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2. 14. 17:09

4부작. 이어짐.




 모든 것을 잊지 않겠노라 결심한 여의 심정은 그가 기억하는 세월만큼이나 진중했다. 어느정도인지 여 자신도 정확하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느날 살펴보니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깊은 구멍 하나가 여의 마음속에 떡하니 생겨났을 정도로 무거웠더란다. 여는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어 차라리 낫다 여겼다.


 언젠가 신은 생각했다. 걔는 그게 문제야.


 박 중헌에 대한 무기력이건 김 선에 대한 애정이건 김 신에 대한 질투건 거기에만 집중해버린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신은 그런 삶을 살던 여의 최후를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바 있다.


"죄를 지었다 하여 지옥에서 몇백 년 쯤."


 그것도 모자라 차사직까지 삼백 몇 년 차 면서 느끼는 게 없었던 것일까? 구멍이 생기면 메꿨어야지. 혼자 안 되면 다른 이라도 불렀어야지. 여는 구백 여 년이 지나고 나서도 한결같았다. 기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일순위라 누군가 저를 들여다 볼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던 걸까. 그럴 거면 혼자 살던가, 아니면 더 높은 존재랑은 같이 살지를 말던가.


 아무것도 잊지 않았으면


 여의 신념이 어느날부턴가 신에게 새기 시작했다. 덕분에 같이 사는 신만 죽을 맛이었다.




 당장 인간의 소원을 듣기도 바쁜 도깨비가 여의 염원까지 듣게 된 건 어째서였을까. 사자의 염원도 인간의 것 만큼이나 변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시작이 인간 이었으므로 뿌리는 못 속여서 생긴 일일까? 아직까지도 새 생을 받지 못한 그가 가여워서 그랬던 걸까? 신은 쉽게 결론내리지 못했다. 이런 일은 신도 난생 처음이라 경황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깊게 연이 이어진 저승사자도 여 뿐이거니와 그의 소리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흘러들어 신의 혼만 쏙 빼놓고 사라졌다.

 오늘은 알람이었다. 늘어지게 자던 신은 여의 염원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야, 무슨 일이야.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리자 당연하게도 여는 없었고 대뜸 누런 종이만 한 장 보였다.


- 짐 옮기러 먼저 갑니다 -


 신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포스트잇을 뗐다. 덕화였다. 대뜸 삼촌부터 찾으며 대충 휘적휘적 해주면 안 되나? 묻던 아이는 심지를 단단히 굳혀가며 천천히 컸다. 그는 생각했다. 설거지는 하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리 생각하며 종이를 보자 끝자락에 깨알같은 글씨가 한 줄 더 써 있었다.


- p.s. : 설거지 하고감! -


 한 뼘 한 뼘 크던 아이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나. 신은 아이와 삼촌 조카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신은 조금 미뤄두기로 했다. 그런 생각만 하기엔 일도 없고 하늘까지 높아 볕을 즐기기 마땅한 날이었다. 대청소는 그저께 했고 빨래 더미는 어제 여가 처리하는 걸 봤다. 못난 동거인의 알람 서비스만 모른척 할 수 있다면 모처럼 느긋한 하루다.

 하지만 그는 곧 몸을 일으켜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 번 새면 한동안 들리지 않는 여의 심정이 또 샜던 탓이다. 한 번 더 놀라 벌떡, 신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변은 저 말고 바뀐 게 없다.


"손 많이 가는 일만 골라서 하는 구나."


 돌이켜보면 여 주변은 항상 손 댈 일 투성이었다. 정장이야 일터에서 입으라 하니 그렇다 치자. 채소도 그렇고 전생도 그렇고, 얽히면 한두 번 손길로는 어림도 없을 일이 내내 쏟아진다. 그래도 세월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제 제 앞가림은 제가 알아서 하긴 한다. 그런데도 눈길이 쏠리고 손길이 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그놈의 목소리! 잘 뻗은 몸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빤히 보며 살아도 맘 놓을 여유가 없다.


 언제까지 모른 척 해야 하지.


 평소 생각을 대화하듯 쏘는 것과 달라 듣는 이만 닿은 줄 알고 닿은 것이 념인 걸 안다. 받는 쪽만 알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신은 그의 염원을 흘려보낼 수도 있다. 시간 좀 걸리고 절차 복잡해도 차사들의 수장에게 직접 업무방해로 따져도 된다. 하지만 그대로 두었다. 제 코가 석자였다.

 세월이 무색하게 자각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감정 한 갈래가 있었다. 여의 염원이 들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떠난 은탁은 알았을까, 의문이지만 알려줄 이가 떠난 지 오래다. 하여 신은 홀로 끊임없이 곱씹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연인 줄 모르고 갈망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늦게 알았다. 은탁을 떠나보내고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 쌓인 세월이 얼만데 이제서야 알았다. 제 위의 존재가 가린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이 제 눈을 가렸다. 삭은 원망도 원망이라 세월만큼 쌓였던 탓이다. 원망을 들어내고 기나긴 인연에 매듭을 짓기 시작하고 나서야 그는 제 과거를 더 깊게 볼 수 있었다.

 무엇이건 항상 그였다. 희, 노, 애, 락, 어느 것 하나 그와 엮이지 않은 게 없었다. 제 삶이 기뻤다. 제 삶으로 고려를, 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여가 저를 버리고 고려를 버렸으니 노하여 돌아갔다. 그는 진심으로 제 군주를 경애했으며, 백성들이 저를 경애할 때면 그 모든 이들의 경애가 여에게 돌아갈 것을 기대했다. 무신의 퍽퍽한 인생 속 쾌락이란 그 신념 하나가 전부였다.

 충의로 매도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러니까, 첫 사랑인 줄 알았던 사랑은 사실 첫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제 너무 달렸나."


 신은 모른척 낑낑대며 내려가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웠다. 신은 뒷목을 몇 번 두들기며 내려가라 가라앉아라 중얼댔다. 좀 기다리면 나을까 싶어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드득 드득 온갖 곳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시선을 돌리자 반짝, 리모컨 옆 기기가 빛을 냈다. 그는 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왜."

"집에 아무도 없길래. 오늘 늦어?"


 짬이 난 건지 두어 번 신호음이 오가더니 금방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였다. 오늘 저를 깨운것과 다른 평이한 어투였다. 거짓말처럼 화기가 가라 앉았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대화 한 마디 어치를 채 못 갔다.


"덕화한테 말 했는데. 없어?"


 홧홧하던 속불이 장작을 받은 양 활활 탔다. 신은 거실을 빙빙 돌았다. 애꿎은 덕화 탓을 할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잘만 탔다. 여의 상태도 괜찮은데 그냥, 휘두를 생각도 없는 여에게 신 자신만 휘둘리고 있었다. 언젠가 신용카드를 원하던 덕화처럼 직접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답답하기만 했다.


"먼저 갔어."


 진정하자. 김 신. 잠시 시간을 멈추고 숨을 고른 신은 제가 생각해도 저 자신이 제법 대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물 반 퐁퐁 반의 싱크대를 본 그는 다른 의미로 열이 올랐다.


"그것도 싱크대 주변을 난장판 내놓고 갔어. 비눗방울만 모아놔도 놀이동산 간 것 같겠네 아주. 일어나자 마자 무료한 생에 자극도 줄 줄 알고! 기특하다 못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정말 모르겠어!"


 여는 와다다 쏟아지는 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용케 평정심을 유지했다. 한결같은 모습이라 적응한 지 오래다. 이제는 약올라 방방 뛰는게 끝도 없이 가라 앉아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고도 생각했다. 은탁을 떠나보낸 직후의 풍경을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지금 일어났다고?"

"어제 술 부었잖아."


 신은 태연히 대꾸했다. 


"해가 중천이야, 나태한 도깨비."


 말하면서도 여는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원체 제 살고싶은 대로 사는 이다. 저 때문에 쌩고생 했던 걸 생각하면 저는 그런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가신 집안이 따로 있다지만 사실 제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한 적도 있는 여다.


"나는 그래도 되거든."

"백수라 그런가."

"대표라 그렇지."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신의 모습이 순식간에 여의 머리속을 메웠다. 도깨비 불이라도 옮겨붙은 양 열이 올랐다. 유가의 사람들은 저런 자 어디가 좋다고 모시고 살 생각을 하는 건지! 여는 제 양 볼을 부풀렸다. 제법 됐지만 깨달은지는 얼마 되지 않은 습관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일 하는 저승사자."

"뭐."

"내일도 일해?"

"별 일 없으면 글피까지 쉴 걸."


 그러나 여는 제가 볼을 부풀리는 새 구백 여 년의 세월이 가라 앉았다는 건 몰랐다.


"내일 낮 비워."

"낮술이라도 하게?"

"외투. 안 맞추게?"

"새삼스럽게."

"이것보게?"


 술배 나왔어? 자신 없나? 신은 슬쩍 긁었다. 전혀. 답은 칼같이 돌아왔다. 두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얼른 와."

"늦어. 끊는다."


 뚝. 성격답게 군더더기 한 번 없었다. 이 자는 사회 생활은 아직도 한참 배워야 겠구나. 신은 투덜대면서도 떠날 날이 먼 저승사자를 떠올리며 즐거이 웃었다.

 그는 이제 이 모든게 무엇인지 말 할 수 있다. 갈망하고 취하고 싶은, 언젠가와는 다른, 하지만 엄연한. 한 번 자각하니 날아가지도 않는. 천 년 다 되어가는 삶 한 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가도 마냥 기뻐선 잡념이고 뭐고 모조리 태워버리는.




 신은 미리 장이나 봐둘 요량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연근 조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당연한 결과에 신은 번개 한 줄기 안 내렸다. 사실, 식성이 양극단을 달리지만 않았으면 여가 이 집에서 맞은 첫 식사가 그모양 그꼴이 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필 채식주의자에 하필 저승사자, 알고보니 하필 왕 여. 신은 제가 드라마를 써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고 생각했다.


"소스 다 떨어졌네."


 홀로 있기 적적해 켜둔 TV는 혼자서도 잘만 떠들었다. <전쟁과 사랑>은 실제 이야기가 방송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의도적으로 사연의 강도를 줄여 방영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각색을 하는 건 맞지만 덜 자극적인 방향으로 한다는 거, 이제는 알아주실거죠…….


"키친타올도 떨어졌고."


 그러거나 말거나 신은 주방 이곳저곳을 뒤졌다. 내일까지 미뤄뒀다 여와 함께 갈 수도 있었지만, 본의아니게 신입 차사가 그의 관할이 됐다더니 집 안에서 얼굴 보는 시간이 조금 줄었다. 영생을 사는 입장에서 그정도의 시간이야 찰나라지만 신에게는 한 줌이라도 더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신은 저와 같은 심정이었던 이를 하나 더 알았다.


"채식만 한다구요?"


 여를 떠나기 전, 선은 미련이 발목을 붙잡는다며 신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던 날의 누이는 금방이라도 울 듯 했지만 끝끝내 울지 않았다. 번복할까 하루에도 수 번을 고민한다고도 했다. 그 모습이 심금을 아려와 신은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무심코 나온 이야기였다.


"상스러운 식성이지. 네게 한 끗 도움도 못 주는데다, 알아 보지도 못하게 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다."

"아니, 그럼 난 왜 덤까지 넣어준 거야?"


 선은 분통을 터뜨렸다. 훤칠하니 잘생긴 남자가 매번 사들고 가길래 뭐라도 더 넣어주려고 선심썼더니 정작 그의 입 속으로 사라진 건 한 조각도 없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이 헤어지기 하루 전날 밝혀진 것이다.


"설마, 몰랐던 건."

"같은 업계 분들은 잘도 먹고 가길래 먹었겠거니 했지. 한 입도 못 댈 줄 알았나."


 그 뒤가 더 가관이었다. 데이트를 해도 카페나 갔지 밥도 한 끼 같이 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아. 가만, 그때 그걸 데이트로 치긴 해야 하나? 선의 이야기에 신의 억장이 무너졌다. 선아. 너는 다시 태어나서도 식사 한 번 같이 안 하는 자에게 홀렸단 말이냐……. 금방이라도 울듯한 신을 보며 선은 급히 둘러댔다.


"매일같이 와서 사갔는데 어찌 알겠어요."


 신은 한동안 치킨만 죽어라 뜯던 나날까지 함께 떠올리며 죽상이었다. 그러나 선은 더이상 무너질 수 없을것만 같은 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용케 그 이상을 해내고야 만다.


"성안도 훤하셨고."


 그땐 마냥 억울했다. 이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일도 없을 이가 누이를 홀릴 일인가? 그렇지만 지금와서 선이 제 앞에 설 날이 온다면 그는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너는 궁에 들어가 산 날이 있으니 나보다 잘 알겠지. 황족이란 다 저런 것이냐, 아니면 저자만 유독 저런 것이냐? 그럼 선은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그분이 유독 그렇지요. 그리고 그녀가 어떻습니까, 하면 저는 애꿎은 저희만 고생이라 대답할 것이다.




 은탁은 신을 웃게 했지만 여는 목을 태웠다. 곁에 두면 덜할 줄 알았더니 더했다. 하기사 그녀가 머무르던 때에도 곁에 있을 때 더 웃었던 것도 같다. 더 사랑해서 지는 건 이 자를 볼 때나 저 자를 볼 때나 같았다. 그러나 신은 탓할 이가 없었다. 이미 사로잡힌 지 오래라 시선도 빼앗기고 손길도 자각하지 못하는 새 새어나온다. 여의 심중마냥. 


"팔 좀 짧지."


 하지만 여와의 관계는 애정을 끼지 않아도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신은 그게 못내 억울했다. 도깨비 쯤 되면 인외의 존재라 혹여 환생이라도 만나면 이번에는 저 위에서 내려 볼 줄 알았더니 환생 못 한 저승사자일 건 또 뭐야. 한 번은 동생을 데려가더니 이번엔 제 차례일건 또 뭐고. 이거 반칙 아닌가?


"몰라서 물어보는거야?"


 신은 외투를 걸치며 물었다.


"아니. 알긴 하는데."

"그럼 왜?"

"이거보다 더 큰 게 다 나갔대서."


 위아래로 훑어 보니 팔만 짧은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맞질 않았다. 이래서야 기다란 호객용 풍선에 억지로 옷을 쑤셔넣은 꼴이다. 멀쩡하게 생겨선 옷에게나 몸에게나 못할 짓 하는 셈이라, 신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포기해."

"아까운데."

"벗어."


 가차없는게 여의 기억을 가져왔던 감찰관을 보는 듯 했다. 여는 눈물을 머금고 자켓을 벗었다. 직원이 다가왔다. 


"옷 들어오는대로 연락 드릴까요? 이름이랑 연락처 쓰고 가시면 되는데."

"네."

"그럼 저쪽 계산대에서 도와 드릴게요."


 직원이 옷을 건네받아 제자리로 돌려놓는 동안 여는 펜을 들었다. 


"외자 쓰시나봐요."

"집안 여력이라."


 여는 제 번호를 마저 적고 펜을 내려놓은 뒤 의미모를 기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신이 그를 보고 있었다. 둘 말고 모두가 멈춰선 세상이었다. 여는 주변을 살폈다.


"누구 커피 흘렸어?"

"아니."

"그럼 왜?"


 그의 이름 자 하나 긋는 것도 불충인 세월이 있었는데 이젠 누구나 그의 이름을 읽고 쓰는구나. 그런 세상이었지. 신은 차라리 서로의 기억조각이 맞춰지기 전에 여의 이름을 알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그렇게라도 한 번, 그를 불러보고 싶었다. 만일 여가 그러하듯 제 심정이 그에게 샜다면 여는,


"여야."


 하며 저를 부르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시도 없이. 때도 없이. 경황도 없이. 자다가도. 자려다가도. 떠올리고 싶을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다행이도 여는 도깨비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신은 그렇게만 말해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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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봄.  (0) 2017.01.27
Posted by _zlos
Goblin2017. 2. 10. 04:19


 4부작. 시작.




 여는 도망치듯 방문을 열었다. 조금만 더 늦게 나갔다간 김 신 특제 연근 조림이 전부 제 몫이 될 판이었다. 여만 유난인 건 아니고, 신의 가신인 덕화도 벌벌 떨었다. 신이 연근 조림을 만들면 보통 사십 분 좀 넘게 걸렸지만 그 결과물은 테이블에서 사십 삼 초를 못 버텼다. 간혹 여가 손을 걷어 부치고 통째로 다시 만들 때도 있는데, 이때는 그럭저럭 먹을 만 한 맛이 났다. 이럴때면 식재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결론만 남아선 복숭아 꽃잎보다도 여리고 민감한 김 신의 마음에 상처 한 줄기 크게 새기고 나서야 식사가 끝났다. 사실 그의 연근 조림은 여가 손을 들건 안 들건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사라질 운명이라 그 다음 회차는 없을 법도 한데, 그놈의 김 신 표 연근 조림은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튀어나와 집을 뒤집어 놓는 판이라 같이 사는 여만 죽을 맛이었다.


"끝방삼촌? 이 시간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출근."

"벌써요?"


 덕화는 소파에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는 늘어지게 하품했다. 사무실을 옮긴다나 뭐라나. 때아닌 휴가를 즐기기도 모자랄 할 판에 그는 어제 밤 뜬금없이 쑥 들어오더니 저 잠좀 잘게요! 외치고는 소파에 푹 처박혀선 코까지 골며 잤다. 깨우기엔 모양새가 이상해 이불만 꺼내 덮어주고 갔더니, 이제 막 깬 모양이었다.


"저번엔 이때쯤에 퇴근했잖아요."

"출퇴근 시간을 정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

"월급도 들쑥날쑥 하고, 업무 시간도 맨날 바뀌고, 하는 일은 죽은 사람이랑 부대끼는 거고."


 여가 대꾸할 말을 찾기 위해 입을 잠시 닫은 그 순간, 덕화는 고개를 팍 쳐들었다. 밤새 눌린 머리칼이 풀럭댔다.


"와, 이거 완전 3고직업아냐? 아니, 3고 맞나?"

"3고건 3D건 어제 그 거 빨리 치워. 나 늦어."


 그는 얼굴 빛을 바꾸더니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달려갔다. 여의 몫이 아니라면 죄 그의 몫이었다.




 신의 말버릇 그대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신은 제법 요리를 잘 했다. 육류는 애초에 즐기니 금방 익혔을 것이다. 여는 질색하지만 제 삼촌이 축생을 구울 기미만 보여도 곁에서 알짱대는 덕화의 눈이 진실 된 건 안다. 어류는 의도치 않게 도깨비와 인연이 엮인 인간 한 명이 증명해낸 바 있다. 처음에야 덕화가 김비서님, 하면 그는 덕화군, 하는 사이에서 나아가지 않았겠지만 지금 와서 그 시절로 돌아가기에는 엮인 연이 제법 깊은 이다. 세월을 함께 보내며 그가 숭어를 제법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도깨비는 가끔 직접 포를 떠 조카의 손에 들려 보냈다. 여는 그린 듯이 떠올릴 수 있었다.


"삼촌, 그거 어떻게 해요?"


 덕화가 곁을 서성이면,


"가르쳐 줄까?"


 신은 펄떡대는 생선을 휙 던졌다. 으허헉! 그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도망가는 제 가신을 대놓고 골통먹이는 데에 괴상한 재미를 붙였다. 가끔은 저를 부추길 정도였다. 그렇기는 한데, 어쨌거나 덕화가 집을 나설 때 손을 비게 두지도 않았다. 얼마뒤 바깥에서 그 맛을 떠올리며 이곳 저곳 찾아가도 이 맛은 안 난다더라는 후견인의 말을 전하는 덕화에게 온갖 근엄한 척은 다 하면서도 꽃나무 몇 그루를 확 피우는 도깨비는 신부를 떠나보낸 뒤라 그런가, 좀 드물었다. 덕화의 후견인이 아닌 집의 손님으로 그를 맞을 때도 있었다. 그럴때도 신은 그를 성의를 다해 대접했다. 가끔 그가 기절하긴 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으니 길게 가는 인연이 드문 도깨비 치고는 괜찮은 수준일 것이다.

 그러면 신은 야채를 즐기지 않아 연근도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일까? 의외로, 김 신 자신이 즐기지 않을 뿐이지 일단 만든다면 맛 자체는 제법 괜찮았다. 이건 여가 알았다. 신의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다.


"내가 그 상스러운 걸 언제까지 만져야 하는 거야."


 때아닌 물난리가 세상을 크게 휩쓸었던 시절의 일이다. 인간들은 그네들 나름대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 했지만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피해를 입은 이가 많았다. 예능 휴방이나 신작 드라마 연기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재해였다.


"몰라."


 산 자가 사자의 사정을 봐 줘 가며 망자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차사직은 벌이 아니었을까? 비상인 건 차사도 마찬가지였다. 업무 시간은 잘도 늘어나 퇴근도 막아섰다. 그 날의 여는 운좋게도 집 문턱을 밟았지만 근 사흘 만이었다.


"아는 게 뭐야?"

"내일 일정. 집 못 와."


 신은 넌덜머리를 냈다. 그는 여가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자 툴툴대면서도 틈틈이 야채를 손질해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냉장고를 채워 두었다. 끼니를 챙길 여유도 없던 여를 위한 배려였다. 그나마도 여는 잠만 자고 하루야채 몇 개나 간신히 챙겨 나갈 때도 많아서 덕화만 야채 복이 터졌었더란다.


"너 그거 혹사야 혹사."


 진지하게 다른 직장 좀 알아보지 그래? 덕화가 그러는데 요샌 취직하자마자 이직할 생각부터 한다더라. 신은 나름대로 생각해 뱉은 말이었지만 여는 고개를 저었다. 왜? 너 경력 탄탄하잖아? 요샌 신입보다 경력 찾는대. 자신감을 가져!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직할 곳이 없어."

"아."


 신은 금새 기가 죽었다. 


"……일만 안 터지면 버틸 만 한 곳이고."


 거기 완전 블랙기업 아니니? 한참 전에 방송이 끝난 드라마의 한 장면이 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무심코 생각을 열어두려다 급히 닫았다. 그런 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는 한숨만 푹푹 쉬다가 무심코 생각을 흘려 보냈다.


 터져서 그렇지.


 여는 찻집이 시장바닥 꼴이 나기 전을 떠올리다 설움만 차올라 축 늘어졌다. 따지고 보면 여의 여가 생활이 드라마가 된 것도 다시보기 서비스가 제대로 지원되기 시작한 이후긴 하지만 그때는 특히 심했다. 김 차사까지 급하게 충원해가며 온 천지가 비상이니 내색도 못 했다.


"뭐 사줄까?"

"아니. 잠이나 자려고."


 제법 연차가 쌓인 여도 녹초가 되는 판이었으니 막 들어온 차사들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위로하겠답시고 그들에게 한가할 때는 드라마 한 편 안 밀리고 볼 수 있다고 하면 아마 그들은 여가 윗 기수라고 저를 골탕먹이려 드는게 아닐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직장이었다. 불규칙이 괜히 불규칙은 아니었다. 여는 그 난리가 나기 전, 드라마 바로 전 시간대의 프로그램도 기억하고 있었다. 온갖 고된 직업을 찾아다니면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뭐였더라, 극강직업 이었나. 거기서도 차사는 코빼기도 안 비쳤다.


"먹고 자. 차려 놓을게."

"안 해도 돼. 뭐 챙겨먹을 기운도 없어."


 목소리도 한껏 가라앉았다. 여의 고개가 바닥을 보는 새 도깨비의 시선이 여를 살폈다. 눈매에 날이 섰다.


"빨리 옷갈아입고 나와."


 그때야 말씨름 할 겨를도 없어 잠자코 따랐지만 돌이켜보면 신이 맞았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주는대로 받아 넘겼지만 그 덕에 버텼다. 그리고, 그 때야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과장 좀 더해서 가끔씩은 신에게 제 식사를 맡기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그러니까……. 유독 연근만 그랬다.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게되는 건. 담아내는 모양새가 훌륭해 이번에는 다른가 싶어 한 조각 먹어보면 어김없이 끔찍한 맛이 나 당장 버리자고 소리치게 돋구는 맛이 나는 건. 신의 가신이라고는 하나 인간의 몸으로 사자의 서슬퍼런 분노에 눌릴 법도 한데 지지 않는 기세로 왜 또 이런 맛이냐고 신에게 짜증을 부리게 부추기는 맛이 나는 건. 직접 만든 신도 모른 척 한 입 삼키려다가 그네들의 무례한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가는 건.




 여는 사원복지를 누려본 적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죄가 중하다는 걸 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절대자의 배려를 몇 번이나 받은 이가 저와 함께 사는 도깨비이고, 그 자가 저를 지켜보는 이상 그의 팔자야 왕씨 성의 김 차사 치고는 제법 풀린 팔자다. 그게 복이라는 걸 여도 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인수인계가 꼬이는 건 도리가 없다. 졸지에 두 기수 쯤 아래의 김 차사 하나를 후배로 데리고 다니게 된 여는 이왕 꼬인 거 그대로 진행하겠다 의견서를 냈다. 덕분에 연근 조림은 피했으니 악행 뿐만 아니라 선행도 베푸는 대로 돌아오는 게 맞는 것일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늘은 그 후배가 처음으로 망자를 인도하는 날이었다. 관행상 첫 인도에는 악귀가 될 확률이 높은 명부는 제하는 편이라, 별다른 일만 없다면 오늘 하루는 괜찮았다. 시간이 조금 남아 그들은 페도라를 쓴 채 공원근처를 슬슬 걸었다. 날이 좋았다. 바람은 조금 차도 해는 높고 밝게 떠 있었으며 구름은 맑고 얇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녹빛으로 차 화려히 필 것 들이 많이도 보였다.


"선배님, 혹시 극강직업이라고 아십니까?"

"<너는 네 운명> 하기 전에 하는 거?"


 그새 극강직업은 시즌을 몇 번이나 갈아치웠다. 그저껜가, 보다가 점점 맥이 빠져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났다. 소재가 다 떨어진 티를 내는 게 다음 시즌은 못 버틸 것 같았다.


"한참 봤었는데, 저희는 결국 안 나오더라구요."

"나오면 안 되지."


 말은 그렇게 해도 남 일 같지는 않았다. 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고,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도 하나 더 안다. 따지고 보면 도깨비도 극강직업이야. 소원을 한 두명이 비는 것도 아닌데 그걸 나 혼자 다 처리하고 있다고! 돈도 덕화네 집안이 버는 거지 소원 해결해주면 수당으로 주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 기수 위의 차사들이나 볼 줄 알았건만 팔자에도 없었을 두 기수 위의 차사의 관할인 것도 신경 쓰일 차사를 괴롭히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평소에 맥락없는 이야기를 하는 성격이 아닌 이가 갑자기 TV프로그램 이야기나 하는 심정도 알 것 같았다.


"떨 거 없어. 떨 면 안 되고."


 자그마한 분수는 아직 물을 뿜지 않았지만 조각은 그대로였다. 시청에서는 아이들이 다칠까 염려된다는 민원을 접수받더니 분수 주변을 자그마한 돌담으로 막아두고 맞은편에 벤치를 뒀다. 한참 일과를 보낼 시간대라 벤치는 드문드문 차 있었는데, 한 곳에는 백발이 성한 이가 한 명 앉아 졸고 있었다. 사자들 만큼이나 각이 잡힌 정장을 차려 입은 그는 무슨 꿈을 꾸는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 만큼이나 멋들어진 미소가 햇빛을 양껏 받아 순간을 잊게 했다.

"다녀와."

 여는 고개를 돌렸다. 생이 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도 맑아 보이던 인간이었는데, 인간의 삶은 외양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여유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저와 함께 장사하던 상가 사람들에게 사기를 한탕 크게 치고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세를 불리더니,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부터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점점 더 대담해져 인연을 저버릴 만큼 손을 더럽혔던 것이다. 생애 내내 제 것이 아닌 것을 훔쳐 쓰면서도 책임 소재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갔지만, 여기까지 와서 제 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는 짐작만 했고, 직접적인 조짐은 직접 망자를 찻집으로 인도한 후배 사자가 느꼈다. 차를 내오겠다며 찻주전자를 기울였는데 주둥이가 무언가에 틀어막힌 양 찻잔을 단 한 방울도 채우지 못했다. 여는 대신 입을 열었다.

"손에 쥔 게 많으셔서 그런가."

 사자는 찻주전자를 내려 두고 망자에게 다가갔다. 여는 눈짓으로 선고를 허락했다. 사자는 망자를 다음 생으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떠난다면 어디로 도착하더라도 좋은 곳은 못 될 것이다. 여는 망자의 앞에 펼쳐질 장면을 몇 떠올렸다. 이승길은 없었다.

"차를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망자는 설명을 요구했다. 차사직은 공무 수행직이므로 그는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먼 길 가셔서요."

 삶을 살며 만들어 온 길을 걸어야 할 시간이었다. 신의 뜻이므로 어떤식으로든 지켜질 것이다. 사자가 그랬듯이, 여가 그랬듯이. 망자는 한참 난동을 부리다 홀린듯이 사라졌다. 여는 후배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둘만 남은 찻집은 고요했다. 다음 인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다. 여가 제 명부를 점검하는 동안, 차사는 혹시나 싶었는지 뒤로 돌아가 찻주전자를 다시 들어 찻잔에 기울였다. 이번에는 쫄쫄 잘만 찼다. 망자를 잘못 인도한 건 아닌가 겁에 질린 사자는 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겁니까?"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망자의 업이 틀어 막았어."
"예?"
"망각차는 망자에게만, 그나마도 자격이 없으면 못 줘. 자기가 직접 막은 거야."

 망각차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망자 자신의 삶 뿐이다. 찻주전자나 차를 낼 찻잔 따위는 망각차를 결정할 수 없었다. 사자는 전달하는 자의 역할만 했다. 그들의 권한으로는 차를 직접 내어주는 시기를 늦추거나 앞당기는 선에서 그쳤다. 기준은 신만 알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신의 뜻이려니 하겠지만, 확인할 수도 있는 겁니까?"

 여는 시간을 확인 했다. 사십 분 쯤 여유가 있었다. 몇 분 전 쯤에는 미리 가 있어야 하고, 다기를 정돈하는 시간이 필요할테니 실제로는 이십 분 남짓 남은 셈이다. 신의 배려를 이야기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여는 삼백 여년 전, 제 사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이래서 이랬던 거구나, 깨달은 건 덤이다.

"시간 얼마나 남았어?"
"사십 분 정도 남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차를 내린다 생각하고 잔에 한 번 내려봐."

 사자는 못미더운 표정을 내보이기는 했지만 여의 뜻에 따랐다. 그의 도전은 첫 순서부터 실패로 끝났다. 애초에 찻주전자를 들지도 못했던 것이다. 제법 우스운 꼴이 된 그는 여를 바라봤지만, 여는 뒤도 안 돌아보고 흐트러진 제 옷 매무새나 정돈하며 말했다.

"남은 명부 가져와."

 이 차사나 저 차사나 기수는 달라도 처지는 거기서 거기다. 시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짬 좀 차면 다들 안다지만 지금의 여는 좀 더 뼈저리게 알았다. 모든 기억을 돌려받은 이후 제 죄악 하나는 신 만큼이나 잘 알았다. 저승사자가 될 정도면 다들 이정도 죄를 지어야 하나, 신이 없던 9년 속 여의 고뇌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9년 동안, 거기에 더해 그 뒤로도 가끔씩 추억이, 악몽이, 기억 그 자체가 여 자신을 좀먹으려 달려들었다. 여는 더이상 피하지 않고 되뇌이기만 했다. 나의 죄다.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보다 행복할 수 없을 표정을 지으면서도 똑같았다. 잊지 않는다. 업이다. 안고 간다. 선도, 신도, 박중헌도, 여 자신도, 모든 것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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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oblin2017. 2. 7. 04:04



 여는 도망쳤


 도피를 잊은지 근 삼백 년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자는 언제나 제 권능이 닿는 모든 곳을 살폈으므로 차사가 된 뒤에야 의미가 없을 것이기에 자연히 그의 도피란 이름과 맞닿은 생에서나 있었던 일이다. 지켜보는 자는 그의 모든 도피를 방관했으나 한 번, 생에서 마저 도망치는 순간 손을 들었다. 여의 도피는 여에게서 떠났으며 그는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공간에서 제 자신을 마주했다. 그 순간부터 도망이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조차 옅어지던 날, 그는 다른 이의 생을 맺는 사자가 되었다. 여는 높낮이 없는 말투를 쓰던 인사담당관을 기억한다. 


"퇴직할 때 반납하십시오."


 절대자로서의 배려였다. 내려보낼 때 챙기지 못했던가 싶어 권능을 조금 떼 쥐여주던 게 시스템을 갖춰 그에게까지 닿았더란다. 친히 허락한 권능이건만 단 한 번을 철회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이미 도피를 받아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도피는 무엇인가?



 신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기원이 닿아 존재를 뛰어넘은 존재다. 인간이었던 시절을 뚜렷이 기억하지만, 그의 기억이 지금 이 순간의 김 신을 인간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인간의 활동을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그의 죄는 삶에 대한 도피가 아니기에 사자였던 적도 없다. 따지고 따지면 업이 끝난 지금의 그는 인간의 소원을 매개로한 신이었다. 다르고 높은 존재로서 땅에 내린 무언가일 것이고, 사자 보다야 높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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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