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명계는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거쳤다. 어떤 감시관은 부장으로 승진했고 어떤 차사는 죗값을 다 치러 퇴사했다. 빈 자리는 죗값을 치를 마음이 생긴 영혼이 채웠다. 여를 비롯한 차사들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 일에 치여 덮어두었던 과거를 다시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인원 배치가 끝나자 마자 떨어지는 소집령이 문제다. 내용상으로야 정복 차림으로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면 견습 차사들이 자리를 안내하고 추후 일정을 설명하는 그냥 그런 소집이다. 다만 인사개편 직후의 소집령은 차사들에게 술잔 꺾는 자리로 유명했는데, 뒷맛 깨나 씁쓸할 저승사자 처지를 잊을 만 하면 떠올리게 새겨둔 신의 안배가 술을 불렀고 그네들은 술을 마다하지 않는 특성이 있었다.
"저 선배도 갔대?"
부어라 마셔라 달릴 만 한게, 차사들은 소집령에 전부 응했지만 만석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퇴사자의 자리 몇은 비었다. 떠난 이는 말이 없지만 남은 이는 느끼는 게 많은 자리다. 그 장도가 독해 기워낸 삶을 사는 차사들조차 경각심이 들게 할 정도로 자극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어."
이번 소집 때 여는 제 근처, 한 기수 위 선배인 차사 자리가 빈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 몇 백년 전에 서류 처리 제대로 못 한다고 저를 볼 때 마다 혀를 차던 차사였다. 그날 여는 뒤풀이 겸 친목 도모 술자리에서 붓고 붓고 또 부었다. 한참 뒤에 그런 그를 데리러 온 도깨비는
"기임, 신?"
하며 저를 부르는 연인을 보며 눈 크기를 키웠다. 쟤도 취할 줄 알아? 그와중에 한 테이블 어치 시꺼먼 정장 패밀리의 시선이 한 점에 모였다. 신은 망자가 될 뻔한 이들에게 건넨 샌드위치 갯수를 떠올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죄인이 된 것 같아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여의 곁으로 제 긴 다리를 휘적휘적 옮겼다. 그나마 여 바로 옆에, 여 말고도 저와 안면을 튼 사자가 앉아 있었다. 여의 후배라던 이였다.
"아이구! 안녕하심니가!"
발음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신을 알아볼 정도의 정신은 건사한 듯 했다. 신은 고개를 까닥였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누과 불러쒀?"
"저요옵!"
여는 손을 번쩍 들었다. 우워어어! 놀리는 음성이 괴성이 된지 오래였지만 신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아두느라 혼났다. 약속한 시간을 한참 지나도 오지 않는 차사를 기다리다 다음 날 쪼일 각오를 하고 전화를 걸었다. 답잖게 저를 부르기에 한걸음에 달려왔더니, 제법 보람찬 하루가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어디로든 데려가 무슨 일이건 치를 생각을 하며 여를 부축했다. 여는 웅얼거리며 그에게 뭐라 중얼댔지만 신은 자그마한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안아들려던 찰나, 여가 번쩍 눈을 떴다.
"소개."
정신을 차린 줄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저를 소개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신은 술 한 모금 안 걸친 제가 다 알딸딸해지는 듯 했지만, 이런 여는 또 이런 여 대로 귀여웠으므로 조금만 더 있다 갈까 싶어 잠깐 자리에 앉혀 제 어깨에 여를 기댔다. 여는 민재에게 손가락을 쭉 펴 삿대질했다.
"네가."
그런 여의 주문아닌 주문에 민재는 근엄한 표정, 비장한 태도로 벌떡 일어섰다. 양념만 묻어 있는 앞접시 몇 개가 앞으로 엎어졌다. 괜찮겠지. 신은 싸하게 식은 여의 손에 제 열기를 살살 옮기며 시선을 옮겼다. 곧 그는 제 안일함을 곧바로 후회해야 했다.
"슨배님네 소문! 무스어엉한, 그, 뭐야 그거. 독개뷔? 두왜심니돠!"
민재는 제 위의 전등에 인사했고 주변에 앉아 있던 차사들도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쟤네 둘 만 그런것도 아니고 다 저 모양이야? 신은 저도 모르게 검을 꺼내야 하는지 상황을 저울질했다.
"돗개비?"
"예에에."
독개뷔도 아니고 돗개비도 아닌 도깨비는 모든 의지를 잃었다. 그는 연인만 데리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김 신은 인간의 거죽을 쓰고 있어도 그 근본이 불이고 물인 존재라 인간의 입장에선 쉬울래야 쉬울 수가 없었다. 인간의 세상에 계실 뿐 굽어 살피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런 분을 모시는 집안이란다. 이미 떠난 이가 덕화를 곁에 두고 늘 하던 이야기다.
"김 비서님."
그래도 신은 저를 수행하는 인간에게 퍽 살가웠다. 부와 권위를 주었고 구태여 걷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대대로 모셔온 유가는 그와 함께 밖에 내보일 수 없는 과제도 세습했다.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신의 단위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온전히 인간의 영역이라 신에게 이야기해도 한계가 명확했다.
"네, 덕화군."
신의 감정은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이 요동칠때면 주변이 함께 뒤집히는데 이는 신이 쌓아온 세월로도 막을 수 없었다. 작은 변화에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큰 변화엔 산천초목이 요동쳤다. 마음 먹기에 따라 싹이 틀 춘삼월에도 낙엽이 진다. 기나긴 생에서 신부를 만난 시절에는 때아닌 꽃나무 축제도 여러번이었다.
"갑자기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덕화의 말에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던 이가 잠시 손을 멈췄다. 인간에게 신의 변덕은 때때로 배려였다. 유씨 집안 사람이 아닌 그도 온 세상을 바꿔놓는 신의 능력에 기대면 나름대로 그날의 신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모처럼 말끔한 하늘, 자던 이도 깨울 햇빛 너머에 먹구름 잔뜩 낀 곳이 있었다. 그 사이, 벼락이 한 줄 지나간다.
"글쎄요. 삼촌 분 무슨 일 있으셨나요?"
덕화는 집히는 게 없어 깍두기 한 점을 마저 씹어 넘기다 며칠 전 아침을 떠올렸다.
"연근이요. 일부러 싱크대까지 뒤집어 놓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지? 끝방 삼촌이 뭐라고 했나?"
도깨비의 이름값을 생각해보면 김샐법한 화풀이다. 유가와 함께한지 수백 년, 언젠가의 김신은 가신의 고뇌를 가엽게 여겼다. 신은 그들이 고뇌를 해결할 수는 없어도 감당할 수는 있도록 제 스스로 조금 하찮아지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대가 덕화까지 내려오면 그의 변덕이란 제 성의가 담긴 연근 조림을 허락없이 버리면 심술을 부려대 제가 화난 걸 알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선에서 그쳤다.
"저런."
그는 머리를 벅벅 긁는 덕화를 바라봤다.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인간이 못하는 건 다 할 수 있다더니 연근 조림만 건드렸다 하면 참사가 난다고 한참 전부터 덕화가 곡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굳이 도깨비 티를 낸다니까. 왜 이런대요, 한참 살았으면서."
그는 한때 당연했을 일들에 혀를 차는 덕화를 바라보며 또 자랐구나 실감했다. 끝이 한 뼘 가까워 진듯도 했다.
"배려죠."
"배려요?"
"멀리 보시는 분이니까요. 덕화 군이 떠난 뒤도 보실거구요, 떠나기 직전도 보시겠네요."
이야기에 세상이 순간 공백이었다. 덕화를 위해 그는 모른척 수저를 들었다.
신은 문을 열었다. 제 방에서 끝방까지 한 순간이었다.
"바쁘냐?"
"거의 다 했는데, 왜."
마침 여는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태연히 손을 풀며 시선을 맞췄다. 망자를 직접 마주하는 순간은 아니었지만 코트만 걸려있을 뿐 베스트까지 제대로 갖춰입은 상태였다. 신은 그런 여의 모습에 오히려 더 배알이 뒤틀렸다.
"거실에 두고갔더라."
그는 여의 책상 위에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평소 망자를 관리할 때 쓰던 봉투의 두 배는 긴 봉투였다. 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퇴근하자 마자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드라마를 보다가 깜빡 졸았는데, 신이 깨우기에 비몽사몽 침대로 몸만 움직여 한 숨 푹 자고 일어나 방정리를 하는 사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 어……."
봉투 안 내용물만 아니면 고마워 하고 끝날 일인데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내용이지만, 신이 보기에 그 봉투 안에는 여의 상태를 미루어봤을 때 볼 일 없어야 할 단어가 너무 많았다. 마침 툭, 신의 손을 떠나며 봉투 밖으로 내용물이 샜다. 정기 검진 관련 알림. 문자는 덤덤하게 여를 두드렸다. 신은 온 몸에 불을 두르고 있었다. 자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한동안 날이 좋아 뽀송히 말랐던 대지가 그새 습기를 머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줄기를 삼켰다.
"말 좀 해봐."
여가 이 집을 골랐던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홀로 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제일 컸다. 인간의 눈에 별날 일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어야 제 한 몸 누이고 쉴 수 있는 처지였다. 확실히 하기 위해 계약서까지 썼건만, 덕화도 모르게 그의 뒤에 있던 자의 질문에 사자의 치밀함은 의미를 잃었다.
"별 거 아냐."
결과적으로는 비를 피해 땅을 파다 수맥을 건드린 꼴이었다. 제 죄가 많아 생긴 일이라 생각하며 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신중하게 한 발씩 딛으면 못 갈 곳이 없다. 한참 전에 꼬였던 신과의 관계도 그렇게 풀어나갔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것이다.
"별 게 아니라고? 넌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지금?"
첫 걸음부터 난항이다. 시퍼런 불덩어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여는 살짝 몸을 젖혔다. 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백 년 단위로 꾸준히 받아."
"저승사자가 무슨 정기 검진을 받아?"
"불 좀 끄고 말해."
그는 시선 한 번 안 돌리고 불덩이가 붙은 손을 대충 휘저었다. 전등이 꺼졌다.
"그 불 말고!"
여의 목소리가 천둥 한 번에 자취를 감췄다. 여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눈 앞은 진노한 김신이, 등 뒤에는 낮같지 않은 어둠이 퇴로를 막았다. 세상은 김신의 시선에 흔들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가 어디론가 떠나기라도 하는 것 처럼 굴었다.
"말 해."
이럴때마다 신은 제 앞에 선 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잊은 양 굴었다. 의지 한 조각이면 제 곁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질 수 있는 이에게 인간의 행동을 강요했다. 하지만 손바닥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기 마련이라, 똑같이 굴어 그대로 굳는 여에게는 늘 잘 먹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제 방에서 봉투를 눈앞에 두고 태울까 한참을 고민했었다. 발신인이 빈 봉투였다. 태워도 하루면 돌아올 봉투였다. 고민은 여가 잠에서 깨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착각이라도 하고 싶었고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었다. 그는 제 의지에 충실한 도깨비였다. 그래서, 못본 척 거실에 다시 두고 나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에게 속는 건 예전부터 익숙했으니 한 번만 더 속아주자고 다짐하면서.
그런데 목소리가 들렸다.
잊지 않았으면
그의 목소리중 제일 진실된 목소리가 들렸다. 제 손으로 사실을 볼 바에야 변명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을 찔렀다. 그 어느것 하나 두고갈 생각이 없다는 여에게 거짓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일방적으로 듣는 처지면서도 이미 듣고 만 신은 듣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 사실에 천불이 나 불을 몰고 문을 넘었다.
"……."
그러나 여는 그런 신의 심중을 아직 알 수 없었으므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신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하나 생각하느라 바빴다. 시선이 스치는 동안 집밖은 빗방울이 메우고 방은 불이 메웠다. 신의 불은 제 몸을 태워 여의 형체를 밝혔다. 말하기 전까진 벗어날 수 없을거란 걸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여는 신의 형체를 번갯줄기가 지나갈 때가 아니면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설명해.
그 와중에 신이 음성을 쏘았다. 여는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죗값일까?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몰랐고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떤 면에서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그에게 있어서 도깨비는 신이 유일하다. 하지만 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여가 아니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차사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선배, 동기, 후배, 당장 집히는 선택지만 합쳐도 작은 나라가 하나 나온다. 대처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요령을 피울 수도 없다.
"사내복지야. 일 안 터지면 버틸 만 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는 사실만 말했다. 형식상 하는 건데 왜 받는지도 잘 모른다. 큰 의미를 두는 차사도 없다. 사고가 나도 뒷처리가 번거로울 뿐이라는 걸 잘 알지 않느냐…….
"그걸 어떻게 믿어."
하지만 신은 그런 여를 알면서도 증거를 내 놓으라 닥달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제 3자의 사실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저승 발 서류는 혼으로 읽는 것이라 맨 앞장 한 문단만 읽어도 진실됨을 알 수 있다.
"보고 온 거 아니었어?"
"안 봤어."
그가 원하는 건 여의 대답이었다. 여는 늦게나마 알아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책상에 흩어진 서류더미를 잘 갈무리해 이리저리 훑다가 한 장을 꺼내 신에게 건넸다. 신은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럼, 봐."
요구한 건 저 자신이면서도 지레 겁을 먹었다. 겉으로나마 상처입지 않는다는 건 곁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인간 중 그 누구도 신에게 줄 수 없는 가치였다. 언젠가 떠날지언정 곁에 있는 동안에는 아파하지 않을까 걱정할 일 없는 이는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저 종이 한 장은 그런 신에게서 여를 송두리째 뺏어갈 지도 몰랐다.
"봐도 돼."
그런 그에게 여는 재차 서류를 건넸다. 신은 저도 모르게 불을 꺼트렸다. 공간을 메웠던 불빛이 사그라들어 순간 어둠이었다. 여는 몇 걸음 걸어가 스위치를 눌렀다. 팟. 손길 한 번에 도깨비 터에 빛이 내렸다. 인간이 선물한 빛에 기대, 그는 비로소 신을 볼 수 있었다. 종이 한 장 건네받았을 뿐인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짧다면 짧을 내용을 되짚었다. 이승에 장소를 지정해둘테니 인사팀에서 연락오면 방문할 것. 요란하게 울리던 천지가 고요해졌다.
"……."
신은 방금전까지 몰아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무탈한 게 고마워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뭐야."
"날이 좋아 집에만 있기 적적하여."
때아닌 장대비였다. 전국적으로 맑을 예정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던 아침 뉴스 볼 낯이 없다. 여는 제 관할이 도깨비가 아니라는 점에 또 한 번 감사했다.
"받아."
그러거나 말거나 신은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사탕 하나가 더 커다란 신의 손에서 앙증맞게 누워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난 어린애야?"
"부담가질 필요 없다. 내 따로 챙긴 것이 아니니 사양하지 말고."
여는 주먹 쥔 손을 들어 검지만 편 뒤 제 머리 주변에서 검지를 빙빙 돌렸다. 신은 허허 웃기만 했다. 가져가기 전까지는 손을 그대로 둘 기세라, 여는 눈을 질끈 감고 사탕만 받아다가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러자 마자 신은 소파에 걸쳐둔 코트를 들었다.
"너 진짜 가게?"
얼굴만 보면 보살이 따로 없었다. 여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 슬슬 눈길을 피했다.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날 받아둔 거라면서요. 덕화의 질문에 가는 데 순서 없다는 대답을 한 것은 저인데, 뜬금없이 생각나 덜컥 불안해졌다.
"그래 그래. 내 산보 나가는 김에 가는 것이니 부담가지지 말거라."
"도깨비도 검진 되냐고 물어봐줄까. 한 번 정도는 검사비 내줄 의향도 있어."
여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럴 필요 없다."
"부담 가지지 말고."
"아니래도."
"아니면 날씨가 왜 이래?"
여는 지금이라도 연락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날씨가 뒤집힌 것 보다 이런 날씨로 뒤집어 놓고 날이 좋다고 하는 신이 더 이상했다. 꾸르릉. 저번만큼 심하지는 않아도 꿀꿀하긴 매한가지다. 어쩐지 이번 주에 명부가 몰려 있더라니 신도 거기에 기여를 한 것일까.
"내 역작이 생을 등졌다기에 그를 애도하던 참이다."
"뭐."
"연근 조림."
"먹고간 줄 알았는데."
말만 그렇다 뿐이지 안 먹을 건 신도 여도 덕화도 알았다.
"지레 찔려서 말하더구나."
삼촌, 미안! 진짜 미안! 내가 그거 정말 먹으려고 했는데 진짜진짜 그건 안 되겠어서 그랬어요.
안 먹고 버렸다고?
……삼촌?
안 봐도 본 듯 했다. 여는 우산을 펼쳤다.
신은 사탕 바구니 하나를 통째로 제 주머니에 털어 넣고 따라가서는 로비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에게 쥐여준 하나 말고는 자각하지 못하는 새 하나 둘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신은 벌떡 일어났다. 주머니 속에서 놀란 사탕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내가 본 것만 다섯 개 짼데."
"생전 처음이라 떨리기 그지없구나. 어디, 아프고 그런 건."
"있겠어. 인간의 생이 없는데."
웬간한 재해로는 기스도 안 나는 몸이다. 둘 다 그랬다.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받자 신의 긴장이 풀려간다.
"이빨 안 썩냐."
"안 썩지. 인간의 생이 아닌데."
그러네. 여는 사탕을 꺼내 껍질을 벗기고 입에 물었다. 상앗빛 땅콩향이 번졌다. 몇 백년 묵은 이가 홀로 고심해 제일 익숙할 맛으로 고르고 고른 결과물이었다. 괜찮네. 무심코 신에게 소리를 흘리며, 그는 느긋하게 걸어가 엘레베이터를 잡았다.
"바로 안 가게?"
"날 좋다며."
신은 더 말하지 않았다. 둘은 천천히 건물을 나섰다.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듯 맑기만 했다. 그가 여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 순간, 순식간에 빗방울이 사라진 덕분이다. 덕분에 우산이 갈 곳을 잃었다.
"좋네."
정말 그랬는지 여는 제 사탕을 입 안에서 굴렸다. 다라락. 이빨을 긁다가 달각. 사이에 자리했다가도 도로록. 혀를 스쳤다. 인간이었다면 들을 일 없을 소리, 보일리 없는 장면들이 신을 옭아맸다. 아.
"또 먹게?"
"어. 먹는 거 보니까 당기네."
신은 막무가내로 사탕을 하나 더 까 입에 넣었다. 둥근 사탕은 제 입 속에서도 똑같이 달각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 밖으로 나왔다 사라지는 여의 사탕에, 혹은 사탕의 주인에게 눈독을 들이는 제 자신을 발견했다. 얄궃게도 이럴때마다 그의 심정은 새어나오지도 않아서 불쑥 다가오는 이를 피하지도 못할 만큼 저를 부추기기만 했다.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신은 눈을 꾹 눌렀다 뗐다. 세상은 여전히 맑았다. 그 한 가운데엔 여가 서 있었다. 이름을 휘감아 입고 입 안에는 사탕을, 사랑을, 사탕을, 아, 내가 왜 이러지. 애증 애정, 두 획 차이더니 사탕 사랑, 몇 획 차이인지 몰라 헤메이나. 아니면 변덕을 만성 질환으로 달고 사는 도깨비 생, 드디어 변덕 한 번 더 부릴 작정인지.
"그냥 하는 소린데."
사랑은 전쟁이다. <전쟁과 사랑>의 캐치프라이즈다. 신부도 여도 없이 홀로 살던 시절, 신은 TV를 보며 제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늘 이길 거라고 단정지었다. 인간일 적 그는 퇴로 없는 전장에 수없이 섰고 끝의 끝까지 살아남았다. 인간이 아니고 나서는 퇴로 없는 전장이 없었다. 그 홀로, 없는 퇴로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도깨비에게 뒤가 없는 전장을 선사한 건 이미 떠난 그의 신부가 유일했다. 셈하면, 이번에 선 곳은 도깨비 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번째로 맞는 퇴로 막힌 전쟁터다.
"내가 널 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좀, 힘들어서. 그래서."
신은 검을 들었다. 누군가 하사한 검이 아닌 제 스스로 갈고 닦은 검이었다. 이 검을 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제 모든 세월을 기억하는 존재가 그렇게 믿었으므로 이는 기만이었으나 그는 제 감정을 억누르느니 제 기억을 버리겠다고, 방금 그렇게 선언한 참이다.
"그래서 그냥 해본 소리야."
한 뼘도 걷지 않았는데 하루종일 달린 것 처럼 입이 달았다. 신은 하루종일 집어삼킨 사탕 탓을 하며 침을 삼켰다.
여의 방은 극도로 단정했다. 기억이 없던 시절에는 마음에 둘 게 없어서 그렇다길래 신경쓰지 않았는데,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된 이후에도 여의 방은 변함없이 말끔했다. 이젠 속이 빈 것도 아닐텐데 왜 그런가 물었더니 이번에는 기억하는 게 너무 많아 다른 곳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생각이라도 하나봐? 낯간지럽게?"
"잊은 적 없어. 한 순간도."
그런 것 같았다. 분위기 풀 겸 살짝 흘린 말에도 이런 무게감을 가지고 돌아오는 마당에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마음 닿는대로 꾸리라 할 밖에. 그 뒤엔 청소할 겸 끝방에 들어갈 때 마다 바뀐 건 없는지 한 바퀴 둘러보는 게 버릇이 됐다. 이전부터 그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계절이 바뀔때를 제외하면 항상 같았다.
"퇴근했네."
그래서 끝방 사는 저승사자에게 인연 한 갈래를 더 묶었다. 한 번 볼거 두 번 보는 사이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어느날엔가 뒤를 돌아 봤더니 한 순간만 못 봐도 안달복달하는 처지가 된 제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엔 신이 진심을 담아 보살피는지 운이 좋았다. 상스러운 갓을 쓰고 죗값을 치르는 주군도 저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방금."
그 이후로는 우정의 탈을 쓴 은애 같은 건 치웠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가 있으면 저도 모르게 이마를 마주댔다. 숨결 닿을 거리에서 눈을 맞추면 뒷 맛이 그리 달기에 시도 때도 없이 다가갔다. 주군이었다가, 세입자였다가, 연인이 된 여도 만만치 않았다. 빛이 세상에 인사하기 전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그는 겁도 없이 제 방에 들어온다.
"안 피곤해?"
"그냥. 잠도 안 오고."
그러고는 능청을 떤다. 몸 상할까 전전긍긍하며 허벅지를 찌르던 나날도 아주 잠깐 있었지만 이제는 곁에서 울다 지쳐 잠든 모습을 보고싶다 속삭일 수도 있었다. 십중팔구 빳빳하게 굳어서 검은 연기와 함께 문 밖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런 그를 따라가면 눈을 굴리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할텐데, 모른척 팔을 벌려 끌어안으면 된다. 그러면 잠자코 몸을 맡길테니 그 뒤로는 문만 열면 일사천리다.
"같이 자."
온 세상이 행복해지는 순간의 한 단면이다.
눈을 떴을 때 제 방, 제 품안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손끝이 간질거린다. 끝방에서 홀로 잠들 때 죽은듯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불 속에 깊게 들어가는 건 같지만 어디까지나 제 품에 안겨 잠든다는 전제가 깔린 일이라 그랬다. 제 방에서만큼은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산 것 같고 죽은 것 같다 하니 제 연정은 수취인을 잘 찾아가는 편일 것이다.
그렇지만 만족할 수가 없다. 그의 이야기가 얽힐때면 저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만다. 요새는 끝방이 그렇게 탐이 났다. 여를 더이상 혼자 두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집 한 번 싹 뜯으면 끝날 일이지만 그래서야 제 손으로 벤 죄인과 다를 것이 없으니 마뜩찮고, 집의 구석구석을 살펴야 하는 집주인의 덕목을 핑계로 대고 들어간다면 못할 건 없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고, 저는 더 지속적으로 그러고 싶고.
"방 합치자고?"
"그것도 좋고."
그 이상이면 더 좋고. 슬쩍 쏜 마음이 닿았는지 마주앉은 이의 목덜미가 붉었다. 예전이라면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을텐데, 이제는 제가 더 안달이 난다. 그런 자신을 알면 저도 모르게 웃을 연인을 알지만 이미 그와 함께면 온 세상이 꽃밭이라 도리가 없다. 혹시 허락해줄까 싶어 희망을 가지고 두근두근, 뛰는 심장도 진정시키며 그를 바라보는데, 시선이 따스한게 이상하게 예감도 좋고 그런데.
"싫은데."
"들여놓을 거 있으면 미리 말, 뭐?"
투정이 비죽, 여과없이 뛰쳐나간다. 나 바쁜 도깨비야. 넌 바쁜 저승사자고. 현대인이라면 모름지기 없는 시간 쪼개 살아야지. 우리가 인간은 아니라지만 인간처럼 살아야 하니, 방 합치면 방까지 가는 시간도 아끼고, 그러면 한 번이라도 더 볼 수도 있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안 될 것도 없고.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 그럼 침구부터 바꿔둘까?"
"싫어."
"왜?!"
그냥. 그는 약만 실컷 오를 소릴 쏘았다. 그러나 제 연인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제게 다가와 머리를 부빌 줄 아는 이였으므로, 저는 그런 그에게 엄히 대하지 못하고 소파 위에서 울릴 생각이나 하고 마는 것이다. 간지러. 잠깐만. 신. 김 신. 야!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가 제 입맛을 돋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부러 저를 부추겨 제 욕심을 깡그리 날릴 셈인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홀랑 넘어가는 건 그 모든걸 부추기는 게 당신이라서 그런 걸 아는 건지 뭔지.
"아, 잠깐만. 진짜 간지러워."
눈 접는 것도 사랑스러울 건 뭔지, 어떻게든 저를 부추기는 건 누가 가르쳐 주기라도 한 건지.
너는, 너는 진짜!
삿대질이 날아 들어도 마냥 좋았다. 작정하고 쾌감에 절인 덕이다. 나도 좋고 저도 좋아 산천초목이 요동치는데 도의가 다 뭐고 충의는 다 뭐야. 네 이놈! 무신 김 신이 소리친다. 비켜! 안 보이잖아! 도깨비 김 신이 받아친다.
"못났어."
그러거나 말거나 연인은 펑펑 울며 저를 받아내느라 힘 한 줌 안 남은 티만 팍팍 났다. 등골을 꾹꾹 눌러도 움찔대며 입만 내밀고 고개를 돌린다. 좋아, 더 해줘, 분명 저 입에서 나왔던 소리였는데 태세 한 번 순식간에 바뀌는 구나. 요즘의 여는 그가 한참 즐겨본다던 아침 드라마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너도."
그런 그가 끝방을 지켜낸 건 놀랄 일도 아니다. 그의 승부욕은 그가 제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시절부터 알았다. 그런 면에 있어선 맹해보이는 얼굴 치고는 특출난 감이 있다. 지금 와선 그게 또 마냥 좋기만 하고.
"네가 더 못났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온 몸을 던져 막을 줄은 몰랐다. 끝방에 대단한 걸 숨겨둔 것도 아니고 들어갈 때 막아서지도 않으면서 같은 방 쓰자는 건 그렇게 칼같다. 몇번을 쪽쪽대며 물어도 대답 대신 제 손가락을 빨아올렸다. 비슷한 키가 무색하게 일부러 올려다보면서.
"내가 뭘."
그렇다고 명백한 어필을 모른척 하기엔 순간이 아까운 처지다. 공간의 제약 없이 사라졌다 나타나면 연인의 곁이면서도 그 자그마한 순간이 아쉬워 방까지 합치자 하는 판이다. 죽지는 않아도 떠날 수는 있는 연인인데다, 끝이 있긴 한데 명확한 건 또 아니라 되레 불안한 와중에 할래? 다가오는데 그걸 거절할 여력은 제게 없다.
"이유도 안 알려주는 네가 더 못났지."
힘 빠진 여의 손이 머리칼을 슥슥. 제 마음도 슥슥. 아. 벌써부터 풀리면 안 되는데. 아. 이거 저 자의 말버릇인데. 그냥 끝방이건 찻집이건 있고 싶은 곳에 있도록 둘까. 내가 가면 되니까. 인간 김 신이라면 기함할 소리가 도깨비 김 신 머리에선 잘도 튀어나온다.
"말했잖아."
"그게 말 한 거야? 비밀. 이게?"
"별 거 아니야."
"이유가 없다고는 안 하네."
"……."
밝힐 것이다. 도깨비 터에서 도깨비에게 비밀 안 밝히고 살 수 있나 어디 한 번 보자. 곧, 여는 저만큼이나 승부욕이 강해 비등하게 맞섰던 자가 지금 제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머잖아 끝방서 하루를 함께 맞고 맺는 저를 보게 될 것이다!
호기로웠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 끝방에 꼬드기러 가려고 방 문을 열었더니, 여가 밤에 선약이 있다며 제 방으로 쪼르르 걸어온 탓이다. 홀린듯이 연인을 들이고 제 침대에 뉘여 재운 뒤에야 그걸 알았다.
끝방에서 같이 잤어야 했는데!
그놈의 명계가 문제다. 그 작자들은 제 앞길을 막아설 때 마다 감형이라도 받는게 아닐까. 인간의 거죽을 쓴 도깨비가 되면서까지 명 받들어 역적 놀음이라도 하며 원을 풀 요량으로 궁에 갔더니 여는 이미 없었다. 명계로 떠났던 것이다. 제 연인이 된 그에게 들쑥날쑥한 업무 시간을 배정하는 곳은? 여전히 명계다. 사자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직책이지만, 결국 본적은? 명계다. 어디 좀 같이 가자고 부추기면? 저녁에 선약이야. 낮에 자야 해. 시간만 낮이고 자는 이에게는 낮잠이 낮잠이 아닐 때가 더 많았다.
"몇 시야?"
"더 자. 알람 안 울렸어."
도깨비는 결국 인간의 소원이 빚어낸 존재라 이승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저승에 묶인 연인의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데려가면 뺏겨야 했다. 늘.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도 또 여를 뺏어갔다. 수면이 어그러지니 식사도 어그러진다. 만든 곳에선 아침에 마시라고 냈을 하루야채조차 아침 저녁 가리는 꼴을 못 봤다. 일이 일이라지만 평탄하게 살기는 다 틀려 먹었다.
그렇지만, 그런 이와 살면서도 삶이 사무치는 순간이 온다.
"깨워……."
제가 어느 공간이건 여의 흔적이 보이면 전부 탐하는 것 처럼, 그가 어느 공간이건 제 흔적이 있으면 마음을 놓아버리는 걸 새삼 깨닫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러지 못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그게 그리 미어져선, 저는 어느날엔가 여가 그랬듯 슥슥, 등을 쓸며 도닥이고 만다.
그렇게 깜빡 잠들었다가 제 숨결에 막 눈이 뜨이는 순간의 여가 좋았다. 어디론가 떠날 것만 같은 이가 제게 돌아오는 순간은 뻥 뚫린 가슴 한 편을 뻐근하게 굳혔다. 언젠가와는 다르게 그가 눈을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제 생은 의미를 되찾았다. 함께 삶을 다듬어가는 동반자가 여라 울듯이 행복했다. 그런데.
그렇지. 여 였지.
번쩍, 벼락이라도 맞은 듯 했다. 하고 싶었던 것 중 직접 해낸 게 몇 개나 있었을까 돌이켰다. 머릿속이 연인의 이름마냥 새까맸다. 그런 이에게서 공간을 함께하네 마네 하고 있었던 걸까. 애시당초 황제가 되고 싶어 된 이도 아니었는데 누군가 억지로 관을 씌웠던 과거가 스친다. 실은 나조차 그의 공간을 뺏고 있었던 건가 혼란이 왔다.
"김 신."
그맘때 쯤이었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이름을 채워 부른 건. 유난 떨기엔 잠결인 것 같아 모른 척 양 볼에,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깼네. 응. 서로가 한 말이라는 것 말고는 의미 없는 이야기가 한두 마디 흘러간다. 그동안 저는 시간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알람이 울릴 것 같아 기능을 끄며 시선을 돌렸다.
"물 마실래?"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휘적대는 연인이 보였다. 온 몸짓에 잠이 묻어났다. 그 모습마저 저를 사로잡아 온 몸을 탐해볼까 싶던 참에, 제 연인이 대뜸
"울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울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늘 식어 있는 그의 몸에 모처럼 온기가 앉아 있는 드문 순간이었으므로, 그의 목덜미 한 번 탐하려고 요리조리 눈치를 보던 중이었다.
"아니, 안 우는데."
눈길을 눈치챘는지 니트에 묻혀 절반 쯤 보이는 손으로 목을 감싸길래, 저는 그의 손 끝에 한 번 혀를 굴리고 무슨 이야기냐 다시 물었다. 그는 절반 쯤 감긴 눈을 그대로 두곤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손 끝으로 자기 자신의 귀엣가를 가리켰다.
톡, 토독.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울어? 대답하지 못했다. 언젠가의 김 신이 창가 너머에서 울고 있었다.
"매번 혼자 잤을 거 아냐, 그 때도."
이번엔 내가 좀,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서 합치자고 했어. 그 몇 마디 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듣는 이 하나 없는데도 혹시나, 정말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신경쓰여서 둘만 알기로 몇 번을 약속한 뒤에야 겨우 말할 용기가 났다. 그렇게 까지 했는데도 막상 이야기하자니 얼굴이, 목이, 귓바퀴가 후끈거렸다.
"좀 그런가."
그래도 말해야 했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영 나오질 않아서 그와중에 미뤘다. 옷만 다 개고. 주름 생기면 드라이 클리닝 맡겨야 하니까. 청소좀 하고. 먼지 쌓이면 귀찮으니까. 좀 씻고. 덥다. 토마토가 없네. 같이 장 보러 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배 안 고파?
그렇게 고민하고 용기내서 이야기했건만 듣는 이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으느."
치커리를 씹으려다 혀라도 씹은 모양이었다. 눈물 찔금, 고이자 그새 세상 철렁, 내려앉는다. 지켜보는 것도 이리 힘든데 미처 보지 못한 순간에 다치면 어떨지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세월을 헛으로 보낸 건 아니라 어떤 일이 터져도 그린듯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괜찮아?"
여는 미리 떠둔 물을 한 컵 마셨다. 꿀꺽. 식도를 타고 숨막힌 분위기가 한 번 쓸려 내려간다. 제 입장을 그도 받아 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저도 포크를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구웠는지도 까마득한 등심 한 점이 입에 들어갔다. 무슨 정신으로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나도 할 말 있어."
구도는 여가 제게 말을 걸고 나서야 깨졌다. 족히 십여 분은 걸렸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당분간 조금 거리를 두자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꾹 참고 받아들일 정도로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매번 네가 먼저 왔잖아. 그 때도."
이어 목소리가 흘러든다.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어서. 그래서 싫다고 했어.
"괜찮아?"
고기를 씹었는데 혀를 씹은 걸로 착각하는 건가, 그냥 혀를 씹은건가, 혀를 씹었는데 고기를 씹은 줄 알고 있다가 혀 씹은 걸 알게 된 건가. 소스를 너무 많이 썼나. 소스를 쓰긴 했었나.
"……물 마실래?"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목, 귀, 볼, 손 끝, 누가 먼저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열이 붙는다. 제 터 주변, 미물 하나도 제 소리를 내지 못할 만큼 단단히 단속한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해서 다행이었다. 지금 막 여섯 번 째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시도했지만 얼마 안 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참담했지만 연인에게 정수리만 보여줄 수는 없어 간신히 고개를 들어 보면, 맞은편의 연인도 저와 똑같은 처지였다. 시선이 슬쩍 겹치자 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모르는 이가 보면 맞인사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상태로 식사를 계속하다간 둘 다 소화제를 찾을 판이라 깔끔히 포기하고 한 손엔 달걀, 한 손엔 맥주를 들었다. 술 기운을 빌 수 있으면 좋고, 핑계삼을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말 한 번 마음 한 번, 서로가 서로를 툭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냥 나는, 그게 걸렸나봐. 못 간 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푼 건 여 였다. 거죽이라도 돌아오라 기별하지 못할 거라면, 그냥 내가 직접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생각도 못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몇 모금이나 마셨는데 벌써부터 취기가 오르는 것인지 감이 안 잡혀 캔을 흔들었다. 절반은 족히 넘었다. 울화통이 터졌다.
"야, 그건 나부터 말리지."
내가 보러 간게 장군이야? 궁에 있는 황제 폐하지? 어처구니가 없어 가다듬을 틈도 없이 툭 던진다. 반응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려던 찰나, 제 연인은 제 고민을 깔끔히 날린다.
"어차피 그대로 계속 있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가관이다. 저놈의 자기 목숨 하찮게 여기기 병은 고친 것 같으면 도지고 해결했나 싶으면 튀어나오지.
"자살 다음엔 개죽음이냐?"
해도 너무했다. 기억이 없던 시절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제 멋대로 하는 건 이치에 안 맞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세상을 잠시 멈춰 세우고 그를 붙잡았다. 언제까지 불안하게 할 지 종잡을 수가 없다. 차라리 무슨 짓을 해도 제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안 죽어."
……무슨 짓을 해도 품으로?
"왜, 방이라도 합치려고?"
"아니. 내 방에 와. 매일."
사지로 내모느니 내 방에 부르고 말지. 우린 둘 다 바쁜 현대인이니 네 한, 내 한, 한꺼번에 해치우면 좋지. 서로만 보기도 바쁜 처지에 인간 김 신에게 뺏길 시간도 줄일 수 있지. 좋네. 전할 일 없는 마음은 단단히 봉해둔다. 저 말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자러 갈게. 매일."
시선이 얽혔다. 맑았다. 진작좀 이랬으면 좀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오늘 부터."
"오늘 부터?"
"오늘 부터."
신뢰가, 혹은 사랑이 얽혔다. 앞으로도 좀 이랬으면 싶을 정도로.
재개장 없습니다 땅땅 판결나면 안 드려도 되는건가....?
싶지만 이런다고 마음 바꾸실 분이면 그냥 안 닫은 상태로 두셨겠죠. 눈물을 머금고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