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3. 9. 01:17

 4부작. 다가감.




 그냥 하는 소린데, 거기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신은 제 머리칼을 마구 털었다. 자각한 지는 좀 되었고 숨긴 지도 몇 달은 지난 감정이지만 막상 내보이겠다 마음 먹고 실제로 내보였건만 후련함이나 설렘 따위의 구원은 없고 그저 고통 뿐이었다. 그는 교만했던 제 자신을 인정했다. 천 년이 다 되어가는 감정을 고작 몇 마디로 욱여넣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큰 착각이었다.


"그냥 할 소리……."


 그가 심중에서 뽑아낸 검은 세월이 무게를 더해 모르는 새 그조차 감당하지 못할만큼 무거웠다. 숨이 턱, 막히고 무릎이 턱턱, 꿇렸다. 언젠가의 인간 김 신 처럼. 이젠 벌도 끝나 끝없는 삶, 이어갈 일만 남은 도깨비인데도 지금의 신은 그때 그 인간보다도 더 나약한 무언가였다. 


"아니잖아."


 그 와중에 여의 말 한 마디가 깨달음을 불러 고통과 손을 잡고 신에게 다가온다. 내 검인 줄 알았는데 네가 내린 검이었나보다. 그의 두 번째이자 첫 번째 사랑은 그렇게 신을 무저갱에 세웠다. 이제 신은 멈출 수 없었다. 검의 주인이 그렇게 명했으므로, 그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처럼 명에 응할 일만 남았다.


"오늘부터는 좀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여의 신념을 무시하지 못했을 때 이렇게 될 걸 알았다. 알아서 숨겼다. 차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사정상, 언젠가는 인과의 흐름에 다시 몸을 맡길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침 그가 신에게 흘리는 이야기 조차 망각에 대한 이야기뿐 감정을 묻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 한 적이 없다. 너는 또 모르는 거구나. 선이 떠나고도 계절이 몇 번은 바뀐 뒤, 신에게 제 속사정을 토로하던 그의 모습에 차라리 감사했다. 늘 이랬어. 활을 잡아도, 붓을 잡아도, 써니 씨에 관한 일도, 너에 관한 일도. 한두 번이면 몰라도 매 번 틀리는 건 상습적인 거겠지. 매번 틀린 답만 내는게 네 운명이라면 언젠가처럼 틀린 줄도 모르고 살다 가기를. 신은 매 번 틀리는 사내가 이번에도 오답을 적었으려니, 힘든 나날을 버텨 나갔다.


"날이 좋아 그런가."


 그러나 늘 오답을 내는 이도 정답을 내는 날이 한 번은 온다. 감정은 껴묻거리가 아니기에 묻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 끝은 망각으로만 알 수 있다. 사랑했었어. 되뇌이려면, 잊어야 한다. 그랬던 적도 있었는데. 넘겨내려면, 단 한 번이라도 잊어야 한다.


 잊지 않기를.


 이래서 일단 살고 봐야 했던 거다. 그때 그 왕 여는.




 신은 그 순간부터 모든 행동에 여를 담았다. 제 이런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 지 듣지는 못했지만 돌아볼 곳도 돌아갈 곳도 없으니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던 두려움마저 사라져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그의 집터는 하루종일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도깨비."

"그래."


 그러면서도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여를 이해했다. 그의 온 세상은 여를 향해 손짓했지만 그런 그의 세상을 막 접한 여의 세상이 어떤 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그는 여가 그날 당장 집을 떠나겠다고 해도 막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가야 겠지."

"기간 남았다며."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 마저 지금의 신에게는 상이었다. 신은 사탕 껍질을 버리며 이어 대답했다.


"있고 싶은 곳에 있어."


 당장 짐을 챙기러 끝방에 사라져도 놀라지 않을 준비를 하던 신에게는 선물처럼, 그의 집에 사는 저승사자는 나사 몇 개 빠진듯 한 행동을 일삼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나마 하루를 잘 보냈다. 그러다 밤 열한 시 조금 넘어 드라마가 끝난 뒤 맥주 광고가 나오는 TV 앞에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누구야?"

"김 신."


 전직 무신, 현직 도깨비. 신의 대답은 명확했다. 내가 아는 김 신은 이렇지 않았는데. 하루 사이에 온 세상의 절망을 끌어안은 저승사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 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이 무서웠다. 그리고 신은 그 무서운 정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황급히 제 방으로 도망온 여는 제가 어떤 연유로 떠는지도 모르면서 벌벌 떠며 잠에 들었다. 




 그 때부턴가, 그는 여에게 김 신이면서도 김 신이 아닌, 상장군도 도깨비도 아닌 제 3의 무언가가 되었다. 말끔하게 제 정체를 대답한 신이 억울할 정의였다. 하지만 여는 여대로 혼란스러웠다. 직접 만든 연근 조림이 여전히 끔찍한 맛인 걸 봐선 익히 아는 그 김 신이 맞긴 맞다. 냉장고 한켠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생각해보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갓을 지적했던 그 도깨비도 맞다. 여는 인간의 염원은 밤낮을 가리지 않지만 서브웨이는 밤낮을 가리기 때문에 고안한 궁여지책이라는 설명을 하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야, 저승. 밥 먹자."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 저와 함께 식사를 할 때 제가 이쪽 끝에 앉으면 저는 저쪽 끝에 앉는 걸 보면 김 신이 맞지만, 맞은편의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서로 식기를 날려 이야기하던 도깨비가 차라리 더 익숙했다. 그나마도 여가 집에 든지 얼마 안 됐을 때나 그랬지 나중엔 서로의 접시를 말끔히 비운 뒤가 아니고서야 시선을 맞출 일이랄 게 없었다. 신이나 여나, 유치할 때 한없이 유치해지는 만큼이나 움직임이라곤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비우는 것 뿐이고 소리라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뿐인 고요한 식사를 즐길 줄도 알았다.


"……?"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여는 눈만 들었다 하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여는 지레 놀라 신의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고깃덩이가 반토막 난걸로 봐선 먹긴 먹는 것 같은데, 요즘들어 같이 식사를 할 때면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심심하면 한 번씩 푹 찌르기까지 한다.


 귀엽긴.


 여는 포크를 놓쳤다. 쨍 소리가 도깨비 터 한 구석에서 촐싹댔다. 저거 김 신 맞아? 거죽만 김신이고 속은 악귀가 들어찬 거 아냐? 아니면, 명부라도 더 왔나?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신으로 가득 찼다. 그의 생각이 강해질 수록 신은 여과없이 흘러나오는 여의 심경을 넙죽 받아먹었다. 모르는 새 신의 세상이 유채색이었다.


"왜,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는데."


 여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타 누락자가 악귀로 변하면 서류만 몇 개를 내야 하는데……. 그건 아니겠지.


"그 상스러운 식단만 빼면."


 김 신, 맞나?


"서로 식단에 간섭 안 하기로 합의한 거 아니었어?"

"해본 소리야. 아니지. 아, 해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 는. 무슨!"


 여는 어느새 제 곁에 다가온 그와 고깃조각에 지레 질겁하며 물러섰다. 언제 온 거야. 얘 대체 왜 이래? 신은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여는 제 맞은편의 사내가 간혹 제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신은 신이 나선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를 하나 하나 곱씹었다. 단 맛이 났다.


"좋아서 그래. 좋아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그의 심경을 눈 앞의 고깃덩이 만큼이나 음미하던 신은 문득 궁금했다. 네가 세상에 내보인 첫 번째 정답이 나인 건 무슨 운명일까, 여야. 세 박자 하고도 반 박자가 더 늦은 뒤에야 여는 소리쳤다.


"야!"


 정작 제가 답을 낸지도 모르는 당사자는 신의 말과 태도를 받아치기에 급급했다. 왕 여의 생, 째로 혼란이었으나 이렇게까지 갈피를 못 잡은 적은 없었건만 여는 요즘 제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도 몰랐다. 이런 생을 살아보라고 차사직을 받은 건 아닐텐데, 싶어 조급해지기 까지 했다.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 날 이후 신은 속도를 줄일 생각은 아예 없앤 듯 두어 걸음 씩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쭉. 계속 이럴 건데."


 그러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칼같았다. 오늘도 여는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그의 말 한 마디에 저를 가누지도 못하고 휩쓸리는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김 신에게 아예 말 할 구실을 주지 않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든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할지, 혹시나 알아내기라도 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는 애꿎은 샐러리만 씹었다. 그렇게 하면 제가 모르는 김 신이 제가 아는 김 신으로 돌아오기라도 할 것 처럼.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순간들은 간혹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도깨비 집터는 달라진 게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엔 오히려 신이 곤혹스러워 했을 정도다. 여는 저희 관계가 변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급변할 거라는 걸 눈치채지는 못했을 무렵, 신은 이미 빗장을 열어 한바탕 대홍수였던 것이다.

 한동안 그는 길게 잠들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도깨비가 된 지 이백 여년 쯤 되었을 때 꾸던 꿈이 뒤틀려 펼쳐졌다. 김 신은 인간들의 염원을 생으로 치환한 도깨비가 되자마자 궁에 닿는다. 여기까지는 현실이다. 간발의 차이로 황제의 죽음을 막아서고 손목을 잡아챈다. 여기까지는 칠백 년 전 꿈이다. 매제이자 누이를 죽인 사람의 곁에 서서 저 자가 박 중헌과 다른 것이 뭐냐는 수근거림을 인간의 것이 아닌 감각으로 잡아내면서도 끝끝내 그의 곁을 놓지 않는다. 이 부분이 뒤틀린 부분이다. 무슨 욕망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그는 보는 이도 없는 제 꿈에 공연히 민망해했다.


"너, 그때 나 죽이고 나서 나 돌아가기 전에 죽었잖아. 잘한 것 같다."


 가끔은 면피하기 어려울 수준이라 물이자 불인 그조차 견딜 수 없을 정도라서 말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누군가의 혜안이 빛을 발했던 덕일까 여의 몸이 찬 만큼이나 신의 감정이 뜨거웠던 탓일까.


"무슨 소리야."

"네가 살아있는 네 궁에서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이젠 잘 모르겠더라."


 신은 혀를 움직여 속을 토해 내면서도 혹여 여가 겁을 먹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제 자신에게 잠깐 위화감을 느꼈다. 인간을 걱정하기도 바빠야 할 도깨비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여는 그런 속을 몰랐다.


"네가 날 죽이는 게 나았을 걸."


 그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너도 죽였고 네 고려도 죽였는데, 넌 나만 죽이고 고려는 안 죽였을 거 아냐. 그의 속내가 필터 하나 없이 신을 들이받는다. 그 이야기가 아닌데. 신은 한 걸음 참을까 하다가 제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걸 재차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 할 시간을 안 줬을 것 같단 소리를 하는 건데. 내가 요새 무슨 생각하고 사는 줄 알고?"

"무슨 생각 했는데. 참형? 난도질?"


 영 감을 못 잡는 건 평소의 왕 여인데 그런 그의 모습에 군침을 삼키는 건 평소의 김 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하사받은 검을 용도에 맞게 휘두르는 중이었으므로 여전히 김 신이 맞긴 했다.


"언제적에 하던 상상을 이제와서 해. 시간 아깝게."

"그럼. 뭔데."

"알고 싶어?"


 신은 기다렸다는 듯 생각을 쏘았다. 네 양 팔목을 잡아다가 위로 잡아 올리면서 한 손으로는 네 옷을 찢어 발길 거고, 분노하면서도 겁에 질린 네 모습을 좀 감상하다가 그대로 네 이마부터 발 끝까지 핥아 내리는 상상 했는데. 몸부림 치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막아두고, 혀라도 깨무려 다물릴 네 입은 친히 봉해둘 작정으로. 어떻게 살렸는데 허무하게 보낼 순 없잖아. 헌데 그쯤 되면 내가 내 이성을 건사할 수 있을 지 모르겠구나. 네가 동하기를 기다려 줄 여유도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쪽에서 먼저 네 목덜미를 물며 몰아치…….


 딸꾹.


 여는 제 딸꾹질에 제가 더 놀랐다. 신은 그런 여를 보며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한 뒤 간신히 말했다.


"산통을 그렇게 깨냐."

"하지마."

"왜? 완전 도입부잖아. 안 궁금해? 드라마는 한 장면만 놓쳐도 방방 뛰면서."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어, 어어, 오지마. 오지 말라고! 여는 소파 한 구석으로 밀려나면서도 뒷걸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엉덩방아라도 찔까 염려되었던 신은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갔던 제 상체를 뒤로 빼며 입을 다셨다.


"뭐야."


 저승사자로 산 삼백 년이 헛 세월은 아닌지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듣는다.


"뭐가?"

"방금 그거. 뭐냐고."


 신은 씩 웃었다. 뭐였을 것 같아? 여는 끝방으로 줄행랑 쳤다.




 신은 늘 매번 제게서 도망가는 여를 봐야 했지만 끈기있게 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애정사를 따져가며 염원하지는 않았으므로, 오늘도 그는 냉장고에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하나 꺼내 제 주머니에 넣곤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는 그런 신을 뒤로 한 채 얼마전에 몸에 꼭 맞는 사이즈로 손에 들어온 자켓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옷이 주인을 찾은 양 잘 맞았다. 근데 이거 언제 샀더라.


 아. 저번에.


 또 김 신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김 신이 내가 아는 그 김 신 맞았나? 돌아보는 나날이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이 주가 되면서 여는 김 신이면서도 김 신이 아닌, 상장군도 도깨비도 아닌 제 3의 무언가에 대해 다시 정의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길기도 길고 맞는 명칭도 아니었다. 그도 그건 알았다. 그럼 뭘까. 그 존재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어느새 성큼 다가오는 그는. 집 주인과 같은 용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제게서 시선을 놓지 않는 그는.

 여는 제 몸을 소파에 기댔다. 며칠 전 밤이 떠올랐다. 그날따라 TV는 신이 점령하고 있었다. 여는 소파에 앉아 얌전히 홈쇼핑을 보는 신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때 그 순간에 말을 한 건 김 신인데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되는 건 저라는 사실은 몇 주째 그대로여서 결국 그는 제 숨통을 쥐고 흔들던 누군가를 떠올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는 저도 모르는 새 그에게 툭, 꼭 도깨비처럼 한 마디 던졌던 것이다.


"나만 이런건가?"


 당연하게도 신은 박 중헌이 아니었으므로 여는 그에게서 제 속내를 직접 건네 받을 수 있었다.


"나도 그래. 싱숭생숭하고. 떨리고."


 전혀 그렇지 않은 말투였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려 지금까지 고민 중이었지만. 


"와. 내가 되게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 처럼 막 그런다?"

"뭐야. 언제 왔어."

"뭐긴, 집 주인이지. 방금 왔고."


 두 번 살아도 문신은 못 될 판이다. 신은 소파에 앉은 이의 머릿속이 팽팽 도는 동안 그새 바로 옆에 털썩 앉더니 철썩 달라붙어선 말 보따리를 풀었다. 그 때 그거 몇 달 동안 심사숙고 하고 말 한 거야. 나도 어어엄청 노력하면서 지내고 있는 거라고. 여는 애꿎은 테이블만 얼렸다. 신은 혀를 끌 찼다.


"그만 좀 얼려. 이거 또 깨먹으면 진짜 물어내라고 할 거야."

"……."

"왜 그러는데?"

"모르겠어서. 내가 아는 김 신이나 도깨비는 나한테 연모한다는 말은 안 할 텐데, 자꾸 하니까."


 승낙도 못 하겠고 거절도 못 하겠어. 모르겠어서. 그 말을 하기까지 여는 근 보름이 걸렸다. 무지가 죄가 아니라고 누가 말했던가. 왕 여의 죄는 무지에서 탄생했다. 제게 정을 붙이는 누군가를 볼 때면 덜컥 겁이 났다. 그는 이번에도 제 무지로 다시 한 번 비극이 찾아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신은 거절을 전제로 하지 않은 그의 대답에 차라리 안심했다. 그래도 이젠 모르는 줄은 아네. 일견 감격스러운 부분까지 있었다. 그는 언젠가 곁에서 함께 숨쉴 날을 그리며 부러 가볍게 운을 뗐다.


"그냥 초면이라고 생각해."


 오늘 처음 봤는데 알고보니 집 주인이었고, 네가 아는 거라고는 전직 무신에 현직 도깨비라는 것 뿐인데, 집 주인은 너한테 관심이 아주 많아서 네가 누군지, 무슨 일 하는지, 식성은 어떤지, 사는 곳은 어딘지, 다 알고 있는 거지. 그걸 어떻게 다 아냐고 했더니 한 눈에 반한 건 아니고 볼수록 빠져들어서 하나 둘 알게 됐다고 하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넌 내 이름도 몰라. 그때가 되어서야 물어보는 거야.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김 신입니다."


 신은 제 주군이었던 사내에게 손을 내민다. 와 볼래, 너를 기다리는 내 세상으로. 여는 머뭇거리다 손을 맞잡는다. 그는 이 순간 저를 연모한다는 한 존재를 새로 알게 됐다.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어 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두 존재가 만났다는 것 하나다. 이젠 여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거짓말처럼 말끔해지는 머릿속에 헛웃음을 짓던 그는 신의 세상으로 가는 한 걸음을 뗐다.


"왕 여……. 입니다."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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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