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2. 22. 04:20

포스타입 재개장을 기다리며 이로님께 드립니다.



[깨비사자] 놀러와 마이룸 (to. 이로)




 여의 방은 극도로 단정했다. 기억이 없던 시절에는 마음에 둘 게 없어서 그렇다길래 신경쓰지 않았는데,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된 이후에도 여의 방은 변함없이 말끔했다. 이젠 속이 빈 것도 아닐텐데 왜 그런가 물었더니 이번에는 기억하는 게 너무 많아 다른 곳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생각이라도 하나봐? 낯간지럽게?"

"잊은 적 없어. 한 순간도."

 

 그런 것 같았다. 분위기 풀 겸 살짝 흘린 말에도 이런 무게감을 가지고 돌아오는 마당에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마음 닿는대로 꾸리라 할 밖에. 그 뒤엔 청소할 겸 끝방에 들어갈 때 마다 바뀐 건 없는지 한 바퀴 둘러보는 게 버릇이 됐다. 이전부터 그 무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계절이 바뀔때를 제외하면 항상 같았다.


"퇴근했네."


 그래서 끝방 사는 저승사자에게 인연 한 갈래를 더 묶었다. 한 번 볼거 두 번 보는 사이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어느날엔가 뒤를 돌아 봤더니 한 순간만 못 봐도 안달복달하는 처지가 된 제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엔 신이 진심을 담아 보살피는지 운이 좋았다. 상스러운 갓을 쓰고 죗값을 치르는 주군도 저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방금."


 그 이후로는 우정의 탈을 쓴 은애 같은 건 치웠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가 있으면 저도 모르게 이마를 마주댔다. 숨결 닿을 거리에서 눈을 맞추면 뒷 맛이 그리 달기에 시도 때도 없이 다가갔다. 주군이었다가, 세입자였다가, 연인이 된 여도 만만치 않았다. 빛이 세상에 인사하기 전에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그는 겁도 없이 제 방에 들어온다.


"안 피곤해?"

"그냥. 잠도 안 오고."


 그러고는 능청을 떤다. 몸 상할까 전전긍긍하며 허벅지를 찌르던 나날도 아주 잠깐 있었지만 이제는 곁에서 울다 지쳐 잠든 모습을 보고싶다 속삭일 수도 있었다. 십중팔구 빳빳하게 굳어서 검은 연기와 함께 문 밖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런 그를 따라가면 눈을 굴리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할텐데, 모른척 팔을 벌려 끌어안으면 된다. 그러면 잠자코 몸을 맡길테니 그 뒤로는 문만 열면 일사천리다.


"같이 자."


 온 세상이 행복해지는 순간의 한 단면이다.




 눈을 떴을 때 제 방, 제 품안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손끝이 간질거린다. 끝방에서 홀로 잠들 때 죽은듯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불 속에 깊게 들어가는 건 같지만 어디까지나 제 품에 안겨 잠든다는 전제가 깔린 일이라 그랬다. 제 방에서만큼은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산 것 같고 죽은 것 같다 하니 제 연정은 수취인을 잘 찾아가는 편일 것이다.

 그렇지만 만족할 수가 없다. 그의 이야기가 얽힐때면 저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만다. 요새는 끝방이 그렇게 탐이 났다. 여를 더이상 혼자 두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집 한 번 싹 뜯으면 끝날 일이지만 그래서야 제 손으로 벤 죄인과 다를 것이 없으니 마뜩찮고, 집의 구석구석을 살펴야 하는 집주인의 덕목을 핑계로 대고 들어간다면 못할 건 없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고, 저는 더 지속적으로 그러고 싶고.


"방 합치자고?"

"그것도 좋고."


 그 이상이면 더 좋고. 슬쩍 쏜 마음이 닿았는지 마주앉은 이의 목덜미가 붉었다. 예전이라면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을텐데, 이제는 제가 더 안달이 난다. 그런 자신을 알면 저도 모르게 웃을 연인을 알지만 이미 그와 함께면 온 세상이 꽃밭이라 도리가 없다. 혹시 허락해줄까 싶어 희망을 가지고 두근두근, 뛰는 심장도 진정시키며 그를 바라보는데, 시선이 따스한게 이상하게 예감도 좋고 그런데.


"싫은데."

"들여놓을 거 있으면 미리 말, 뭐?"


 투정이 비죽, 여과없이 뛰쳐나간다. 나 바쁜 도깨비야. 넌 바쁜 저승사자고. 현대인이라면 모름지기 없는 시간 쪼개 살아야지. 우리가 인간은 아니라지만 인간처럼 살아야 하니, 방 합치면 방까지 가는 시간도 아끼고, 그러면 한 번이라도 더 볼 수도 있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안 될 것도 없고.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 그럼 침구부터 바꿔둘까?"

"싫어."

"왜?!"


 그냥. 그는 약만 실컷 오를 소릴 쏘았다. 그러나 제 연인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제게 다가와 머리를 부빌 줄 아는 이였으므로, 저는 그런 그에게 엄히 대하지 못하고 소파 위에서 울릴 생각이나 하고 마는 것이다. 간지러. 잠깐만. 신. 김 신. 야!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가 제 입맛을 돋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부러 저를 부추겨 제 욕심을 깡그리 날릴 셈인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홀랑 넘어가는 건 그 모든걸 부추기는 게 당신이라서 그런 걸 아는 건지 뭔지.


"아, 잠깐만. 진짜 간지러워."


 눈 접는 것도 사랑스러울 건 뭔지, 어떻게든 저를 부추기는 건 누가 가르쳐 주기라도 한 건지.




 너는, 너는 진짜!


 삿대질이 날아 들어도 마냥 좋았다. 작정하고 쾌감에 절인 덕이다. 나도 좋고 저도 좋아 산천초목이 요동치는데 도의가 다 뭐고 충의는 다 뭐야. 네 이놈! 무신 김 신이 소리친다. 비켜! 안 보이잖아! 도깨비 김 신이 받아친다.


"못났어."


 그러거나 말거나 연인은 펑펑 울며 저를 받아내느라 힘 한 줌 안 남은 티만 팍팍 났다. 등골을 꾹꾹 눌러도 움찔대며 입만 내밀고 고개를 돌린다. 좋아, 더 해줘, 분명 저 입에서 나왔던 소리였는데 태세 한 번 순식간에 바뀌는 구나. 요즘의 여는 그가 한참 즐겨본다던 아침 드라마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너도."


 그런 그가 끝방을 지켜낸 건 놀랄 일도 아니다. 그의 승부욕은 그가 제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시절부터 알았다. 그런 면에 있어선 맹해보이는 얼굴 치고는 특출난 감이 있다. 지금 와선 그게 또 마냥 좋기만 하고.


"네가 더 못났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온 몸을 던져 막을 줄은 몰랐다. 끝방에 대단한 걸 숨겨둔 것도 아니고 들어갈 때 막아서지도 않으면서 같은 방 쓰자는 건 그렇게 칼같다. 몇번을 쪽쪽대며 물어도 대답 대신 제 손가락을 빨아올렸다. 비슷한 키가 무색하게 일부러 올려다보면서.


"내가 뭘."


 그렇다고 명백한 어필을 모른척 하기엔 순간이 아까운 처지다. 공간의 제약 없이 사라졌다 나타나면 연인의 곁이면서도 그 자그마한 순간이 아쉬워 방까지 합치자 하는 판이다. 죽지는 않아도 떠날 수는 있는 연인인데다, 끝이 있긴 한데 명확한 건 또 아니라 되레 불안한 와중에 할래? 다가오는데 그걸 거절할 여력은 제게 없다.


"이유도 안 알려주는 네가 더 못났지."


 힘 빠진 여의 손이 머리칼을 슥슥. 제 마음도 슥슥. 아. 벌써부터 풀리면 안 되는데. 아. 이거 저 자의 말버릇인데. 그냥 끝방이건 찻집이건 있고 싶은 곳에 있도록 둘까. 내가 가면 되니까. 인간 김 신이라면 기함할 소리가 도깨비 김 신 머리에선 잘도 튀어나온다.


"말했잖아."

"그게 말 한 거야? 비밀. 이게?"

"별 거 아니야."

"이유가 없다고는 안 하네."

"……."


 밝힐 것이다. 도깨비 터에서 도깨비에게 비밀 안 밝히고 살 수 있나 어디 한 번 보자. 곧, 여는 저만큼이나 승부욕이 강해 비등하게 맞섰던 자가 지금 제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머잖아 끝방서 하루를 함께 맞고 맺는 저를 보게 될 것이다!




 호기로웠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 끝방에 꼬드기러 가려고 방 문을 열었더니, 여가 밤에 선약이 있다며 제 방으로 쪼르르 걸어온 탓이다. 홀린듯이 연인을 들이고 제 침대에 뉘여 재운 뒤에야 그걸 알았다.


 끝방에서 같이 잤어야 했는데!


 그놈의 명계가 문제다. 그 작자들은 제 앞길을 막아설 때 마다 감형이라도 받는게 아닐까. 인간의 거죽을 쓴 도깨비가 되면서까지 명 받들어 역적 놀음이라도 하며 원을 풀 요량으로 궁에 갔더니 여는 이미 없었다. 명계로 떠났던 것이다. 제 연인이 된 그에게 들쑥날쑥한 업무 시간을 배정하는 곳은? 여전히 명계다. 사자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직책이지만, 결국 본적은? 명계다. 어디 좀 같이 가자고 부추기면? 저녁에 선약이야. 낮에 자야 해. 시간만 낮이고 자는 이에게는 낮잠이 낮잠이 아닐 때가 더 많았다. 


"몇 시야?"

"더 자. 알람 안 울렸어."


 도깨비는 결국 인간의 소원이 빚어낸 존재라 이승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저승에 묶인 연인의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데려가면 뺏겨야 했다. 늘. 그리고 오늘 이 순간에도 또 여를 뺏어갔다. 수면이 어그러지니 식사도 어그러진다. 만든 곳에선 아침에 마시라고 냈을 하루야채조차 아침 저녁 가리는 꼴을 못 봤다. 일이 일이라지만 평탄하게 살기는 다 틀려 먹었다.

 그렇지만, 그런 이와 살면서도 삶이 사무치는 순간이 온다. 


"깨워……."


 제가 어느 공간이건 여의 흔적이 보이면 전부 탐하는 것 처럼, 그가 어느 공간이건 제 흔적이 있으면 마음을 놓아버리는 걸 새삼 깨닫는 그런 때가 있다. 그러지 못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그게 그리 미어져선, 저는 어느날엔가 여가 그랬듯 슥슥, 등을 쓸며 도닥이고 만다. 

 그렇게 깜빡 잠들었다가 제 숨결에 막 눈이 뜨이는 순간의 여가 좋았다. 어디론가 떠날 것만 같은 이가 제게 돌아오는 순간은 뻥 뚫린 가슴 한 편을 뻐근하게 굳혔다. 언젠가와는 다르게 그가 눈을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 만으로도 제 생은 의미를 되찾았다. 함께 삶을 다듬어가는 동반자가 여라 울듯이 행복했다. 그런데.


 그렇지. 여 였지.


 번쩍, 벼락이라도 맞은 듯 했다. 하고 싶었던 것 중 직접 해낸 게 몇 개나 있었을까 돌이켰다. 머릿속이 연인의 이름마냥 새까맸다. 그런 이에게서 공간을 함께하네 마네 하고 있었던 걸까. 애시당초 황제가 되고 싶어 된 이도 아니었는데 누군가 억지로 관을 씌웠던 과거가 스친다. 실은 나조차 그의 공간을 뺏고 있었던 건가 혼란이 왔다.


"김 신."


 그맘때 쯤이었다. 그가 평소와 다르게 이름을 채워 부른 건. 유난 떨기엔 잠결인 것 같아 모른 척 양 볼에,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깼네. 응. 서로가 한 말이라는 것 말고는 의미 없는 이야기가 한두 마디 흘러간다. 그동안 저는 시간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알람이 울릴 것 같아 기능을 끄며 시선을 돌렸다. 


"물 마실래?"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휘적대는 연인이 보였다. 온 몸짓에 잠이 묻어났다. 그 모습마저 저를 사로잡아 온 몸을 탐해볼까 싶던 참에, 제 연인이 대뜸


"울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울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늘 식어 있는 그의 몸에 모처럼 온기가 앉아 있는 드문 순간이었으므로, 그의 목덜미 한 번 탐하려고 요리조리 눈치를 보던 중이었다.


"아니, 안 우는데."


 눈길을 눈치챘는지 니트에 묻혀 절반 쯤 보이는 손으로 목을 감싸길래, 저는 그의 손 끝에 한 번 혀를 굴리고 무슨 이야기냐 다시 물었다. 그는 절반 쯤 감긴 눈을 그대로 두곤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손 끝으로 자기 자신의 귀엣가를 가리켰다.


 톡, 토독.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울어? 대답하지 못했다. 언젠가의 김 신이 창가 너머에서 울고 있었다.




"매번 혼자 잤을 거 아냐, 그 때도."


 이번엔 내가 좀,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서 합치자고 했어. 그 몇 마디 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듣는 이 하나 없는데도 혹시나, 정말 혹시나 누군가 들을까 신경쓰여서 둘만 알기로 몇 번을 약속한 뒤에야 겨우 말할 용기가 났다. 그렇게 까지 했는데도 막상 이야기하자니 얼굴이, 목이, 귓바퀴가 후끈거렸다.


"좀 그런가."


 그래도 말해야 했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영 나오질 않아서 그와중에 미뤘다. 옷만 다 개고. 주름 생기면 드라이 클리닝 맡겨야 하니까. 청소좀 하고. 먼지 쌓이면 귀찮으니까. 좀 씻고. 덥다. 토마토가 없네. 같이 장 보러 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배 안 고파?

 그렇게 고민하고 용기내서 이야기했건만 듣는 이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으느."


 치커리를 씹으려다 혀라도 씹은 모양이었다. 눈물 찔금, 고이자 그새 세상 철렁, 내려앉는다. 지켜보는 것도 이리 힘든데 미처 보지 못한 순간에 다치면 어떨지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세월을 헛으로 보낸 건 아니라 어떤 일이 터져도 그린듯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괜찮아?"


 여는 미리 떠둔 물을 한 컵 마셨다. 꿀꺽. 식도를 타고 숨막힌 분위기가 한 번 쓸려 내려간다. 제 입장을 그도 받아 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저도 포크를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구웠는지도 까마득한 등심 한 점이 입에 들어갔다. 무슨 정신으로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나도 할 말 있어."


 구도는 여가 제게 말을 걸고 나서야 깨졌다. 족히 십여 분은 걸렸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당분간 조금 거리를 두자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꾹 참고 받아들일 정도로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매번 네가 먼저 왔잖아. 그 때도."


 이어 목소리가 흘러든다.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어서. 그래서 싫다고 했어. 


"괜찮아?"


 고기를 씹었는데 혀를 씹은 걸로 착각하는 건가, 그냥 혀를 씹은건가, 혀를 씹었는데 고기를 씹은 줄 알고 있다가 혀 씹은 걸 알게 된 건가. 소스를 너무 많이 썼나. 소스를 쓰긴 했었나.


"……물 마실래?"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목, 귀, 볼, 손 끝, 누가 먼저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열이 붙는다. 제 터 주변, 미물 하나도 제 소리를 내지 못할 만큼 단단히 단속한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해서 다행이었다. 지금 막 여섯 번 째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시도했지만 얼마 안 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참담했지만 연인에게 정수리만 보여줄 수는 없어 간신히 고개를 들어 보면, 맞은편의 연인도 저와 똑같은 처지였다. 시선이 슬쩍 겹치자 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모르는 이가 보면 맞인사를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상태로 식사를 계속하다간 둘 다 소화제를 찾을 판이라 깔끔히 포기하고 한 손엔 달걀, 한 손엔 맥주를 들었다. 술 기운을 빌 수 있으면 좋고, 핑계삼을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기도 했다말 한 번 마음 한 번, 서로가 서로를 툭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냥 나는, 그게 걸렸나봐. 못 간 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푼 건 여 였다. 거죽이라도 돌아오라 기별하지 못할 거라면, 그냥 내가 직접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생각도 못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몇 모금이나 마셨는데 벌써부터 취기가 오르는 것인지 감이 안 잡혀 캔을 흔들었다. 절반은 족히 넘었다. 울화통이 터졌다.


"야, 그건 나부터 말리지."


 내가 보러 간게 장군이야? 궁에 있는 황제 폐하지? 어처구니가 없어 가다듬을 틈도 없이 툭 던진다. 반응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려던 찰나, 제 연인은 제 고민을 깔끔히 날린다.


"어차피 그대로 계속 있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가관이다. 저놈의 자기 목숨 하찮게 여기기 병은 고친 것 같으면 도지고 해결했나 싶으면 튀어나오지.


"자살 다음엔 개죽음이냐?"


 해도 너무했다. 기억이 없던 시절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를 제 멋대로 하는 건 이치에 안 맞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세상을 잠시 멈춰 세우고 그를 붙잡았다. 언제까지 불안하게 할 지 종잡을 수가 없다. 차라리 무슨 짓을 해도 제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안 죽어."


 ……무슨 짓을 해도 품으로?


"왜, 방이라도 합치려고?"

"아니. 내 방에 와. 매일."


 사지로 내모느니 내 방에 부르고 말지. 우린 둘 다 바쁜 현대인이니 네 한, 내 한, 한꺼번에 해치우면 좋지. 서로만 보기도 바쁜 처지에 인간 김 신에게 뺏길 시간도 줄일 수 있지. 좋네. 전할 일 없는 마음은 단단히 봉해둔다. 저 말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자러 갈게. 매일."


 시선이 얽혔다. 맑았다. 진작좀 이랬으면 좀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오늘 부터."

"오늘 부터?"

"오늘 부터."


 신뢰가, 혹은 사랑이 얽혔다. 앞으로도 좀 이랬으면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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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