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텀블러에 담아서. 맞으시죠?"
사내는 말없이 카운터에 제 텀블러를 내려 놓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넉살좋은 성격은 아니었으며 그런 그를 아는 카페의 직원들도 보통은 별 말 없이 주문만 받았다. 늘 그렇듯 그는 열 시 정각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카운터까지 걸어와선 가방을 뒤적여 텀블러를 찾아 카운터에 꺼내 놓은 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니, 조금 기다리면 그의 앞에 서 있던 끝자락을 푸른빛으로 물들인 금발 직원이 다른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 보다 진한 농도로 커피를 내린 뒤, 텀블러에 얼음을 함께 담아 내놓을 것이다.
그는 카운터 바로 앞 테이블에 대충 걸터 앉았다. 그의 집 주변에는 카페가 많았지만 규모가 있는 카페들은 너무 시끄러웠고 작은 카페는 꾸준히 들락거리면 자꾸 말을 걸어서 문제였는데, 프랜차이즈 카페의 틈바구니서 신기할정도로 오래 버티고 있는 카페 래빗은 그의 이런저런 조건을 다 만족하는 몇 안 되는 카페였다. 적당히 한산한 분위기에 직원이 자신에게 딱히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커피도 그럭저럭 괜찮았으니, 그가 카페 래빗의 단골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그가 카페 래빗의 쿠폰을 받기 시작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가끔은 카페 마감시간이 아슬아슬한 시간에도 슥 와서는 늘 시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어 잔을 포장해 가기도 했고, 서너시 쯤 와서는 커피와 함께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켜두고는 노트북으로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하다 간 적도 제법 있었다. 이쯤 되니 일 좀 오래 했다 싶은 직원들은 사내를 발견하면 그가 텀블러를 꺼내기도 전에 커피 내릴 준비를 하러 갈 정도였는데, 클레임이 들어와도 할 말 없는 고객 응대를 그는 오히려 반겼다. 이런 면이 마음에 들어 매일같이 카페에 오는 사람에겐 오히려 제대로 된 응대였던 것이다.
"혼자 오셨네요."
하지만 그것도 어제가 마지막 이었는지, 몇 개월 동안 주문 말고는 말을 한 적이 없던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못들은 척 텀블러만 받아들고 갈지 고민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늘 혼자 왔는데."
"요 며칠 새 일행이 생기셨대서."
새로 이야기가 오가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 제 집 근처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몇 번 데려온 게 화근이었다. 그는 직원이 건넨 제 텀블러를 받으면서 카페 래빗 대신 갈 만한 카페를 몇 군데 떠올렸다. 맞은편에 있는 길 건너 카페 하나는 끔찍하게 맛이 없는 커피를 판다. 두 블럭 옆 카페는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어느 시간대에 가도 사람이 바글거린다. 역 앞 카페는 쿠키를 자꾸 끼워팔려 수작질을 한다.
"누구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 좀 무겁고 찬데 잘생긴 사람? 미아 언니가 그랬어요."
"짐작가는 사람이 없어. 다 따로면 모를까."
그는 대체제가 없는 현실을 슬퍼하며 대강 대답했다. 내일도 카페 래빗의 첫 손님은 그일 듯 했다. 그는 담당자를 근처로 불러올 다른 카페를 찾을 시간에 제가 직접 찾아가는게 낫겠단 생각을 하며 막 손에 든 제 텀블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 닫힌 뚜껑 아래서 잘각이는 소리가 났다.
"L 어쩌구라고 했었는데."
"L? …로라스?"
"어, 맞아요. 그 사람."
"걔 분위기가 무겁고 차다고?"
그의 목소리가 괴상하게 튀었다.
다리오 드렉슬러의 성격과 능력은 독보적인 면이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보단 어딘가 한 구석은 괴상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많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도 그랬다. 두 사람 다 그 물이 그 물인 계층 사회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다가 지인이 된 경우라, 그 로라스 만큼은 드렉슬러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축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됐지만,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사람들은 로라스가 드렉슬러의 몇 안 되는 지인 중에서도 독보적인 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애초에 그의 곁에 다가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능력은 받아 들일지언정 성격은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드렉슬러와 몇 십년째 연락을 이어간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그 로라스는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문도 던져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맛에 인생을 사는 그 드렉슬러조차 그의 시선이 정중앙에 내리꽂히면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다만, 로라스는 그를 대할 때 언제나 밑바탕에 배려를 깔았다. 당사자인 드렉슬러도 그건 알았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친우의 눈길이 파스텔 톤의 빛깔과 온도를 띤다는 걸 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손길에는 자신을 향한 신뢰가 깃들어 있다는 것도 안다. 제 연락이 뜸할때면 가끔은 와인 한 병 사들고 와선 주말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로라스였고, 그에게 이런 저런 일이 있을 때면 가족보다도 먼저 연락하는 사람도 로라스 였으며, 때로는 아무말 없이 찾아가 초인종을 누른다 해도 별 말 없이 그를 안으로 들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도 로라스였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알베르토 로라스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때면, 그는 자신이 아는 알베르토 로라스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물러.
그렇지만 그의 말만 듣고 알베르토 로라스를 찾아간 사람들은 늘 그의 말과는 한참 다른 알베르토 로라스를 감당하기 바빴다. 그를 처음 마주본 사람은 사람을 주눅들게 할 정도로 맑다 못해 시리기 까지 한 눈빛을 견뎌야 했고, 하나 하나가 절제된 행동거지는 저도 모르게 매무새를 정돈하게끔 행동을 경직시켜 지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아틀라티코 드라군을 배출하는 가문이라 그런지 분위기마저 은근히 고압적인 그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맞은편에 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주눅들기까지 했다. 물론, 몇 마디 주고 받다 보면 그가 누군가를 찍어 누르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걸 쉽게 알게 된다. 원체 올곧아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려다 본의아니게 그런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첫인상이야 어느정도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년 정도 교류를 이어가더라도 드렉슬러가 이야기했던 알베르토 로라스의 무른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을 본 사람들은 그 드렉슬러의 시선 조차 부드럽게 바꿔놓을 수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나이가 아예 적거나, 아예 많거나, 하는 식이다.
"로라스."
그는 인연이 깊지 않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인간 관계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신경쓸 일이 생기면 철저히 사실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은 통찰력과 함께하는 터라 체면이나 염치, 배려와 같은 것들은 그의 시선을 흐트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겪은 로라스와는 또 다르게 그가 아는 로라스는 실제로도 무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먼저 와 있었나? 내가 좀 늦었나 보군."
그 부분까지 생각이 닿은 사람에겐 남는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그가 알베르토 로라스에 대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이야기한 게 아니라면, 역으로 알베르토 로라스가 그를 대할 때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와는 좀 다른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분명 통상적인 사람들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만 한 선택지인데도, 그 대상이 알베르토 로라스가 되는 순간 가장 마지막까지 선택하지 못할 선택지가 되는 그것.
"안 늦었어. 이 근처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먼저 와 있었다."
요컨대 이렇다. 누군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시선을 왜곡할 수 있는 사람이 알베르토 로라스란 말을 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겠지만, 알베르토 로라스가 다른 사람과 다리오 드렉슬러를 차별대우 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 로라스가 그럴리가 없단 반응이 먼저 돌아올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알베르토 로라스는 좀 딱딱하기는 해도 사람 가려가며 태도를 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라스의 곁에서 그를 직접 겪어온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도 사람이었고, 개중에서도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연락해서 차를 보내둘 걸 그랬어."
그런 그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그의 주변에선 다리오 드렉슬러밖에 없었다. 그의 지인들 중에선 그 드렉슬러만 빼고 다 아는 사실이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가 자신을 찾아 올때면 늘 그랬듯 그의 차를, 정확히 말하면 로라스 가의 차를 얻어 탔다. 그는 드렉슬러를 만날 때면 늘 가문의 차와 기사를 대동해 마중 나왔던 터라, 어느새 맨 뒷 좌석, 그의 바로 옆자리는 드렉슬러의 고정석이 다 되어 있었다. 드렉슬러는 늘 그의 손에 이끌려서 에스코트 아닌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에 안기듯 앉곤 했다. 그러고 나면, 특유의 무관심으로 그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걸 무시한 듯 굴었다. 그런 태도는 간혹 앞좌석에 로라스 가의 사람이 같이 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본래 제 지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이어갈 가치를 못 느끼는 드렉슬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되도 않는 가십거리를 늘어놓는 대신,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로라스 가에 몸을 의탁하는 건 어떻냐며 드렉슬러에게 농인듯 아닌듯 제안을 던지곤 했다. 그마저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드렉슬러는 제 가문에서 성씨를 가지고 자신을 휘두르려 할때면 눈 딱 감고 로라스 가에 몸을 의탁해버릴까 가볍게 저울질을 할 정도였다. 그가 바라 마지 않는 방향이었다.
"요새는 좀 어떤가?"
"늘 똑같지. 카페가서 커피 사고, 집이나 사무실가서 근무하고, 운동 좀 하고 와서 일 좀 더 하다가 자고……. 아."
드렉슬러는 저를 바라보며 한 손을 내민 그에게 제 코트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 왜, 예전에 내가 개인 교습하던 애 있잖아. 윗머리 노랗고 아랫머리 퍼런 애."
"맥고윈 양, 드렉슬러."
"와, 너 걔 이름 어떻게 기억했냐. 난 걔 이름 기억 안했는데."
"중요했나?"
"아니 별로. 여튼, 걔가 너보고 분위기 좀 무겁고 찬데 잘생긴 사람이라더라."
너처럼 물렁대는 놈이 몇이나 된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 잘생긴 거 말고 맞는 게 없어서 네 얘기 하는지 처음엔 눈치도 못 챘다. 드렉슬러는 낄낄대며 시트에 몸을 기댔고, 그는 드렉슬러의 코트를 옆에 두는 척 하며 고개를 돌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숙녀에게 찬사를 다 듣다니, 오늘은 성공할 지도 모르겠군."
"왜, 생긴거로 밀고갈 일 있어? 너 잘 생겼잖아. 자신감을 가지라고."
"자네가 안 넘어 오잖나."
그는 놀리듯 진심을 한 번 흘렸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유통기한 한참 전에 지난 장난 언제까지 치고 있냐."
"늘 말하지만, 장난,"
"이겠지."
거절 아닌 거절도 일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어깨에는 착실히 기대는 사람이 드렉슬러기도 했다.
"……."
"그렇지?"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는 드렉슬러의 시선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이었으므로 드렉슬러의 길을 가문의 힘을 빌려서라도 미리 닦아 놓거나, 드렉슬러가 귀찮아 할 선자리 같은 것들은 제 손을 써 근본부터 잘라내거나, 긴 세월 내내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 자리를 놓치지 않는 등의 몇몇 사소한 일들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잘 해냈다. 그러다 가끔씩은 드렉슬러 가에 직접 찾아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처우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그정도까지 사려깊게 신경을 쓸 만한 사람은 거의 없어 그를 제지할 만한 사람도 차기 가주 정도 뿐이었는데, 차기 가주 조차 그의 이야기는 신중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히려 드렉슬러 가 내부에서는 가문의 이단아와 대화하고 싶다면 직접 찾아가기 전에 그를 먼저 거쳐야 한다는 인식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아직은."
아무렴, 꼭 그런 요소를 떠올리지 않아도 기억 속의 그는 테라듀에 꿰뚫린 드렉슬러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떤 상황을 갖다 대도 그 시절 그 순간 보다야 훨씬 나았다. 드렉슬러는 살아 있었고 전쟁이 터지지도 않았으며 몇십 년 새 그들의 조국은 동성혼을 포용하는 나라가 되어 있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제법 해볼 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21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였다.
"피곤하지 않나? 가방도 이리 주게."
"어어, 도착하면 깨워줘."
그는 제 품에 굴러들어 온 드렉슬러의 어깨 위에 담요를 둘러주며 잔잔하게 웃었다. 드렉슬러는 한 평생 그를 자신보다 이 년 덜 산 사람으로 대하겠지만 그의 뒤에는 몇십 년이 더 있었다. 상황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곧 끝이 보일 참이었다. 그 때가 되면 드렉슬러는 그를 흘려보내지 못할 거란 걸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벌써부터 조바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
세월을 건넌 그에게는 이전에 쥐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제 손아귀에 떨어질 날이 머지 않았단 점이 더 중요했다. 기다림마저 행복이 된 그는 그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아직은 친우인 사람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내리며 제 앞에 펼쳐질 앞날을 그렸다.
생님 리퀘.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 다음편이 붙을진 잘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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