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데이 기념 로라드렉. 이 백일
1. 9월 17일.
"사랑하네. 드렉슬러"
그의 고백은 담백했다. 그는 장미꽃다발 대신 새하얀 진실만 준비해 내밀었다. 어찌나 하얬는지, 평소라면
"낯간지럽게 무슨 소리야?"
하며 농담이라는 식으로 넘겨버렸을지도 모를 드렉슬러 조차 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가, 싶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게 했다. 그는 드렉슬러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대신 이정도는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의 옆에 서서 대신 업무를 봤다.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건지, 로라스가 클랜 승인을 두 건, 관리비 위탁을 여섯 건 처리할 동안 그는 로라스의 동선을 따라 시선만 움직일 뿐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드렉슬러를 바라보던 로라스는 클랜 가입 신청서를 받으며 오전 업무를 마감짓고는, 작게 웃으며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2. 6월 10일.
나는 그 여름날을 기억한다. 고국보다 훨씬 서늘했던 트와일라잇이 그맘때쯤 유독 푹푹 쪘다. 공기도 바싹 말라선 이대로 가다간 다 죽겠다며 앓는 소리가 났고,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대던 회사와 연합조차 일시 휴전을 거론하며 회의를 잡았다. 난다 긴다 하는 사이퍼들 조차 쉽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이례적인 더위에, 양 측은 한 번 쯤은 터질 줄 알았던 충돌 한 건 없이 휴전에 합의했다. 오죽했으면 그 홀든도 축 쳐져선 아무말 없이 퇴근했었지.
"다리오. 있나?"
"들어와."
지금와서 생각하는건데, 네가 날 찾아온 그날이 그렇게까지 덥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너를 자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넌 그날도 갑주를 갖춰 입곤 투구까지 쓰고 왔고, 나는 그런 너에게 질려버려선 보는 사람마저 더위에 쪄죽게 만들 셈이냐고 네게 한 소리 했었는데, 그때 너는 변명 대신 그런가, 하며 투구를 벗었다. 아니나 다를까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과장 좀 보태서 난 그때 네가 땀으로 세수라도 한 건 아닌가 싶었다.
"너 빨리 씻고와라."
해서 난 너를 욕실에 막무가내로 들여보냈ㅡ아니, 정확히 말하면 밀어넣었다. 너는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는 욕실을 보곤 갑옷을 벗어 내게 내밀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네 무구를 받아다가 잘 세워뒀다. 좀 더 사려깊은 놈들이라면 입을 옷가지 정도는 준비했겠다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어쨌거나 나는 다른이들이 말하는 그 무신경함 덕분에 네 무구를 살펴볼 기회가 생겼던 셈인데, 지금도 똑똑히 기억할 만큼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 더위에서도 네 갑주를 부위별로 살펴보면서 무게는 어느정도고 내구성은 얼마나 튼튼한가 마구 써내려갔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죽이는데."
하지만 그건 천하의 너라도 무례하다고 받아들일 소지가 충분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구는 목숨이었다. 그때 내가 했던 행동은 허락 없이 네 목숨을 건드린 것과 다름 없었다. 하물며 네가 다 씻고 나올 때까지 나는 네가 내 연구실에 들렀다는 사실마저 슬쩍 까먹을 뻔 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도 너는 조금 놀라는 듯 하더니, 곧 웃으며 내게 다가와서는.
"다리오, 옷 좀 빌려주겠나?"
"어.........어."
너는 언제부터 내게 네 목숨을 맡기고 있었던 것일까. 전부 다 버렸는데도 너는 기어코 나를. 나는 그것이 누구에게나 친절한 너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을 분명 알고 있었지만, 꼭 내가 아니더라도 너는 비슷한 반응이었을게 분명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네 박애에 가까운 무언가에 그렇게 속절없이 이끌려 버렸다.
3. 12월 25일?
그 일이 있은 뒤로 나는 여름날 한 가운데에서 어서 겨울이 왔으면, 하고 추위를 갈망했다. 너를 생각할 때 마다 내 주변은 전투 조차 쉬게한 그 더위는 전부 날아가버렸고, 대신 그보다 훨씬 뜨거운 너로 가득 차버렸다. 그러다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면 혹시 더위 먹은게 아닐까 머리라도 감고 나오면 좀 나아지겠지 싶어 욕실에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네가 여기 머물렀음을 떠올리고는 거품도 다 닦지 못한 채 뛰쳐나왔다. 그런 나를 진정시킬 수 있는건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이러면 뭘 하나, 어차피 나 혼자 바둥대는건데.
웃긴건 그렇게 한 번 가라앉아도 너는 떠날 생각조차 않고 내 주변을 빙빙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너를 떠올릴때면 나는, 그래도 너만큼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리곤 했다. 갈망이라기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그것들은 얄궃게도 감정적으로 무방비한 상태일때만 튀어나와서 나는 방비책 하나 세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그럴때면 나는 겨울 중에서도 성탄절이 왔으면 했다. 너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고, 난 연구실에서 홀로 밤을 지새다가 옥상에 올라가 별을 바라보는 그 때가 되면, 너도 버리고 홀로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시금 혼자 서 있다 보면 너도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4. 9월 17일.
"언제부터..."
드렉슬러는 장장 여섯 시간만에 간신히, 그것도 말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로라스는 먼저 음식을 주문하고는,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드렉슬러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은 이제 익숙했다.
"한참 전부터."
5. 6월 10일.
나는 그 여름날을 기억한다. 무척 더웠던 그 날, 나는 네 연구실에 들렀다. 어찌나 더웠는지 공성전마저 잠시 멈추자 합의했었기에 무장을 갖추고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엔 어쩐지 더 진지해져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무장을 갖추고 가곤 했다. 그렇다곤 해도 슬슬 투구에 땀이 차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네 한 마디 말에는 그리도 약했다.
"보는 사람 쪄죽겠다. 좀 벗어라."
"그런가."
대번에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좀 끈적하기는 했다. 이내 그는 결심했다는 듯 다짜고짜 등을 밀어 제 욕실로 데려갔고, 물기를 걱정하던 나는 곧 바싹 말라있는 욕실 바닥을 보고는 밖의 날씨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래, 그가 허튼 짓을 할 리가 없지. 무척 맹목적인 믿음이었지만, 그 만큼은 믿고 싶었다. 나는 갑옷을 벗어 그에게 건넸고, 신나서 달려가는 그를 보며 웃음지었다. 사실 저는 저 웃음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던가. 나는 이미.
6. 9월 17일.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 하면.
7. 12월 25일.
"야, 너 오늘이 딱 백 일 째인건 아냐?"
드렉슬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가? 어쩐지 하늘이 맑더군."
로라스는 더 말하지 않고 드렉슬러를 끌어안았다. 사내 파티라고는 해도 24일 저녁에 시작한 파티는 이미 막바지였을 것이 뻔했다. 농땡이 아닌가, 싶던 로라스도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오고 보니 조금 춥긴 했지만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내일도?"
"내일도."
"그럼 별이나 보러 가야겠다."
"음."
그는 곤란하다는 듯 턱을 긁었다. 드렉슬러는 저와 달리 일정이 있을 로라스를 눈치채고는 바로 사과했다.
"아, 어, 미안. 자선 파티 가야되지?"
"아니, 아닐세. 그건 큰 문제가 안 되네. 대리인을 대신 보내도 되고.."
"괜찮겠냐?"
"물론. 다만 미리 사과하지."
뭘? 하는 드렉슬러에게, 로라스는 귀엣말로 속삭였다.
"자네는 오늘 못 자."
8. 3월 3일.
나는 어쩌면 자네를.
ㅡ
140917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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