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바로 지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의 죽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쥔 임무를 해내야 하는 사람이었고, 보란듯이 해냈다. 그의 마상창은 비능력자를 한순간에 변이시킬 정도로 농도가 짙은 안개를 흩뿌리던 장치의 코어에 꽂히며 전쟁의 끝을 알렸다. 그렇게 그는 모든 것이 걸린 순간 모든 것을 지켰다. 명예를 지켰고, 그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며, 무의미한 사상자가 더 나올 수도 있었던 위기 상황을 제 선에서 끊었다. 로라스란 인간에게도,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는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나 그때 그 전쟁의 기억이 역사로 지나갈 무렵,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다가 가문에서 성년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근 백 년전의 전생을 송두리째 기억하고 만 알베르토 로라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용기사시절 모든 기억이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20세기를 살았던 알베르토 로라스의 결말이 그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든 순간 손에 쥐지 못한 단 한 가지에 사로잡혀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한 번의 삶을 끝내는 동안 그 많은 것을 이루고도 단 한 가지를 놓친 그는, 선택했다.

 사무친 것이 있으니 다음 생에서라도 잡고 말겠단 집념을 매개로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 째로 영혼에 새기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순간 영혼에 새긴 모든 기억을 열어 전생에 쥐지 못했던 것을 쥔다. 때로는 선지자로, 때로는 전생을 기억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혹자는 신의 은총으로, 혹자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부르는 이름도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도 갈리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나타났다. 하지만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낸 사람들이 그 뒤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기억을 들고 다시금 태어난 알베르토 로라스는 스스로 제 길을 닦아 나아가기로 했다.

 그날부터 그는 단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바쁜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자신의 기억을 되짚을 때면, 자신의 감정을 한 가지 방향으로 말끔하게 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이 되고 나서야 누군가를 손에 넣고 싶단 감정을 자각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가도, 그 전에 자각했다면 말라 비틀어 졌을 거란 생각이 들때면 이런 상황이 된 것도 괜찮은 것 같다가, 이럴거라면 끝까지 모르고 죽는게 더 나았을 것이란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려 하면, 언젠가 제 곁에 서 있던 다정한 빛깔의 머리칼이 떠올라 가슴을 움켜 쥐어야 했다. 병인 듯 했다.

 아니, 쥐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한, 백 년쯤 전 부터 그랬던 것 같다.




생님 리퀘.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 짧게 몇 번 업로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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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6. 26. 01:27



  얼마 뒤 루이스는 박스가 있을 자리에 능력자들로 가득 찬 클랜 관리소를 볼 수 있었다. 클랜 지원금 제도가 개편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헬리오스의 대변인은 능력자들을 호주머니 사정으로 차별하지 않고자 결정했다며 빛깔좋은 이야기를 전했지만, 실상은 클랜 운영비 명목으로 회사에서 클랜 자금을 관리한다는 점에 대해 연합측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기에 변한 것이었다. 러쉬톤이 휴톤과 도일, 두 사람과 함께 뜬금없이 클랜을 신청했던 것도 상황을 직접 겪은 뒤 회의에 직접 참여하라던 앤지의 지시 때문이라는 걸 알게된 그는 클랜이 헬리오스의 손에 떨어졌다는 점을 꾸준히 못마땅해 하던 그녀가 조금 더 연합의 방식에 가깝게 제도를 바꿨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루이스 씨. 주인장 안에 계세요?"

"안쪽에 계십니다."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그런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클랜 운영비를 능력자 개인의 기부금을 받지 않고 연합, 회사, 재단측이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방향의 포인트 제도라는 건 알았다. 돈 빠질 구석 하나 줄이는 개편이니 기부금을 명목으로 제 배를 불리던 몇몇 클랜의 간부들이 아니고서야 바뀐 제도에 대해 거리낌없이 찬성표를 던진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온갖 일이 다 터지기 마련인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공식적인 담당자가 한 명밖에 없어 일처리가 밀리고 있단 점이었다. 


"오늘도 저래요?"

"네."


 루이스는 아직 클랜에 소속된 능력자가 아니었기에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평소 버릇 그대로 광장을 구경하려다 얼마 지나지않아 외근직 회사원 한 명이 광장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능력자들을 간신히 감당하는 꼴에 지켜보는 자신이 다 지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시선을 거뒀다. 짬을 내 서점에 들러 책 몇 권을 사며 주인과 별별 이야기를 다 하던 클랜 매니저의 모습을 그린듯이 떠올릴 수 있는 그조차 짜증을 부리면서도 착실히 서류를 쌓아가는 저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바빠 보여 약간의 연민마저 생긴 탓이었다.


"박스 다 치워서 저정도야. 무슨 일로 나를 다 찾고?"

"저번에 부탁드린 책 때문에요. 어, 그러네. 박스 다 치웠네요?"


 붐비는 바깥과는 다르게 서점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주인장이 손님과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며칠 됐지.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어디로 싹 가져 가더라고."


 제도가 바뀌기로 결정된 날, 삼자 회의에 참여했던 러쉬톤은 연합에서 술판을 벌이곤 문제의 그 박스를 회의장에서 볼 줄은 몰랐다며 한참을 떠들었다. SPEAR가 실무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진행되던 중엔 FAITH가 박스 하나를 들고 와서 직접 내용물을 공개했는데, 그 안에 클랜 제도를 도입한 이래 지금까지 모였던 클랜별 기부금 목록을 기록해둔 서류가 있던 모양이었다. 기밀 서류니 관계자 외엔 열람이 불가능해야 맞았고, 클랜 활동비 관련 자료였으니 이제와서 광장에 있을 물건은 아니었다.


"다행이예요."

"그럼. 그때 그게 그대로 쌓여 있었으면 저기 서 있는 사람 몇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서 있었을 거요."


 그는 주인장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창문 너머 광장으로 다시 옮겼다. 여전히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있었다. 클랜에 가입한 능력자들이 전부 트와일라잇에 찾아온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어느날 그가 느꼈던 밤의 광장과 달라도 너무 달랐고, 그렇게 무심코 어느날 밤의 어느 장면을 떠올리고 만 그는 넌덜머리를 내며 책 두어 권을 마저 쌓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럴 일은 없을 거고……. 저 부스에 있는 사람을 걱정해야 될 것 같은 걸요.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 이상한 놈팽이?"

"이미 박스는 치웠잖아요. 차라리 저 인파에 누구 한 명 깔려죽을 것 같은 걸요."

"그놈 용기사야."

"용기사요? 스페인의?"


 입을 쩍 벌린 손님과는 다르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이 해야할 일만 하고 있었다. 되짚어보면 그의 인생사에는 까먹을 만 하면 스페인의 용기사들이 얽혀 들었다. 2차 능력자 전쟁때의 FAITH가 그랬고, 광장에서의 일상엔 SPEAR가 그랬다. 그렇지만 여러 이유 때문에 루이스는 그들에 대해 여전히 잘 알지 못했다.


"뭘 놀라? 억양부터가 그쪽 억양이잖아."

"FAITH같은 사람들이나 용기사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저 말은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점 정도는 알았다. 그는 당장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주친 FAITH를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산 모양인지 봉투 몇 개를 들고 가던 FAITH와 인사를 할 때 까지만 해도 조금 의외였을 뿐 별다른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바로 뒤에  따라나오는 말들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 뿐이었다.


"그 FAITH도 가끔 그놈을 찾아가는 걸 본 적이 있어."

"왜요?"


 드렉슬러의 재능에 눈이 먼 사람은 많지. 하지만 곁에 선 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

 …….

 그 이유가 그의 성격 때문 만은 아니고.

 관심 없습니다.

 지난번에 나와 드렉슬러를 지켜본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했나?

 그 때도, SPEAR란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야 할 걸세. 그 때도, 앞으로도.


"글쎄, 우리같은 사람들이 알 리가 있나."


 외골수라 그렇지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광장의 그놈이랑 어울리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던 루이스는 이왕이면 그가 FAITH의 그런 부분은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자기만 봐도 그랬다.



뤼스편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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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6. 19. 12:02


 루이스는 그놈의 박스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합의 아지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 외의 장면을 보고 들은 지금, 그는 아지트로 통하는 샛길이 일직선으로 쭉 걸어가면 나온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면서도 정 반대 방향으로 자신의 몸을 돌렸다.


"외투는 어디에 있나?"

"두고 온 것 같은데."


 그는 아지트로 돌아갈 엄두를 못 냈다. 이대로 돌아갔다간 자신이 연합의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을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면 또 모를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연합의 사람들이 그의 말을 진지하게 믿어도 문제고 안 믿어도 문제였다. 그는 이 상태로 돌아가나 술에 취해 돌아가나 맨정신이 아닌 게 똑같다면 맥주라도 마음껏 마신 뒤에 가는 게 여러모로 나을 거란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다. 만취해서 들어간다면 평소 자신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지만 오늘 제가 본 것들을 이야기해도 그런 식으로 받아 들이지는 않을거란 막연한 기대감은 덤이었다.


"사무소에 말인가? 하지만, 자네 자리엔 외투가 안 보이는 걸."

"여기말고, 펍에."


  물론,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한 변명거리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아틀라티코 드라군은 구성원의 정보를 숨겼다. 연합의 첩보원들은 언제 어디서나 믿을만 한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그곳은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들의 이야기는 아틀라티코 드라군이라는 집단 단위로만 들려왔고 거기에 속한 개개인의 정보는 라즈가 신뢰하는 이들도 좀처럼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트와일라잇에 클랜 관리소가 생기고 SPEAR가 맡는다는 소식이 트와일라잇에 퍼진 뒤에도, 그는 앤지에게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오히려 스페인 출신의 용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게된 건 아론 덕택이었다. 평화의 시대, FAITH가 아론에게 신세를 졌던 적이 있어 본의아니게 알게된 이야기가 몇 있었던 것이다.


"출근하면 조노비치나 홀든이 들고 오겠지. 잠이나 자러 가자."

"그러지 말고 잠시 앉아 있겠나?"

"안 어지러운데. 대신 가져오려고?"


 그당시 그는 아론의 이야기와 자신이 겪은 그들을 종합해서 판단했다. 두 용기사는 방향은 달라도 별난 사람들이 맞긴 맞았다. 인간 관계가 매끄러운 인간상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느 선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상점을 바라보지만 의무에 눈을 돌리지 않는 FAITH나, 괴팍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사람과 교류를 끊을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은 SPEAR나, 그정도면 결혼을 꺼릴 수는 있어도 필요하다면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책임질 식솔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준 안에서 별났다…….


"광장 회식이면 늘 가는 곳 아닌가? 대강 길을 알아."

"뭐 어때서. 걔네 나보다 출근 빨라. 내가 내일 조금 빨리 출근하면 된다고."


 …….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 지 알지만, 어쩔 수 없군."

"왜 그러는데?"

"자네의 물건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

"너답긴 한데……."


 아, 트리비아.


 그는 텅 빈 거리에서 연인에 대한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저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어쩐지 그의 눈에 비친 FAITH는 자신보다 훨씬 더 헌신적인 연인이라도 된 듯 굴었다.


"싫은가?"

"그건 아닌데, 그냥."


 잠깐, 연인? 연인…….


"싫은 게 아니라면, 또 부탁할 거라도 있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라."

"금방 오겠네."


 그는 펍과 맥주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펍에 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요한 말만 하는 ACE, 웃음 소리가 호쾌한 VIGOR, 심지어 그 SECRETARY나 펍에 데려 오지 않는 STREAMER까지 끌어들여 머릿속에 담긴 두 용기사의 이미지를 어거지로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 과정에서 지금 돌아갔다간 회식이 완전히 끝나기 전 까지 SECRETARY의 맞은편에서 술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까지 떠올린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곧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청하게 바라만 보는것 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을 간신히 끌어내 광장에서 탈출했다. 그와중에 그는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이 있던 자리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며 얼음길을 마저 빚어 그 위에 올라탔다.



"빈 손으로 안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함께 돌아오셨군요?"


 SPEAR가 자리에서 일어나 펍을 떠난 게 제법 이른 시기였던 덕택에, 사람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펍은 여전히 붐볐다. 제일 먼저 자신을 발견한 ATTRACTIVE에게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SECRETARY의 맞은편에 또 한 번 앉았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들고 왔습니다. 회사측에 부탁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이리 줘."


 루이스는 별 말 없이 어깨에 걸쳐둔 옷가지를 맞은편에 건넸다. 약간의 해방감까지 느낀 그는 이제 마음 편해져선 긴장을 풀고 술을 마시는 게 옳을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지경이 되었다.


"내일 아침에 30분 쯤 빨리 출근해서 받아가거나, 아니면 FAITH가 올 거야."


 그리고 SECRETARY는 그 뒤에 말을 이어 간신히 살아 돌아온 그를 다시 지옥 불구덩이로 쫓아냈다.


"불렀나?"

"들렸나봐? 바로 오네."


 뛰어온 모양인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빨리 펍에 도착한 FAITH는 잠시 시간을 들여 숨을 다시 고르더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SECRETARY에게 SPEAR의 외투를 받았다.


"ICE가 옷 주인한테 전해 주려다 못 찾았다고 다시 들고 왔지 뭐야."

"그런가? 헛걸음을 했군."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헛걸음을 하고 돌아왔다면 차라리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눈앞의 FAITH와 클랜 관리소에 앉아 있을 어떤 용기사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 보다는 두 사람을 찾지 못하고 뱅뱅 도는게 훨씬 나았다. 알고나서 드는 생각이지만, 박스는 며칠 뒤 전부 본사에 가져간다고 했으니 곧 연합의 정보원들이 라즈에게 알렸을 문제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걸세."


 이런 상황에서, 하필이면 FAITH의 억양은 평소 까칠한 말투의 SPEAR만큼이나 강했다. 그는 FAITH의 첫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방금전 광장에서 얼음길을 만들때 무시했던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느꼈다. FAITH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대상을 특정해 알고 있었다. 루이스에겐 등골이 섬짓해질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 말을 해볼 수도, 상황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온 김에 한 잔 하고 갈래?"

"고맙지만 사양하지. 내일 선약이 있어."

"뻣뻣하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먼저 일어난다며 옷을 들고 펍을 나섰던 순간을 잊은듯 빠르게 맥주잔을 비웠다. 맨정신으로 견딜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지나간 하루 였다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펍은 여전히 떠들썩했고 FAITH는 그런 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SECRETARY와 몇 마디를 더 주고 받으며 펍을 나섰다. 많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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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6. 4. 16:31

1.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662288 페이지로 들어가신 뒤


2. 해당 책의 ISBN 중 "앞에서 다섯 개"가 비밀번호 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 링크의 책이 이 책이라면 비밀번호로 앞에서 다섯 개인 97889가 비밀번호 입니다.




※주의 : 해당 인증 절차는 웹버전에서만 제대로 기능하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접속하시는 경우 PC버전으로 페이지를 바꿔주셔야 비밀번호를 찾을 수 있습니다.

Posted by _zlos
2018. 6. 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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