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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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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2018. 5. 7. 03:40


 로라스 생일축하 기념 글. 



0.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그랬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불확실했다. 방향성 하나만 믿으며 살아온 세월이 점점 쌓이면서 미처 여물지 못했던 어깨를 짓누르려던,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해내야 할 것은 많았다.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만 남았던 시점이 있었다. 그런 시절에, 자신의 길과 단 한 순간도 겹치지 않을것 처럼 보이는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1.


 그는 그 옆에 난 제 길을 걷고 싶었다.



2.


 드렉슬러는 클랜 관리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 헬리오스에 보고서를 보낼 때 마다 늘 한 가지를 요청했다. 서류로 말하자면 클랜 관리 업무 관련 인력 지원 요청서였고, 업무 처리 속도로 말하자면 내가 할 수는 있지만 사람 한 명한테 저 양을 혼자 쳐내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였고, 언어로 이야기하면 클랜 관리소에 사람 좀 보내줘라, 좀! 이었다.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 있길 바랄게요."


 헬리오스의 태도는 매 번 성실하게 지원 요청을 보내는 창룡의 태도만큼이나 한결 같았다. 사측에서는 사원의 업무 수행 능력을 고려하여 업무를 배분하고 있으며, 실무자에 대한 사내 총평을 고려하면 사후 보고가 다소 지연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업무 강도 때문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반려합니다. 


"보내 주겠냐."


 그가 헬리오스의 요청에 따라 클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으므로, 그 드렉슬러보다 더 오래전부터 광장에서 재단의 업무를 맡아온 마틴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툴툴대는 드렉슬러를 보고는 능력을 쓰지 않고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럴 때에는 그의 주변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마틴이지만, 그런 그도 브루스가 출장을 마치고 광장에 돌아오는 날까지는 제 업무를 마쳐두어야 했다.


"혹시 아나요?"

"몇 년 째인데, 이제와서?"


 안 그래 보여도 제법 필사적이었고, 여차하면 능력이라도 쓸 작정을 하고 클랜 관리소를 찾아왔던 것이다. 다행이도 항상 푸른 제복을 갖춰 입고 클랜 부스를 관리하는 그는 머리가 좋았다.


"가만, 너 나한테 그거 받으러 온 거지. 잠깐 기다려. 본사에서 왔을 건데."


 그는 클랜 관리소 앞으로 온 소포 몇 개를 뒤적이다가 그 사이에 낀 묵직한 봉투 하나를 찾아 통째로 그에게 건넸다. 제법 무게가 있었는지 잠깐 휘청이는 마틴을 보며 낄낄대던 그는 맞은편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듯 적당히 표정을 굳혔다.


"제법……. 자료가 많이 쌓였네요."

"받기는 지난 주에 받았는데,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다. 네가 확인해."


 마틴은 봉투를 열어 서류 몇 장을 윗부분이 보일 정도로만 잠시 꺼냈다. 맨 앞장, 맨 윗 부분을 살핀 그는 연간 클랜 별 주화 사용량에 대한 보고서라고 쓰여 있는 것 까지만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에게서 받는 거라면 그래도 된다는 확신이 굳게 서 있는 표정이었다.


"맞는 것 같아요. 이번 보고서도 드렉슬러 씨가 처리 하신 내용이면요."

"헬리오스 인장 찍혀 있고 제목에 클랜 자 들어가 있으면 다 내가 한 거라니까."


 그는 헬리오스의 인원 배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청년에게 괜한 화풀이만 한 번 더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인원을 더 보내주지는 않을 거라는 체념섞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


"조만간 한 사람 더 올 거야. 당신 지위로 들어오는 거라, 아마 당신은 승진처리 될 거고."

"본사에 무슨 문제 생겼냐?"


 그래서 드렉슬러를 찾아온 조노비치의 한 마디가 그에게 더욱더 충격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문제? 글쎄, 당신이 일을 너무 잘 해서 문젠가."


 평소 광장 중심에서는 좀 떨어진 곳에서 개인적으로 의뢰를 받아 안개가 깃든 장비를 분해하거나 결합하는 업무를 맡고 있던 사람이라 업무중에는 동선 한 번 겹칠 일 없는 조노비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뜸 클랜 관리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몇 년 동안 기미도 안 보이던 추가 파견인원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 물어봤더니 한다는 소리가 뜬금없는 제 칭찬이라면 그 누구라도 의구심이 들 것이었다. 


"난 항상 일 잘 했어."

"농땡이도 치면서?"

"이제와서 사람을 보내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는 거잖아."


 조노비치는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방금전에 말했잖아. 당신이 일을 너무 잘 했다니까."


 그 괴짜가 괴짜이자 천재라는 게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나치게 비대해지지 않는 선에서 능력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단체를 클럽이라고 정의한 뒤, 적당히 번거로운 외부 인력이었던 드렉슬러를 광장에 파견한 회사의 중역들이 그해 결산을 앞두고 땅을 치며 조노비치에게 했던 이야기다.


"일을 해도 뭐라고 하냐?"

"당신 머리가 그런 쪽으로는 영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몇 명 빼고는. 말을 덧붙이며 조노비치는 몇 사람을 떠올렸다.


"대충 해도 되는 거였다고?"

"그랬었는데, 안 그랬지. 열심히 했는지는 몰라도 잘 한 것도 맞고."


 그들은 드렉슬러가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버렸다는 점에 집중했다. 클랜 매니저라는 직위도 적당히 수행할테니, 제복이나 입혀다 놓고 광장에 던져 놓으면 회사측에서 사이퍼들에게 제도적으로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할 수준에서는 관리가 될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나쳤어. 클랜 제도를 연계해서 판을 키우자는 소리가 나오던 걸."

"내 손으로 내 일 거리를 늘린 거라고?"


 그리고 그는 간부들의 그런 안일함을 본의아니게 제 능력으로 부순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그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조금 더 농땡이 칠 걸, 후회해도 그 누구도 말릴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총회때 결정된 건이라 몰랐을 거라더니, 정말 몰랐나봐?"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그는 공성전에 참여해 총회를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유서를 작성해 제출한 뒤, 막 리버포드에 도착해 무구를 점검하고 있던 차였다.


"판은 당신이 만들었으니 책임도 당신이 져."


 지원 올 사람도 같이. 조노비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클랜 관리소를 나섰다. 그는 여전히 명민했으므로, 지위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시간에 들어온 많은 정보를 제 나름의 방식대로 정리하려 애쓰면서도 듣지 못한 한 가지 이야기를 궁금해 했다. 그래서 누가 오는 건데?



4. 


"오늘부로 클랜 관리소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된……."


 출근 시간까지 5 분 정도를 남기고 느즈막하게 클랜 관리소의 문을 열었던 드렉슬러는 검은 제복 자켓, 등 한복판을 사선으로 지나가는 붉은 띠, 그런 띠를 감싸는 황사, 세 가지를 보자마자 그 길로 문을 닫고 혼신의 힘을 다해 줄행랑쳤다. 공성전이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달릴 일이 없었던 그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5.


 로라스의 근무지는 헬리오스 본사였다. 스페인 왕실과의 합의에 따라 두 명의 용기사가 함께 파견되었지만, 그중 한 명은 일찌감치 헬리오스 트와일라잇 지부에서 업무를 처리하러 갔으므로, 민간인을 포함한 회사 사람들의 아틀라티코 드라군에 대한 이미지는 그가 혼자 만들어가고 있었다.


"로라스 경?"

"무슨 일인가?"


 그리고 그렇게 된 지도 제법 시간이 오래 흘렀다. 파견 기간은 제법 길어지고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나중에는 그의 반응을 가지고 내기를 걸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되었을 정도였다. 이제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외국인, 외부인, 파견 근무자, 신뢰를 얻을 수 없는 세 가지 조건을 달고도 그정도까지 맹목적인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그 어려운 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인수인계는 어느정도 진행 된 거야?"


 아틀라티코 드라군은 그런 상황을 명백한 이득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상황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로라스의 근무처가 변경되는 건은 이전의 사례와는 달랐다. 막 영국 파견이 결정되었던 시절의 그와 지금의 그는 회사의 업무에 관여하는 비중부터가 달랐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냈네."


 그리고 그는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순수 전투인력으로 파견된 줄 알았던 그가 발령 일 주일 만에 본사에서 비전투 업무까지 떠맡기 시작했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당연하게도 그는 너무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좀더 근본적이고 개인적으로 바뀌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좋아. 그럼 예정대로 다음 주 부터 근무처를 옮기는 걸로 처리할게."


 그는 다른 이들에게 구태여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로라스 경. 근무처가 바뀌시는 건가요?"


 마침 상황도 그를 도왔다. 명왕의 호출에 본사에 온 앨리셔가 그의 주변을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서선 그들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트와일라잇 지부로 재발령이 났어. 앞으로는 거기서 볼 수 있겠지."

"공성전 일정이 잡힐때나 뵐 수 있겠네요……."


 앨리셔와 그는 큰 접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성전에서 마주칠때면 서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신뢰정도는 있었다. 그리고 신뢰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두 사람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었다. 당장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던 조노비치도 그를 찾아 오는 길에 앨리셔가 이대로 자란다면 그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잡담을 들었다. 


"가끔 클랜 관리소에 들렀다 가게. 큰일이 없다면 차 한 잔 할 시간 정도는 낼 수 있겠지."

"그래도 되나요?"

"물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기엔 화자가 그 검룡에 그 앨리셔다 보니 말 한 마디가 허투루 들리질 않았다. 그들은 그런 부분에서는 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둘 다 심지 굳지 식으로 흘려 넘기기엔 지나치게 깊은 부분이 그랬다.



6.


"로라스 경, 매니저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음……." 


 그리고 그런 그조차 자기 자신을 보기도 전에 상관이 줄행랑친다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드물게 당황했다.



7.


 드렉슬러는 몇 년 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이 지나는 모든 궤적 바로 옆에 내 길을 얹을 겁니다. 그때가 된다면 그때 내가 어땠더라, 한 번 더 기억을 더듬은 그는 제 머리를 쥐어짜며 소리를 꽥 질렀다.


"악!"


 내가 그때 그런 말을 왜 했지? 왜 했긴, 이렇게 될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했지. 밝은 갈색 머리칼 몇 가닥이 광장 한복판에 흐뜨러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랜 마스터."


 그는 고개를 돌렸다. 질릴 정도로 들은, 듣기 좋은, 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날이 설 정도로 각이 잡힌 태도는 여전했지만 아주 약간 흐트러진 옷 매무새가 그에게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 주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말을 할까, 그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난 클랜 매니전데."

"승진 했잖나."


 씨알도 안 먹힐 소리가 비죽 새어 나왔다가 씨알도 안 먹힌 채 사라졌다.


"담당자라곤 나 혼자인 지부에서 승진 해봐야 뭘 한다고."

"상황이 좀 바뀌었지. 내가 오늘부터 자네의 곁에서 업무를 보게 됐어."

"헬리오스 본사에서 근무하는 용기사는 한 명 뿐이었다. 네가 빠지면 누가 그 자리를 메워?"

"이쪽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게 더 나을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야. 어쨌거나……."


 전부 다 아는 이야기를 모르는 척 물어보는 그나, 거기에 맞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듯 다시 한 번 설명하는 그나, 직업을 잘못 가진 것 같았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잘 짜여진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게 서로에게 더 잘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번에도 자네 바로 옆에 내 길을 얹었군."

"그럼, 나는 네가 없는 곳에 내 길을 내러 가야 겠지."


 정말로.



8.


 무슨 일이 생겼나, 설마 첫 날 부터 그 신실한 용기사가 다른 용기사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던 직원은 막내 한 명을 급히 딸려 보냈다. 그는 비 능력자 였으므로 능력자인 로라스를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한참을 헤메야 했다.


"드렉슬러."


 그리고 도착하자 마자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클랜 매니저는 발령 첫 날 부터 겁도 없이 그 성격 더러운 클랜 매니저였다가 이제는 클랜 마스터가 된 사람을 이름으로 불렀다. 하극상인가? 그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왜."

"이 나는, 자네가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했던 말이 아직 생생해"


 하지만 전 클랜 매니저는 그렇게 화가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같은 용기사로써 서로를 부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더이상 다가갔다간 아틀라티코 드라군에 엮여 하루종일 회사의 조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그는 더 듣지 않고 클랜 관리소로 몸을 돌렸다.


"여기까지는 못 따라올 거라며 덧붙였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지." 


 그 덕분에, 그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는 진실은 영영 알지 못했다.


"이번까지 따라오면 포기하겠다고. 어떤가?"


 몇 년 전부터 쭉 이어지던 이야기 하나가 그의 등 뒤에서 끝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 드렉슬러가 패배를 인정하는 중인 줄도 몰랐다.



9.


 드렉슬러는 눈을 감았다. 그가 오고 있었다.




Posted by _zlos
Game2018. 5. 4. 02:20

 


 루이스가 알기로 SPEAR의 걸음걸이는 겉에 어떤 옷을 입건 안에 갖춰입는 보호구가 많아 다소 느린 편이었다. 펍에서 술도 한 잔 걸쳤으니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릿느릿 걸어갈테고, 그러면 조금만 서두르면 곧 따라잡을 수 있단 생각까지 닿은 루이스는 한 손에 SPEAR의 겉옷을 들고 발 밑에 얼음길을 내 트와일라잇을 가로질렀다. 그날따라 안개가 짙어 발 밑에 열린 길이 조금 더 길고 오래 열렸다. 하지만 술을 마신 건 그도 마찬가지였고, 평소보다 몇 번 더 길을 내고 나서야 SPEAR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어, 오늘 내가 말 안 했었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자신에게 한 인사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한 루이스는 SPEAR의 곁에 다가가 인사를 하는 대신 본능적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술기운이 도는 와중에도 운이 좋다면 클랜 관리소에 도는 횡령건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거란 기대감이 그를 감쌌다.


"이사와 한 잔 했나?"


 루이스는 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광장 회식."


 FAITH가 트와일라잇에는 무슨 일이지? 공성전 일정이 있었나? 루이스는 기억을 더듬었지만 가장 최근에 벌어진 공성전은 한 달 전 일이었고, 바로 다음에 벌어질 공성전은 다음 달 초는 되어야 인원을 추릴거라는 앤지 헌트의 이야기만 떠올랐을 뿐 근래에 FAITH가 트와일라잇까지 와야 할 일은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날을 잘못 잡았나?"

"바람 좀 쐬니 나아졌어. 잠깐 들렀다 가."


 루이스가 잠시간 제 생각에 빠진 사이, 가로등 앞에서 서 있던 두 용기사는 어느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클랜 관리소 방향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고생이 많군."

"나야 얼마 안 남았으니 상관 없지. 그 뒤엔 네 차례 아니겠냐?"


 SPEAR는 클랜 관리소 바로 앞에 설치된 부스 한 구석에 끝도 모르고 쌓여 있던 박스 한 상자를 건넸다. 소문의 근원이었다. 루이스는 숨을 죽이며 근처에 몸을 숨겼다. 회사와 연합이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와중에도 트와일라잇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비능력자들의 시선이 여전히 고통스러울 능력자들에게 트와일라잇은 복제된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런 공간을 회사의 몇 사람이 망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루이스도 그들을 가만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루이스의 시선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면 내 업무도 좀 줄어들 거고, 연구할 시간도 생기겠지."


 SPEAR는 항상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냥 시간도 아니고 연구할 시간만을 콕찝어 이야기했다. 루이스는 클랜 활동비를 횡령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연구를 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말끔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러쉬톤도 자금에 관련된 이야기 만을 귀띔했을 뿐, SPEAR의 시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회사가 자네를 가만 둘 것 같지는 않아."

"요 몇 달 동안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였어. 뭘 더 시킨다고 그래?"


 한밤 중 휑한 광장에 SPEAR 특유의 툴툴대는 톤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울려퍼졌다. 루이스는 정신을 다잡았다.


"적당히 좀 하고 나 좀 놔두라고 해. 클랜 정책 한 번 바꿀 때 마다 내 여섯 달이 그냥 날아가."

"그냥 두기에 자네는 너무 유능하지. 나는 회사를 이해하네."

"야, 너는 나를 이해해야지."

"원한다면 그대의 뒤에 있겠네. 그게 내 이해의 방식이야."


 그에게 두 사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SPEAR의 뒤에 FAITH가 있을 거라는 말은 중요했다. 그는 순식간에 SPEAR, BLADE에 이어 FAITH까지 소문에 엮여 있는지 의심하는 처지가 됐다. 


"당장 필요하겠는데. 그것도 엄청."


 이때까지만 해도 루이스는 잘못하면 자신이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필요한 일이 있나?"

"모레쯤에 본사 갈 거야. 저 박스 얼른 치워버리자고."


 하지만 FAITH는 상자를 잠시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을 뿐, 그 뒤엔 뚜껑을 닫아 상자 더미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불러주게."


 SPEAR는 웃으며 FAITH의 어깨에 양 손을 얹었다. FAITH의 한 손이 SPEAR의 허리에 감겼다.


"그래."


 두 그림자가 겹쳤다. 소리는 덤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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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5. 1. 03:00



 배가 고프면 배를 채워야 하고 몸이 지치면 충분히 쉬어야 하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랑플람 재단서 파견을 보낸 마틴 챌피건, 오늘도 서점에서 일을 하는지 책만 보는지 알 수 없는 루이스건, 은행에서 일한다면서 막상 돈을 만지지는 않는 다이무스 홀든이건 다 그럴 것이다. 초인적인 힘이나 정신력을 발휘하는 순간에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드렉슬러, 곧 보고를 올리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몇 신데?"

"일곱 시 좀 넘었네. 지금 본사로 출발하면 내가 도착할 때 쯤이면 다른 이들도 출근했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은 거대 일식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면서 크게 흔들렸었다. 1860년의 그날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던 것들 중 몇 가지는 이제 현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조인간의 존재를 안다. 어떤 이들은 안타리우스가 그냥 그런 종교집단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인 척 하는 이형의 존재가 트와일라잇에 버젓이 돌아 다닌다는 말을 한다. 


"해도 떴는데 잠깐 연구실좀 들렀다가 가자. 아침이나 해결하고 가."

"그러지."


 그런 세상에서 두 용기사들이 인간과 조금 다른 존재라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일까?



 사람들은 두 용기사를 스페인 왕실에 소속된 왕실 친위대로만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헬리오스에 파견된 그들을 트와일라잇을 찾아온 다른 능력자들처럼 인간으로 대접했다. 하지만 그건, 이 세상에서는 꼭 인간이 아니더라도 인간처럼 사는 것 자체는 누구든 가능하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늘 느끼는 건데, 인간은 너무 비효율적이야."

"전투 방식에 대한 이야기인가?"


 헬리오스 측에서 아무리 다른 나라의 왕실 기사단이라고는 해도 공권력과 연관이 되어 있는 집단의 능력자들을 자신들의 전력으로 받아 들인다는 건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하지만 회의장에 나타난 스페인 왕실의 대변인은 헬리오스 측에서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패를 가져왔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결과적으로 헬리오스에는 용기사가 두 명 파견되었고 지금까지 근무 중이다.

 

"식사를 너무 자주 하잖아."


 스페인 왕실 대변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왕실측에서는 인간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


"일 년에 한두 번만 먹어도 될 걸, 쥐똥만 한 양을 또 나눠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식사를 해."


 그들은 동굴에서 알을 깨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제법 이름이 있는 가문에서, 인간의 뱃속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세계에서 통하는 교양있는 생명체로 자라났고, 필요할 때 마다 그런 류의 예의범절을 활용할 줄도 알았다. 그런 둘에게 인간의 행동을 한다는 건 일종의 훈련된 행동이었다.


"나 또한 그들의 행동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어. 앞으로도 그렇겠지."


 그들은 습관처럼 인간으로 살았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수면도 한 순간만 누리는 게 인간 아닌가. 잘 잤다기에 물어보면 세 달은 커녕 삼일도 못 잔 이들 뿐이지."


 로라스는 연구실의 문이 닫혀있는 걸 곁눈질로 확인한 뒤에야 포크를 들었다. 얇게 잘라 구운 베이컨 열 덩이가 포크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로라스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평소 격식을 갖춘 식사를 하던 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겁을 할 모양새였다.


"로라스. 너 휴가 좀 모아놨냐?"

"쓸 일이 없었네. 그들의 휴식과 우리의 휴식은 조금 다르지 않나."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아껴놓고 있어 봐."


 그러나 드렉슬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로라스를 지켜보다가 나이프를 들어 제 몫의 소시지 여섯 개를 몇 토막 내더니 로라스가 그랬던 것 처럼 동시에 여러 덩이를 포크로 찍었다.


"잠이나 한 번 제대로 자러 가자."

"데이트 신청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데이트?"


 드렉슬러는 뚱한 표정을 한 채 대답했다. 너 방금 완전 인간같았어.




사늑님 리퀘. 낫닝겐 창쟁이즈(용용이즈). 광장사람들처럼 짧게 몇 번 업로드 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_zlos
Game2018. 4. 25. 00:56



 얼마 뒤, 트와일라잇에서 업무를 맡고 있는 능력자들끼리 술판을 벌였다. 비능력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능력자들도 사람인지라 24 시간 365 일 매 번 촉각을 곤두 세우며 살지는 않았다. 이해관계가 꼬여 있다곤 해도 같은 장소에서 일하다 보면 어떻게든 마주칠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공성전에 참여하랴, 업무 처리하랴, 몇중고를 겪는 능력자들은 한 순간 만이라도 긴장을 풀자는 ATTRACTIVE의 제안은 곧잘 받아들일 정도로 항상 지쳐 있었다.


"salon?"


 거기에 SPEAR는 말 한 마디를 더 얹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허구한 날 치고박고 싸우는 사이에 안전 장치 하나 안 만들고 쉴 수 있겠어? 부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를 당연하다는듯 꺼낸 그는 그때그때 임시로 암호를 쓰자는 보완책을 함께 내 놓았다.


"drowning."


 그들은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한 번 판을 벌였다 하면 광장 근처의 작은 펍 전체를 빌렸다. 그날의 루이스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정을 마치고 펍에 들어섰는데, 드물고 놀랍게도 SPEAR가 앉아 있었다. 보통 그는 사람들을 꺼렸고, 사람들은 그와의 대화를 꺼렸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터라 소문의 주인공께서 납셨다는 소식에 덩달아 술판에 끼어든 사람도 제법 있었는지 가게가 꽉 차 버벅였다.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루이스는 ATTRACTIVE에게 눈짓으로 인사하며 빈 자리에 앉았다. 저 멀리서 테이블을 지켜보던 주인장이 곧 맥주가 가득 찬 잔 하나를 가져왔고, BLADE가 넘겨받아 그에게 잔을 건넸다.


"못 올 줄 알았더니?"

"SPEAR."

"왜? 아까 서점 근처에서 능력자 한 명이 폭주할 뻔 한 걸 쟤 혼자 막았는데."


 무례한 언사에 SPEAR를 슬금슬금 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순간에 루이스에게 쏠렸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야."

"해야 할 일!"


 SPEAR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의자로 몸을 쭉 기대며 투덜댔다.


"회사가 ICE의 반 만큼 만이라도 해야 할 일을 하면 나한테도 연구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을 걸."


 광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회사에 소속된 사람이 많아 술자리에 자주 끼지는 않았던 루이스지만, 그런 그도 늘 바쁜 그 BLADE가 왜 이 술자리 만큼은 꼬박꼬박 참석하는지 그 이유는 알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소속에 상관없이 광장에서 일하는 사이퍼라면 모두 들어올 수 있는 술자리라서 그런 줄 알았지만, 그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


 BLADE는 SPEAR의 말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말리지도 않았다. 루이스는 그런 BLADE의 태도를 대리만족으로 명명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조명이 어두운 편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 밑이 거뭇한 것도 같았다. 설마 두 사람이 함께 헬리오스의 자금줄을 쥐고 횡령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모른척 SECRETARY와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다 아주 가겠네?"

"아주 가기 전에 사람 좀 더 보내달라고 매 분기 마다 요청 넣잖아.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데?"

"혼자서도 잘만 처리 하는데 회사가 사람을 더 보내야 할 이유가 있겠어? 조사라도 해 볼까?"


 SECRETARY가 대뜸 외쳤다. 클랜 건 관련해서 SPEAR 혼자 해결 못 한 건 본 사람? 평소보다 좀더 높은 톤으로 펍을 뒤흔든 그녀의 외침엔 VIGOR도 못 당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젊은이가 제법이군, 혼잣말을 하며 제 수염을 쓰다듬을 뿐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취했어?"

"아직 한 잔밖에 안 마셨어."


 그리고 루이스는 며칠 전 러쉬톤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의 뒤가 구려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하는 중인데, 연합에서도 마음이 특히 잘 맞는 사람들끼리 클랜을 만들겠다며 그를 찾아간 능력자가 몇 있었지만 문제가 생겼다며 연합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자금상의 문제만 이야기했으니 섣불리 소문에 휩쓸리지 말라고.


"항상 박스가 쌓여 있는 걸 보면 바빠 보이긴 하더군. 세간에 소문이 돌 정도다."


 하지만 그 BLADE가 말을 보태는 걸 보면 일상적인 건 아니었다. 소문 자체도 그 BLADE가 알 정도라면 광장에 나다니는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다들 한 마디 씩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야기가 나올 법도 했다.


"그 박스는 신경쓰지마. 곧 다들 알게 될 거니까." 


 루이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SECRETARY가 그 선에서 이야기를 끊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그 건 때문에 나도 퇴근을 제때 못 해서 지긋지긋할 지경이라고."


 으, 갑자기 골 아픈데. 먼저 간다. SPEAR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펍을 나서는 바람에, 트와일라잇에서 업무를 볼 때면 항상 갖춰 입는 푸른 제복 외투를 두고 가버렸다. 루이스는 좋은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먼저 일어나는 김에 그에게 옷을 전해 주겠다고 말하고는 빠르게 펍을 벗어났다.




Posted by _zlos
Game2018. 4. 15. 02:05



 비능력자의 시야로 바라본 그는 전쟁터에서 말이 되지 않는 힘을 가졌으면서도 창술을 고집하는 특이한 군인이지만, 동시대를 사는 사람 대 사람으로 그를 바라본다면 그는 그들과 같은 20세기를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갑주를 갖추고 공성전에 나가지만 클랜 매니저로써의 업무를 수행할 때에는 제복을 입을 줄도 알았고, 군인으로써 필요하다면 가문 전속이 아닌 양장점에서도 옷을 맞출 수도 있다. 즉, 포트레너드 측에서 공성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능력자들에게 보낸 한 벌의 정장도 예의상 받아두고 관리는 맡겨도 존재를 잊을 물건이 아닌 그의 옷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의 의뢰로 시작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그 옷은 이미 한 벌의 옷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어렵게 수소문한 장인들은 시장의 요청에 따라 문양뿐만 아니라 모든 과정을 기계의 개입 없이 진행해 옷을 완성했다. 시작부터 단 한 순간도 평범했던 적이 없던 그 검은 정장은 능력자에게 지위를 보장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정치적인 물건이 되어 능력자들에게 전달된 뒤, 포트레너드의 친 능력자적인 행보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었고, 능력자들을 비능력자들의 편견으로부터 보호하다가, 결국엔 별도의 브랜드가 되며 디자인적인 면까지 인정 받았다.

 그렇지만 같은 옷을 받고 입어도 그러한 류의 상징성을 권위와 명예, 정의를 체득하고 다뤄온 사람 만큼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능력자가 전부 귀족이나 왕족이라면 모를까 그런 경우는 오히려 드물고, 신분이 높다고 해서 다 명예를 중시하는 인간인 것도 아닌 데다가, 옷이 잘 어울리기까지 해야 하니……. 그런 면에서 따져 본다면 시착했을 때 시장과 짜고 치기라도 한 듯 몸에 잘 들어맞는 옷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이 방면에선 아주 귀한 사람이었다.

 그 점은 회사도 잘 알고 있었다. 헬리오스는 이익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일단 시도하고 보는 집단이었고, 그는 회사측의 헬리오스 소개 책자에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그의 모습을 싣겠다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 그는 본 소속이 아틀라티코 드라군이므로 헬리오스를 상징할 수는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 하며 본사 직원을 돌려 보냈으므로, 헬리오스 측에서는 그것만큼 아쉬운 결말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크루그먼은 그 헤프닝을 드렉슬러에게 털어 놓았고, 그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잘생기긴 했지.

Posted by _zlos
Game2018. 4. 3. 17:23


 루이스는 서점 내부를 청소하며 한때 트와일라잇을 휩쓸던 소문 하나를 떠올렸다. 헬리오스에서 파견한 클랜 관리소의 매니저가 회사의 사주를 받아 불법 자금을 유통하고 있다나 뭐라나. 지금 와서는 헤프닝으로 밝혀진 지도 꽤 된 일이라 간혹 회사 사람들과 간단하게 식사라도 할 일이 생기면 한 번 씩 나오는 이야깃 거리 수준이 되었지만, 그 당시 그 소문은 알게 모르게 트와일라잇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 또한 관리소 주변에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박스 더미를 안 그런 척 흘끗거리며 바라볼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요새 클랜 관리소에서 부업도 하냐?"


 서점에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해 연합의 아지트로 돌아가면 러쉬톤은 지나가듯 루이스에게 한 마디 툭 던졌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맥주 한 잔을 걸치고 있는 휴톤과 저 멀리서 제 몫의 맥주 한 잔을 들고 오는 도일은 안 그런 척 귀를 열어 두었다는 걸 연합의 사람들이 모두 알았다.


"모르겠어."


 트와일라잇은 이미 트리비아 카리나의 도피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흔적은 남아 있었다. 


"망하기라도 할라나?"


 연합과 회사 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었지만, 트와일라잇 안에서는 공성전에 돌입한 게 아니라면 능력을 발현해 싸우지 않았다. 공성전에 참여하면 수당을 받을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트와일라잇 내부에서만 도는 그랑플람 재단의 주화를 이용해 의복이나 장신구를 구할 수도 있으며, 필요하다면 특정 진영에 소속되어 아지트를 거처로 쓸 수도 있었다.


"망하겠나. 사실이라도 지 혼자 삽질하는긴데."


 그러니까 요샌 무슨 일 없나, 싶어 트와일라잇 내부의 소식만을 다루는 신문을 펼쳤을 때 능력자들 간의 무력 충돌이 1 면에 대문짝 만 하게 실려 나오는 시기는 아니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브뤼노 올랑이 트와일라잇에 포트레너드의 중심부인 코어레너드를 복제하던 그 순간, 그가 복제한 건 공간 뿐만 아니라 능력자들이 숨통을 트고 사는 코어레너드의 분위기까지 포함했던 걸지도 몰랐다.


"망할땐 망하더라도 우리 클랜 허가는 내주고 망했으면 좋겠다~"

"클랜?"

"어! 우리 클랜 신청했다. 몰랐지?"


 연합과 회사가 힘을 합쳐 포트레너드를 재건하던 시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능력자라면 살 만한 곳이었다. 하물며 그 시절을 직접 겪은 사이퍼들은 은연중에 그 당시 그 분위기를 그리워 했다. 그건 조금 먼 과거, 도피처를 찾아 홀로 트와일라잇을 걷던 카리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도시는 그런식으로 평화로웠다.


"연합에서?"

"아니, 이렇게 셋만."


 그는 그 순간에 저를 보며 씩 웃던 러쉬톤의 얼굴과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클랜명도 가르쳐줄까? 부어라의 부, 마셔라의 마, 합쳐서 부마.



Posted by _zlos
Game2018. 3. 20. 18:09


 간혹 여유가 생길 때면 루이스는 책을, 혹은 광장을, 혹은 광장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관찰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오랜 취미였다. SPEAR는 그의 시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장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클랜 관리소를 운영하는 그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루이스의 관찰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날도 서점에서 책을 보던 루이스는 눈이 피로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그 너머에서 어딘가를 향해 평소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SPEAR을 봤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연합의 일을 되짚던 그는 최근에는 별다를 일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는 늘 그렇듯 저를 찾아오는 사람을 피하나 보다 싶어 시선을 다시 책으로 내렸다.

 그의 눈에 비친 SPEAR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서점 근처를 청소할 때 마다 늘 들리는 소리가 그랬다. 그렇다고 제 일을 내팽겨치는 사람은 또 아니었다. 클랜 관리소가 열려 있는 시간대에 관리소를 찾아가면, 사람들은 누구나 푸른 제복을 갖춰 입고 사람들을 대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천재니 괴짜니 별별 말들이 다 돌 지경이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선 큰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모든 걸 직접 지켜본 루이스는 요기 라즈가 이미 회사 소속인 SPEAR에게 눈독을 들였던 이유가 천재성 하나 뿐만은 아니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합에서 SPEAR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대로 된 영입 기회가 연합 측에 있었다면 그의 소속이 회사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던 요기 라즈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 외곬이니 뭐니 해도 SPEAR는 쥔 게 너무 많았다. 그가 가진 기술이나 자본을 노리고 그를 찾는 사람만 해도 달 마다 한두 명 씩은 클랜 관리소를 찾았다. 그들 대부분이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본 SPEAR는 그런 사람들을 제 곁에서 치워버리는 과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처리했다. 그건 중요했다. 그 치들이 나가 떨어지는 광경에 연합의 사람들을 얹어 보니 위화감 하나 없이 너무 잘 들어 맞았던 것이다.


"드렉슬러, 있, 이런."


 게다가 그의 재능이 아닌 다른 면까지 같이 보는 사람 마저 그의 곁에 따로 있었다.


"혹시 클랜 관리소가 오늘 문을 닫았나?"


 FAITH는 루이스에게 다가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혹은 연합과 회사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껄끄러울 법도 한데 그에게는 영 그런 면이 비치질 않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한결같았다.

 거기에 FAITH는 생각보다 제 일터에 자주 안 보이는 사람 축에 가까웠다. 당장 오늘만 해도 하루종일 광장에 보이질 않다가 클랜 관리소가 닫고 나서야 광장에 모습을 비친 것이기도 했다. 그런 FAITH는 관찰로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익숙한 그의 입장에선 SPEAR보다 더 알기 힘든 사람이었다.


"…늘 닫던 시간에 닫았습니다. 십 분쯤 전에."


 그렇다고 SPEAR가 알기 쉬운 사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니, 회사의 의중을 알 것 같기도 하고.


"고맙네."


 FAITH는 제 앞에서 생각에 빠진 그를 발견하고는 겉치레로라도 물어볼 법 했던 SPEAR의 행선지 한 번 안 물어보고 훌쩍 떠났다. 그는 저를 뒤로한 채 떠나는 FAITH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또다시 생각했다. 이젠 궁금할 지경인데. 아틀라티코 드라군이 원래 다들 독특한 건지, 그런 사람들이 아틀라티코 드라군이 되는 건지, 아니면 아틀라티코 드라군에서도 그런 사람들만 이곳에 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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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5. 10. 16. 21:50

 서른 둘의 알베르토 로라스는 공식적으로 서른 넷의 다리오 드렉슬러의 보호자였다. 이유인 즉슨, 알베르토 로라스의 연령이 실제로는 서른 둘에 몇백을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보는 다리오 드렉슬러를 보호하는 것에서 그쳤으나, 몇년 전 그가 입양해 또다른 알베르토가 된 소년은 다리오 드렉슬러 또한 자신의 부모로 대했다. 그 결과, 알베르토 로라스는 가문을 등에 업고도 중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군인은 훌륭한 무기였으나, 버팀목이 되어 줄 가문이 둘이 아닌 하나인 귀족은 중앙 정계에서 살아남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는 몇백 년을 살아오면서 인간 사회는 겪을 만큼 겪어 그에 대한 미련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기꺼이 중앙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런 친우의 태도를 항상 안타까워 했다.

"나는 괜찮아."

 때때로 로라스는 직접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네가 있던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로라스는 그런 그를 보면서, 원했다면 이미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마침 불어온 바람에 날려 보냈다.

 강단 있는 나의 사람, 모두가 굳고 까칠하다 하여도 내 눈에는 영원히 여리고 어리게만 보일 나의 친우, 영생을 보내며 결국 찾아낸 나의 어린 반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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