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스 생일축하 기념 글.
0.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그랬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불확실했다. 방향성 하나만 믿으며 살아온 세월이 점점 쌓이면서 미처 여물지 못했던 어깨를 짓누르려던,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해내야 할 것은 많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만 남았던 시점이 있었다. 그런 시절에, 자신의 길과 단 한 순간도 겹치지 않을것 처럼 보이는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1.
그는 그 옆에 난 제 길을 걷고 싶었다.
2.
드렉슬러는 클랜 관리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 헬리오스에 보고서를 보낼 때 마다 늘 한 가지를 요청했다. 서류로 말하자면 클랜 관리 업무 관련 인력 지원 요청서였고, 업무 처리 속도로 말하자면 내가 할 수는 있지만 사람 한 명한테 저 양을 혼자 쳐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였고, 언어로 이야기하면 클랜 관리소에 사람 좀 보내줘라, 좀! 이었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 있길 바랄게요."
헬리오스의 태도는 매 번 성실하게 지원 요청을 보내는 창룡의 태도만큼이나 한결 같았다. 사측에서는 사원의 업무 수행 능력을 고려하여 업무를 배분하고 있으며, 실무자에 대한 사내 총평을 고려하면 사후 보고가 다소 지연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업무 강도 때문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반려합니다.
"보내 주겠냐."
그가 헬리오스의 요청에 따라 클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으므로, 그 드렉슬러보다 더 오래전부터 광장에서 재단의 업무를 맡아온 마틴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툴툴대는 드렉슬러를 보고는 능력을 쓰지 않고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럴 때에는 그의 주변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마틴이지만, 그런 그도 브루스가 출장을 마치고 광장에 돌아오는 날까지는 제 업무를 마쳐두어야 했다.
"혹시 아나요?"
"몇 년 째인데, 이제와서?"
안 그래 보여도 제법 필사적이었고, 여차하면 능력이라도 쓸 작정을 하고 클랜 관리소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이도 항상 푸른 제복을 갖춰 입고 클랜 부스를 관리하는 그는 머리가 좋았다.
"가만, 너 나한테 그거 받으러 온 거지. 잠깐 기다려. 본사에서 왔을 건데."
그는 클랜 관리소 앞으로 온 소포 몇 개를 뒤적이다가 그 사이에 낀 묵직한 봉투 하나를 찾아 통째로 그에게 건넸다. 제법 무게가 있었는지 잠깐 휘청이는 마틴을 보며 낄낄대던 그는 맞은편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듯 적당히 표정을 굳혔다.
"제법……. 자료가 많이 쌓였네요."
"받기는 지난 주에 받았는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다. 네가 확인해."
마틴은 봉투를 열어 서류 몇 장을 윗부분이 보일 정도로만 잠시 꺼냈다. 맨 앞장, 맨 윗 부분을 살핀 그는 연간 클랜 별 주화 사용량에 대한 보고서라고 쓰여 있는 것 까지만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에게서 받는 거라면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굳게 서 있는 표정이었다.
"맞는 것 같아요. 이번 보고서도 드렉슬러 씨가 처리 하신 내용이면요."
"헬리오스 인장 찍혀 있고 제목에 클랜 자 들어가 있으면 다 내가 한 거라니까."
그는 헬리오스의 인원 배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청년에게 괜한 화풀이만 한 번 더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인원을 더 보내주지는 않을 거라는 체념섞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
"조만간 한 사람 더 올 거야. 당신 지위로 들어오는 거라, 아마 당신은 승진처리 될 거고."
"본사에 무슨 문제 생겼냐?"
그래서 드렉슬러를 찾아온 조노비치의 한 마디가 그에게 더욱더 충격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문제? 글쎄, 당신이 일을 너무 잘 해서 문젠가."
평소 광장 중심에서는 좀 떨어진 곳에서 개인적으로 의뢰를 받아 안개가 깃든 장비를 분해하거나 결합하는 업무를 맡고 있던 사람이라 업무중에는 동선 한 번 겹칠 일 없는 조노비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뜸 클랜 관리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몇 년 동안 기미도 안 보이던 추가 파견인원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 물어봤더니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는 제 칭찬이라면 그 누구라도 의구심이 들 것이었다.
"난 항상 일 잘 했어."
"농땡이도 치면서?"
"이제와서 사람을 보내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는 거잖아."
조노비치는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방금전에 말했잖아. 당신이 일을 너무 잘 했다니까."
그 괴짜가 괴짜이자 천재라는 게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비대해지지 않는 선에서 능력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단체를 클럽이라고 정의한 뒤, 적당히 번거로운 외부 인력이었던 드렉슬러를 광장에 파견한 회사의 중역들이 그해 결산을 앞두고 땅을 치며 조노비치에게 했던 이야기다.
"일을 해도 뭐라고 하냐?"
"당신 머리가 그런 쪽으로는 영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몇 명 빼고는. 말을 덧붙이며 조노비치는 몇 사람을 떠올렸다.
"대충 해도 되는 거였다고?"
"그랬었는데, 안 그랬지. 열심히 했는지는 몰라도 잘 한 것도 맞고."
그들은 드렉슬러가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버렸다는 점에 집중했다. 클랜 매니저라는 직위도 적당히 수행할테니, 제복이나 입혀다 놓고 광장에 던져 놓으면 회사측에서 사이퍼들에게 제도적으로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할 수준에서는 관리가 될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나쳤어. 클랜 제도를 연계해서 판을 키우자는 소리가 나오던 걸."
"내 손으로 내 일 거리를 늘린 거라고?"
그리고 그는 간부들의 그런 안일함을 본의아니게 제 능력으로 부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조금 더 농땡이 칠 걸, 후회해도 그 누구도 말릴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총회때 결정된 건이라 몰랐을 거라더니, 정말 몰랐나봐?"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그는 공성전에 참여해 총회를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유서를 작성해 제출한 뒤, 막 리버포드에 도착해 무구를 점검하고 있던 차였다.
"판은 당신이 만들었으니 책임도 당신이 져."
지원 올 사람도 같이. 조노비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클랜 관리소를 나섰다. 그는 여전히 명민했으므로, 지위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시간에 들어온 많은 정보를 제 나름의 방식대로 정리하려 애쓰면서도 듣지 못한 한 가지 이야기를 궁금해 했다. 그래서 누가 오는 건데?
4.
"오늘부로 클랜 관리소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된……."
출근 시간까지 5 분 정도를 남기고 느즈막하게 클랜 관리소의 문을 열었던 드렉슬러는 검은 제복 자켓, 등 한복판을 사선으로 지나가는 붉은 띠, 그런 띠를 감싸는 황사, 세 가지를 보자마자 그 길로 문을 닫고 혼신의 힘을 다해 줄행랑쳤다. 공성전이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달릴 일이 없었던 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5.
로라스의 근무지는 헬리오스 본사였다. 스페인 왕실과의 합의에 따라 두 명의 용기사가 함께 파견되었지만, 그중 한 명은 일찌감치 헬리오스 트와일라잇 지부에서 업무를 처리하러 갔으므로, 민간인을 포함한 회사 사람들의 아틀라티코 드라군에 대한 이미지는 그가 혼자 만들어가고 있었다.
"로라스 경?"
"무슨 일인가?"
그리고 그렇게 된 지도 제법 시간이 오래 흘렀다. 파견 기간은 제법 길어지고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그의 반응을 가지고 내기를 걸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되었을 정도였다. 이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외국인, 외부인, 파견 근무자,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세 가지 조건을 달고도 그정도까지 맹목적인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그 어려운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인수인계는 어느정도 진행 된 거야?"
아틀라티코 드라군은 그런 상황을 명백한 이득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로라스의 근무처가 변경되는 건은 이전의 사례와는 달랐다. 막 영국 파견이 결정되었던 시절의 그와 지금의 그는 회사의 업무에 관여하는 비중부터가 달랐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냈네."
그리고 그는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순수 전투인력으로 파견된 줄 알았던 그가 발령 일 주일 만에 본사에서 비전투 업무까지 떠맡기 시작했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당연하게도 그는 너무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좀더 근본적이고 개인적으로 바뀌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좋아. 그럼 예정대로 다음 주 부터 근무처를 옮기는 걸로 처리할게."
그는 다른 이들에게 구태여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로라스 경. 근무처가 바뀌시는 건가요?"
마침 상황도 그를 도왔다. 명왕의 호출에 본사에 온 앨리셔가 그의 주변을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서선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트와일라잇 지부로 재발령이 났어. 앞으로는 거기서 볼 수 있겠지."
"공성전 일정이 잡힐때나 뵐 수 있겠네요……."
앨리셔와 그는 큰 접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성전에서 마주칠때면 서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신뢰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두 사람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었다. 당장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던 조노비치도 그를 찾아 오는 길에 앨리셔가 이대로 자란다면 그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잡담을 들었다.
"가끔 클랜 관리소에 들렀다 가게. 큰일이 없다면 차 한 잔 할 시간 정도는 낼 수 있겠지."
"그래도 되나요?"
"물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기엔 화자가 그 검룡에 그 앨리셔다 보니 말 한 마디가 허투루 들리질 않았다. 그들은 그런 부분에서는 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둘 다 심지 굳지 식으로 흘려 넘기기엔 지나치게 깊은 부분이 그랬다.
6.
"로라스 경, 매니저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음……."
그리고 그런 그조차 자기 자신을 보기도 전에 상관이 줄행랑친다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드물게 당황했다.
7.
드렉슬러는 몇 년 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이 지나는 모든 궤적 바로 옆에 내 길을 얹을 겁니다. 그때가 된다면 그때 내가 어땠더라, 한 번 더 기억을 더듬은 그는 제 머리를 쥐어짜며 소리를 꽥 질렀다.
"악!"
내가 그때 그런 말을 왜 했지? 왜 했긴, 이렇게 될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했지. 밝은 갈색 머리칼 몇 가닥이 광장 한복판에 흐뜨러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랜 마스터."
그는 고개를 돌렸다. 질릴 정도로 들은, 듣기 좋은, 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날이 설 정도로 각이 잡힌 태도는 여전했지만 아주 약간 흐트러진 옷 매무새가 그에게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 주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말을 할까, 그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클랜 매니전데."
"승진 했잖나."
씨알도 안 먹힐 소리가 비죽 새어 나왔다가 씨알도 안 먹힌 채 사라졌다.
"담당자라곤 나 혼자인 지부에서 승진 해봐야 뭘 한다고."
"상황이 좀 바뀌었지. 내가 오늘부터 자네의 곁에서 업무를 보게 됐어."
"헬리오스 본사에서 근무하는 용기사는 한 명 뿐이었다. 네가 빠지면 누가 그 자리를 메워?"
"이쪽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게 더 나을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야. 어쨌거나……."
전부 다 아는 이야기를 모르는 척 물어보는 그나, 거기에 맞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다시 한 번 설명하는 그나, 직업을 잘못 가진 것 같았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잘 짜여진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게 서로에게 더 잘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에도 자네 바로 옆에 내 길을 얹었군."
"그럼, 나는 네가 없는 곳에 내 길을 내러 가야 겠지."
정말로.
8.
무슨 일이 생겼나, 설마 첫 날 부터 그 신실한 용기사가 다른 용기사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직원은 막내 한 명을 급히 딸려 보냈다. 그는 비 능력자 였으므로 능력자인 로라스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한참을 헤메야 했다.
"드렉슬러."
그리고 도착하자 마자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클랜 매니저는 발령 첫 날 부터 겁도 없이 그 성격 더러운 클랜 매니저였다가 이제는 클랜 마스터가 된 사람을 이름으로 불렀다. 하극상인가? 그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왜."
"이 나는, 자네가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했던 말이 아직 생생해"
하지만 전 클랜 매니저는 그렇게 화가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같은 용기사로써 서로를 부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더이상 다가갔다간 아틀라티코 드라군에 엮여 하루종일 회사의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그는 더 듣지 않고 클랜 관리소로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는 못 따라올 거라며 덧붙였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지."
그 덕분에,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는 진실은 영영 알지 못했다.
"이번까지 따라오면 포기하겠다고. 어떤가?"
몇 년 전부터 쭉 이어지던 이야기 하나가 그의 등 뒤에서 끝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 드렉슬러가 패배를 인정하는 중인 줄도 몰랐다.
9.
드렉슬러는 눈을 감았다. 그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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