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3. 1. 00:10


 4부작. 이어짐.


 김 신은 인간의 거죽을 쓰고 있어도 그 근본이 불이고 물인 존재라 인간의 입장에선 쉬울래야 쉬울 수가 없었다. 인간의 세상에 계실 뿐 굽어 살피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런 분을 모시는 집안이란다. 이미 떠난 이가 덕화를 곁에 두고 늘 하던 이야기다.

"김 비서님."

 그래도 신은 저를 수행하는 인간에게 퍽 살가웠다. 부와 권위를 주었고 구태여 걷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대대로 모셔온 유가는 그와 함께 밖에 내보일 수 없는 과제도 세습했다.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달라도 너무 다른 신의 단위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온전히 인간의 영역이라 신에게 이야기해도 한계가 명확했다.

"네, 덕화군."

 신의 감정은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이 요동칠때면 주변이 함께 뒤집히는데 이는 신이 쌓아온 세월로도 막을 수 없었다. 작은 변화에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큰 변화엔 산천초목이 요동쳤다. 마음 먹기에 따라 싹이 틀 춘삼월에도 낙엽이 진다. 기나긴 생에서 신부를 만난 시절에는 때아닌 꽃나무 축제도 여러번이었다.

"갑자기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덕화의 말에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던 이가 잠시 손을 멈췄다. 인간에게 신의 변덕은 때때로 배려였다. 유씨 집안 사람이 아닌 그도 온 세상을 바꿔놓는 신의 능력에 기대면 나름대로 그날의 신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모처럼 말끔한 하늘, 자던 이도 깨울 햇빛 너머에 먹구름 잔뜩 낀 곳이 있었다. 그 사이, 벼락이 한 줄 지나간다.
 
"글쎄요. 삼촌 분 무슨 일 있으셨나요?"

 덕화는 집히는 게 없어 깍두기 한 점을 마저 씹어 넘기다 며칠 전 아침을 떠올렸다.

"연근이요. 일부러 싱크대까지 뒤집어 놓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지? 끝방 삼촌이 뭐라고 했나?"

 도깨비의 이름값을 생각해보면 김샐법한 화풀이다. 유가와 함께한지 수백 년, 언젠가의 김신은 가신의 고뇌를 가엽게 여겼다. 신은 그들이 고뇌를 해결할 수는 없어도 감당할 수는 있도록 제 스스로 조금 하찮아지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 대가 덕화까지 내려오면 그의 변덕이란 제 성의가 담긴 연근 조림을 허락없이 버리면 심술을 부려대 제가 화난 걸 알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선에서 그쳤다.

"저런."

 그는 머리를 벅벅 긁는 덕화를 바라봤다.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인간이 못하는 건 다 할 수 있다더니 연근 조림만 건드렸다 하면 참사가 난다고 한참 전부터 덕화가 곡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굳이 도깨비 티를 낸다니까. 왜 이런대요, 한참 살았으면서."

 그는 한때 당연했을 일들에 혀를 차는 덕화를 바라보며 또 자랐구나 실감했다. 끝이 한 뼘 가까워 진듯도 했다.

"배려죠."
"배려요?"
"멀리 보시는 분이니까요. 덕화 군이 떠난 뒤도 보실거구요, 떠나기 직전도 보시겠네요."

 이야기에 세상이 순간 공백이었다. 덕화를 위해 그는 모른척 수저를 들었다.



 신은 문을 열었다. 제 방에서 끝방까지 한 순간이었다.

"바쁘냐?"
"거의 다 했는데, 왜."

  마침 여는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태연히 손을 풀며 시선을 맞췄다. 망자를 직접 마주하는 순간은 아니었지만 코트만 걸려있을 뿐 베스트까지 제대로 갖춰입은 상태였다. 신은 그런 여의 모습에 오히려 더 배알이 뒤틀렸다.

"거실에 두고갔더라."

 그는 여의 책상 위에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평소 망자를 관리할 때 쓰던 봉투의 두 배는 긴 봉투였다. 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퇴근하자 마자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드라마를 보다가 깜빡 졸았는데, 신이 깨우기에 비몽사몽 침대로 몸만 움직여 한 숨 푹 자고 일어나 방정리를 하는 사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 어……."

 봉투 안 내용물만 아니면 고마워 하고 끝날 일인데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내용이지만, 신이 보기에 그 봉투 안에는 여의 상태를 미루어봤을 때 볼 일 없어야 할 단어가 너무 많았다. 마침 툭, 신의 손을 떠나며 봉투 밖으로 내용물이 샜다. 정기 검진 관련 알림. 문자는 덤덤하게 여를 두드렸다. 신은 온 몸에 불을 두르고 있었다. 자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한동안 날이 좋아 뽀송히 말랐던 대지가 그새 습기를 머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줄기를 삼켰다.

"말 좀 해봐."

 여가 이 집을 골랐던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홀로 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제일 컸다. 인간의 눈에 별날 일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어야 제 한 몸 누이고 쉴 수 있는 처지였다. 확실히 하기 위해 계약서까지 썼건만, 덕화도 모르게 그의 뒤에 있던 자의 질문에 사자의 치밀함은 의미를 잃었다.

"별 거 아냐."

 결과적으로는 비를 피해 땅을 파다 수맥을 건드린 꼴이었다. 제 죄가 많아 생긴 일이라 생각하며 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신중하게 한 발씩 딛으면 못 갈 곳이 없다. 한참 전에 꼬였던 신과의 관계도 그렇게 풀어나갔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것이다.

"별 게 아니라고? 넌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지금?"

 첫 걸음부터 난항이다. 시퍼런 불덩어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여는 살짝 몸을 젖혔다. 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백 년 단위로 꾸준히 받아."
"저승사자가 무슨 정기 검진을 받아?"
"불 좀 끄고 말해."

 그는 시선 한 번 안 돌리고 불덩이가 붙은 손을 대충 휘저었다. 전등이 꺼졌다.

"그 불 말고!"

 여의 목소리가 천둥 한 번에 자취를 감췄다. 여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눈 앞은 진노한 김신이, 등 뒤에는 낮같지 않은 어둠이 퇴로를 막았다. 세상은 김신의 시선에 흔들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가 어디론가 떠나기라도 하는 것 처럼 굴었다.

"말 해."

 이럴때마다 신은 제 앞에 선 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잊은 양 굴었다. 의지 한 조각이면 제 곁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질 수 있는 이에게 인간의 행동을 강요했다. 하지만 손바닥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기 마련이라, 똑같이 굴어 그대로 굳는 여에게는 늘 잘 먹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제 방에서 봉투를 눈앞에 두고 태울까 한참을 고민했었다. 발신인이 빈 봉투였다. 태워도 하루면 돌아올 봉투였다. 고민은 여가 잠에서 깨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착각이라도 하고 싶었고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었다. 그는 제 의지에 충실한 도깨비였다. 그래서, 못본 척 거실에 다시 두고 나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여에게 속는 건 예전부터 익숙했으니 한 번만 더 속아주자고 다짐하면서. 
 그런데 목소리가 들렸다.

 잊지 않았으면

 그의 목소리중 제일 진실된 목소리가 들렸다. 제 손으로 사실을 볼 바에야 변명을 듣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을 찔렀다. 그 어느것 하나 두고갈 생각이 없다는 여에게 거짓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일방적으로 듣는 처지면서도 이미 듣고 만 신은 듣기 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었다. 그 사실에 천불이 나 불을 몰고 문을 넘었다.

"……."

 그러나 여는 그런 신의 심중을 아직 알 수 없었으므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신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하나 생각하느라 바빴다. 시선이 스치는 동안 집밖은 빗방울이 메우고 방은 불이 메웠다. 신의 불은 제 몸을 태워 여의 형체를 밝혔다. 말하기 전까진 벗어날 수 없을거란 걸 드러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여는 신의 형체를 번갯줄기가 지나갈 때가 아니면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설명해.

 그 와중에 신이 음성을 쏘았다. 여는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죗값일까?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몰랐고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떤 면에서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그에게 있어서 도깨비는 신이 유일하다. 하지만 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여가 아니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차사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선배, 동기, 후배, 당장 집히는 선택지만 합쳐도 작은 나라가 하나 나온다. 대처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요령을 피울 수도 없다.

"사내복지야. 일 안 터지면 버틸 만 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는 사실만 말했다. 형식상 하는 건데 왜 받는지도 잘 모른다. 큰 의미를 두는 차사도 없다. 사고가 나도 뒷처리가 번거로울 뿐이라는 걸 잘 알지 않느냐…….

"그걸 어떻게 믿어."

 하지만 신은 그런 여를 알면서도 증거를 내 놓으라 닥달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제 3자의 사실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저승 발 서류는 혼으로 읽는 것이라 맨 앞장 한 문단만 읽어도 진실됨을 알 수 있다.

"보고 온 거 아니었어?"
"안 봤어."

 그가 원하는 건 여의 대답이었다. 여는 늦게나마 알아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책상에 흩어진 서류더미를 잘 갈무리해 이리저리 훑다가 한 장을 꺼내 신에게 건넸다. 신은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럼, 봐."

 요구한 건 저 자신이면서도 지레 겁을 먹었다. 겉으로나마 상처입지 않는다는 건 곁에 있었고 있으며 있을 인간 중 그 누구도 신에게 줄 수 없는 가치였다. 언젠가 떠날지언정 곁에 있는 동안에는 아파하지 않을까 걱정할 일 없는 이는 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었다. 저 종이 한 장은 그런 신에게서 여를 송두리째 뺏어갈 지도 몰랐다.

"봐도 돼."

 그런 그에게 여는 재차 서류를 건넸다. 신은 저도 모르게 불을 꺼트렸다. 공간을 메웠던 불빛이 사그라들어 순간 어둠이었다. 여는 몇 걸음 걸어가 스위치를 눌렀다. 팟. 손길 한 번에 도깨비 터에 빛이 내렸다. 인간이 선물한 빛에 기대, 그는 비로소 신을 볼 수 있었다. 종이 한 장 건네받았을 뿐인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짧다면 짧을 내용을 되짚었다. 이승에 장소를 지정해둘테니 인사팀에서 연락오면 방문할 것. 요란하게 울리던 천지가 고요해졌다.

"……."

 신은 방금전까지 몰아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무탈한 게 고마워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뭐야."
"날이 좋아 집에만 있기 적적하여."

 때아닌 장대비였다. 전국적으로 맑을 예정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던 아침 뉴스 볼 낯이 없다. 여는 제 관할이 도깨비가 아니라는 점에 또 한 번 감사했다.

"받아."

 그러거나 말거나 신은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사탕 하나가 더 커다란 신의 손에서 앙증맞게 누워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난 어린애야?"
"부담가질 필요 없다. 내 따로 챙긴 것이 아니니 사양하지 말고."

여는 주먹 쥔 손을 들어 검지만 편 뒤 제 머리 주변에서 검지를 빙빙 돌렸다. 신은 허허 웃기만 했다. 가져가기 전까지는 손을 그대로 둘 기세라, 여는 눈을 질끈 감고 사탕만 받아다가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러자 마자 신은 소파에 걸쳐둔 코트를 들었다.

"너 진짜 가게?"

 얼굴만 보면 보살이 따로 없었다. 여는 오히려 그런 모습에 슬슬 눈길을 피했다.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날 받아둔 거라면서요. 덕화의 질문에 가는 데 순서 없다는 대답을 한 것은 저인데, 뜬금없이 생각나 덜컥 불안해졌다.

"그래 그래. 내 산보 나가는 김에 가는 것이니 부담가지지 말거라."
"도깨비도 검진 되냐고 물어봐줄까. 한 번 정도는 검사비 내줄 의향도 있어."

 여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럴 필요 없다."
"부담 가지지 말고."
"아니래도."
"아니면 날씨가 왜 이래?"

 여는 지금이라도 연락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날씨가 뒤집힌 것 보다 이런 날씨로 뒤집어 놓고 날이 좋다고 하는 신이 더 이상했다. 꾸르릉. 저번만큼 심하지는 않아도 꿀꿀하긴 매한가지다. 어쩐지 이번 주에 명부가 몰려 있더라니 신도 거기에 기여를 한 것일까.

"내 역작이 생을 등졌다기에 그를 애도하던 참이다."
"뭐."
"연근 조림."
"먹고간 줄 알았는데."

 말만 그렇다 뿐이지 안 먹을 건 신도 여도 덕화도 알았다.

"지레 찔려서 말하더구나."

 삼촌, 미안! 진짜 미안! 내가 그거 정말 먹으려고 했는데 진짜진짜 그건 안 되겠어서 그랬어요.
 안 먹고 버렸다고?
 ……삼촌?

 안 봐도 본 듯 했다. 여는 우산을 펼쳤다.



 신은 사탕 바구니 하나를 통째로 제 주머니에 털어 넣고 따라가서는 로비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에게 쥐여준 하나 말고는 자각하지 못하는 새 하나 둘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신은 벌떡 일어났다. 주머니 속에서 놀란 사탕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내가 본 것만 다섯 개 짼데."
"생전 처음이라 떨리기 그지없구나. 어디, 아프고 그런 건."
"있겠어. 인간의 생이 없는데."

 웬간한 재해로는 기스도 안 나는 몸이다. 둘 다 그랬다.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받자 신의 긴장이 풀려간다.

"이빨 안 썩냐."
"안 썩지. 인간의 생이 아닌데."

 그러네. 여는 사탕을 꺼내 껍질을 벗기고 입에 물었다. 상앗빛 땅콩향이 번졌다. 몇 백년 묵은 이가 홀로 고심해 제일 익숙할 맛으로 고르고 고른 결과물이었다. 괜찮네. 무심코 신에게 소리를 흘리며, 그는 느긋하게 걸어가 엘레베이터를 잡았다.

"바로 안 가게?"
"날 좋다며."

 신은 더 말하지 않았다. 둘은 천천히 건물을 나섰다.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듯 맑기만 했다. 그가 여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 순간, 순식간에 빗방울이 사라진 덕분이다. 덕분에 우산이 갈 곳을 잃었다.

"좋네."

 정말 그랬는지 여는 제 사탕을 입 안에서 굴렸다. 다라락. 이빨을 긁다가 달각. 사이에 자리했다가도 도로록. 혀를 스쳤다. 인간이었다면 들을 일 없을 소리, 보일리 없는 장면들이 신을 옭아맸다. 아.

"또 먹게?"
"어. 먹는 거 보니까 당기네."

 신은 막무가내로 사탕을 하나 더 까 입에 넣었다. 둥근 사탕은 제 입 속에서도 똑같이 달각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 밖으로 나왔다 사라지는 여의 사탕에, 혹은 사탕의 주인에게 눈독을 들이는 제 자신을 발견했다. 얄궃게도 이럴때마다 그의 심정은 새어나오지도 않아서 불쑥 다가오는 이를 피하지도 못할 만큼 저를 부추기기만 했다.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신은 눈을 꾹 눌렀다 뗐다. 세상은 여전히 맑았다. 그 한 가운데엔 여가 서 있었다. 이름을 휘감아 입고 입 안에는 사탕을, 사랑을, 사탕을, 아, 내가 왜 이러지. 애증 애정, 두 획 차이더니 사탕 사랑, 몇 획 차이인지 몰라 헤메이나. 아니면 변덕을 만성 질환으로 달고 사는 도깨비 생, 드디어 변덕 한 번 더 부릴 작정인지.

"그냥 하는 소린데."

 사랑은 전쟁이다. <전쟁과 사랑>의 캐치프라이즈다. 신부도 여도 없이 홀로 살던 시절, 신은 TV를 보며 제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늘 이길 거라고 단정지었다. 인간일 적 그는 퇴로 없는 전장에 수없이 섰고 끝의 끝까지 살아남았다. 인간이 아니고 나서는 퇴로 없는 전장이 없었다. 그 홀로, 없는 퇴로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도깨비에게 뒤가 없는 전장을 선사한 건 이미 떠난 그의 신부가 유일했다. 셈하면, 이번에 선 곳은 도깨비 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번째로 맞는 퇴로 막힌 전쟁터다.

"내가 널 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좀, 힘들어서. 그래서."

 신은 검을 들었다. 누군가 하사한 검이 아닌 제 스스로 갈고 닦은 검이었다. 이 검을 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제 모든 세월을 기억하는 존재가 그렇게 믿었으므로 이는 기만이었으나 그는 제 감정을 억누르느니 제 기억을 버리겠다고, 방금 그렇게 선언한 참이다.

"그래서 그냥 해본 소리야."

 한 뼘도 걷지 않았는데 하루종일 달린 것 처럼 입이 달았다. 신은 하루종일 집어삼킨 사탕 탓을 하며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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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