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4. 30. 14:10



 오메가버스 중의 연작. 취향이 아니라면 지나가세요.



"결혼 전제로 연애하자."


 샐러리에 블루베리를 얹어 먹느라 정신이 없던 여에게 다가온 첫 마디였다. 방은 같았다가 갈리는 걸 반복했지만, 건물은 학년에 상관없이 늘 같은 건물이던 교내 기숙사에서 10 년, 같은 학교 다른 학과로 대입을 마친 인연으로 같은 하숙집에서 5 년. 도합 15 년을 같은 곳에서 살다가 연락이 끊겼던 지인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라, 여는 잠시 제 감각을 의심하며 그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봤다. 함께한 세월동안 그는 늘 눈으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여에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짙고 깊었다. 진심이었다.


"헛소리도 아니고, 장난도 아냐."

"그런 것 같네."


 함께한 15 년은 여를 배신하지 않았다. 여는 이 사실을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여는 그와의 재회를 마냥 기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보름 쯤 전에 가족회의에서 통보를 받아 선자리에 나온 그는 제가 맞선 상대로 맞았어야 할 상대방인 선이 아니라 신을 마주한 그 시점부터 이 선자리는 엎어졌으니 밥이나 한 끼 먹는 셈 쳐야겠구나,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이유 물어봐도 돼?"

"부탁 좀 하자."

"맥락없게."


 돌려 말했지만 명백한 거절을 받아든 여는 김이 팍 새선 접시에 덜어뒀던 빵 한 덩이에 버터를 바르며 말했다.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그가 아는 김 신은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면 정면에서 대응하는 사람이었다. 같이 산 15 년이 그를 배신하지 않은 것 처럼 떨어져 지낸 몇 년 간의 세월 또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몸집을 불렸던 것이다. 그래도 김 신은 김 신이라서, 말을 해도 되는지 한참을 고민하기는 했지만, 마음을 굳히고 나서는 물 한 모금을 완전히 삼키고 냅킨으로 제 입가를 말끔히 정리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3차 성징 때문에 그래?"


 2차 성징은 10대를 전후해서 시작하는데 3차 성징은 사람마다 발현 시기가 제각각이었다. 2차 성징을 시작한 뒤발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편의상 3차 성징으로 이름이 붙었지만 죽기 전까지 3차 성징의 징후도 안 비치고 살다 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3차 성징이 인간 사회의 기준점이 되지는 못한 이유다.


"어."


 하지만 기득권을 잡는 데에 날개를 달아주는 건 확실했다. 알파건 오메가건, 일단 3차 성징기를 거치기만 한다면 그들만의 세상이 된지 오래인 정재계에 편입되기는 훨씬 쉬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3차 성징을 시작한 이래로 상위 계층 20 퍼센트 중 절대다수가 그들의 차지였다. 성징으로 차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라지만, 암묵적인 영향까지 못본 척 할 수는 없었다. 오죽 특별했으면 알파니 오메가니, 번듯하게 이름까지 붙어 돌았다.


"연애를 부탁해서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물이 그 물인 상황에서 여는 대대로 정계에 인물을 배출해온 가문에서 태어나 당연하다는듯 3차 성징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결과적으로는 오메가로 각성했으므로 가문의 체면은 세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일찌감치 각성을 끝낸 형제들이 입지를 다지는 동안 그는 가문 전체의 압박에 시달리며 살다가 이제서야 대접다운 대접을 받기 시작한 수준이라 아직 가문 내의 입지는 좁기만 했다. 그에 비해 20 대 초중반에 각각 알파로 각성까지 완전히 끝낸 뒤 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한참 가문 소유의 방위 산업체에서 군수 산업을 배우고 있는 신과 선은 한참 제 세력을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약혼도, 각인도, 결혼도 없었지만.


"연애가 싫다면, 결혼은 괜찮은 거야?"

"결혼은 너 말고 네 동생이랑 하기로 합의했던데."

"바꿀게."


 신은 냉큼 그의 말 꽁무니를 잡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절박하긴 절박한 모양이었다.


"형질상으로도 별 문제 없어. 그 애나 나나 알파인 건 같으니까."

"그렇긴 한데……."

"그럼 괜찮은 거지?"


 하지만 또다른 당사자인 여는 도무지 상황이 정리되질 않았다. 입지를 잡기 위해선 결혼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고 그걸 잘 아는 그가 선자리까지 만들어 가며 노력하고 있었던 거지만 하루아침에 상대가 바뀌는 건, 그것도 쭉 같이 살았던 사람으로 바뀔 마당에 온전히 판단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다.


"너무 갑자기 나온 얘기라 좀. 생각할 시간을 줘."

"발현 늦었잖아.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야 한다며."


 하물며 그는 제 치부 하나 하나 꿰던 사람이 툭툭 던져대는 제 약점을 멀뚱멀뚱 바라만 볼 정도로 마냥 곱게만 큰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던가, 그럼."


 호승심이 반, 목적성이 반인 그들의 연애 겸 결혼 생활이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여의 가문에서는 뜬금없는 해코지를 겪을 각오를 한 여가 무색하게 별 반응이 없었다. 아무렴 둘째보단 첫째가 낫다는 입장만을 비쳤을 뿐 계획 한 번 바뀌지를 않았다. 가문 간 결합이라는 점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어느쪽이건 상관 없다는 입장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듯 했다. 여는 그런 취급을 받는 제 처지를 똑바로 마주하면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지만, 결국 모든건 하루라도 더 빨리 발현하지 못한 여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무언가였다. 그는 여전히 제 힘으로 뒤집지 못한 시기에 대해 끊임없이 탓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보기로 마음 먹은 뒤였고, 그 일환으로 신에게 동거를 제안했다.


"옛날 생각나네."


 그는 그런 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살 곳을 미리 구해둔 상태였다. 오랜기간 생활을 맞춰왔던 둘이라 서로가 꺼리는 행동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가 함께 하는 생활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야식 먹고싶다고 허공에다 주먹질하던 때?"

"그때 진짜 배고파 죽는 줄 알았는데."


 문제가 될 만한 일이라면, 곁에 가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향은 알파의 그것과 오메가의 그것이 맞는데도 그조차 의심할 정도로 둘 다 영 뜨듯미지근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서로를 제 짝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개미 허리만큼도 하지 않았다. 결혼 상대가 아니라 동거인을 구한 듯한 그들의 행동은 아무리 둘의 결혼이 정략적인 선택이라지만 실제로 결합을 하기는 하는 건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덤덤했다. 균열 한 번 없는 관계였다. 싸우며 친해지는 전개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건 애저녁에 다 해보고 완전히 끝내기까지 했던 둘이다.

 그렇게 하늘이 무너지는 정도의 사건이 아니고서야 바뀔 일이 없어 보였던 둘의 관계는 엉뚱하게도 신의 단 한 번의 실수에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디 가?"

"어디 가."

"아니, 어디 가냐고."

"다녀와서."


 대부분의 일을 신중하게 진행하는 편인 그가 연락 한 통에 겉옷만 챙겨 급하게 나간 날이 있었다. 여가 보기에도 다시 만난 뒤로 봤던 모습 중 가장 절박한 모양새였다. 그런 그의 분위기에 놀란 여는 와서 말하겠다던 신이 돌아오고 나서도 제 입을 닫았지만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김 신을 저렇게까지 몰아세울 만한 게 있나?


 호기심은 균열을 만들었다. 여는 틈새를 훔쳐보기로 마음먹고는 제 사람 몇을 불러다가 그날 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몰래 알아보기 시작했다. 쉬운 일도 옳은 일도 아니었지만 통상적으로 자주 보이는 일이기도 했다.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 수행원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김 신한테?"

"네."


 여는 그 누가 말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양 크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여는 과거의 신을 똑똑히 기억한다. 잘 생긴 외모에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 앞날까지 말끔한 그가 또래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인이 되고자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당연했다. 하지만 여는 그런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김 신이 어떻게 내치는 지에 대한 것들을 더 자세하게 기억해 왔다. 그런 여였으므로, 그는 신에게 연인이 있다는 말 만큼은 믿지 않았다.


"사귀는 사이 아닐 거야. 걔 그런 거 못 견뎌."


 왕 여가 본 그는 항상 자신이 헤쳐나가야 할 일만을 보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보다 해야 할 일에 더 신경을 쏟는 사람이었던 그에게 의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면, 그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연을 맺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김 신의 행보는 선과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여의 결혼을 제 곁으로 틀어 상부상조하는 구도를 만들어 냈고, 거기에 사랑은 한 순간도 없었다.

 하지만 제 수행원을 돌려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치밀한 성정의 신이 차마 감추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 그는 김 신의 연인이라는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김 신이 모든 인연을 다 쳐내던 이유였던 사람이자, 그 김 신이 기숙사에 무단으로 술을 들이게 만든 장본인이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하숙집에서 술만 깠다 하면 제 존재의 이유라며 심심찮게 불려 나오던 그 이름


"지 은탁?"


 그 이름이 쓰여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 한 장에, 기업 단위로 진행하던 재단 사업에서 제일 먼저 통과한 지원자들 목록 구석에.

 여는 쉽게 유추했다. 급하게 나가느라 숨길 틈이 없었던 거겠지. 어디까지나 김 신은 김 신이라, 그는 그녀와 함께할 때 조차 그녀 다음으로는 제게 부여된 의무에 신경을 쓸 사람이었다. 거기에는 가문의 굴레도 있었을 것이고, 그 모든 걸 당연하다는 듯 짊어질 그의 모습은 어렵잖게 그릴 수 있었다. 순간, 여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연애를 의무적으로 할 수 있나?


 그의 머릿속에 결혼과 연애를 동시에 부탁하던 누군가의 모습이 스쳤다. 설마.




 그날 밤 신이 말했다.


"정리하고 오는 길이야."

"뭐를?"

"관계."


 그는 평온함을 고수하고 있었다. 커피를 젓는 손이 떨리지도 않았고, 어깨가 쳐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눈 만큼은 속일 수가 없어서, 여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심경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지 은탁이란 처음이자 끝 사랑이었다. 그걸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경쟁을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한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기질이 발현하는 시기가 달라 지금까지 고생인 그가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던 일이기도 했다.


"뭐하러?"

"가정에 충실해야지."


 가족 서열도 모자라 애정 서열까지 이런 식일줄은 몰랐지. 여는 한 일도 없으면서 축축 쳐지는 제 모습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더 비참해지기 전에 차라리 선수를 치기로 마음 먹었다. 방어기제였다.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티나는 방어기제가 티나지 않는 붕괴보단 나았다.


"안 그래도 되는데."

"무슨 소리야?"

"걜 어떻게 놓으려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놓고 왔어."

"가서 다시 잡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벌써부터 왜 그래?"


 피곤하게 굴 생각 없어. 그는 망설이는 신의 등을 떠밀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부추겨달라고 온 몸으로 소리치는 것 같았던 신은 그가 미는 대로 얌전히 떠밀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꿈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급하게 서류를 정리하던 그 와중에도 잠깐, 여에게 물었다.


"너는."

"나 뭐."

"괜찮겠어?"

"어."


 아니. 별로.


"얼른 가봐."


 근데 넌 더 안 괜찮을 거 아냐. 그 꼴 보느니 내 선에서 먼저 끊지.


"그 애 가지고 잡음 안 나게 해둘테니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이래서 문제였다. 모른척도 못 하고 속이지도 못 하는 관계 속에서는 긴장감도 없고 새로 바뀔 것도 없었다. 모든게 익숙하니 상대방이 눈치 채기도 전에 걸림돌을 치워 버리니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사건들이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지니 관계는 제자리만 뱅뱅 돈다.


"……결혼식 전 까지 정리하고 올게. 그때까지만……."

"빨리 가."


 문을 닫을 여유도 없이 뛰쳐나간 신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는 결혼이 성사되기 직전, 운명처럼 오메가로 발현하는 은탁을 상상했다. 신과 은탁의 행복 뿐만 아니라 제 행복에도 그게 훨씬 나을 거란 생각을 하고 나서야 그는 제 미래를 깨닫고 말았다. 앞으로 홀로 설레고 홀로 포기할 날들이 선했다. 여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닫았다. 손 한 번 대지 않아도 자동으로 잠기는 문고리가 그만큼 야속한 적이 없었다.

 끔찍하리만큼 익숙한 광경이다. 알파건 오메가건 발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대우가 눈에 띄게 다른 집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이런 상황 자체가 생활 그 자체였다. 가문 내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잡겠다고 이리 재고 저리 대 결혼을 결정할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몰려오는 탈력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맞네, 결혼 전제로 연애. 혼자 해서 그렇지.


 여는 상황이 이렇게 된 김에 가문 내에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목적에만 충실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바랄 수 없는 거라면 포기라도 빨리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안 해본 사람 떠미는 것 보다야 해본 사람이 또 하는 게 낫겠지. 그 애가 발현만 한다면, 김 신의 곁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신분이 된다면 그나마도 다 끝날 거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여는 차라리 자기 만큼이나 은탁이 간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마음에 두지 않은 지금, 차라리 빨리 데려갔으면 싶었다. 만일 신과 은탁이 맺어진다면 저는 처음 이야기가 나왔던 대로 선과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면 그만이었다. 그정도의 유연함은 양쪽 가문에서 모두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가문에 연락을 넣었다. 은탁의 3차 성징을 제 선에서 도울 수 있는지 직접 물어볼 작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득권을 쥐기 위해 알파와 오메가를 데려오는 건 그들의 세계에선 이미 일반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사돈 관계가 될 거라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오메가를 확보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상황은 여에게 녹록치 않게 흘러갔다. 인간은 아직 3차 성징기를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없었다. 유전적인 경향성은 어느정도 증명 되었지만 그 뿐, 발현은 아직까지도 운에 기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미 발현을 끝낸 알파나 오메가의 호르몬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해도 발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순간적인 압박감을 느끼는 것 말고는 별 변화가 없다는 연구결과만 쏟아지는 세상이었다. 신의 장밋빛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자, 여의 장밋빛 나날은 시작조차 하지 못할 거라는 의미였다.

 이렇게 살다 가려나 보다. 여는 시작조차 하지 못할 사랑이라면 영영 모르다 갔으면 싶었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떡하니 공개하는 세상, 형질은 권력 수단으로 쓰는 세상에서 사랑을 알아가는 건 한여름에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를 맨발로 걸어가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다. 여는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애정과 애정이 부딪치는 전쟁터에 들지도 못한 채 저 멀리서 바라만 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결혼 전, 둘의 애정관계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Posted by _zlos
Goblin2017. 4. 19. 22:41

 4부작 외전. 묶임.



"도깨비."


 고요했다. 진남빛 바람이 연초록 잎새가 스며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한 뜸 한 뜸,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더 귀를 기울여보면 숨을 쉬지 않아도 살 두 존재의 숨소리까지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가 둘이라는 건 집터 안에 도깨비가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는건 지금 김 신이 왕 여의 앞에서 없는 척을 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전히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도깨비."


 있는 줄 아는건가? 없는 척 계속 해야 하나? 그의 이야기는 속도 모르고 여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아는 사람은 듣는 사람 뿐인 것 까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이대로 가다간 당사자 둘만 몰라 지지부진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여는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통보했다.


"들어간다."


 현직 저승사자 버릇 못 버릴테니 이름 세 번은 부를 거라고 생각한 신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쥐고 있던 메밀군을 놓쳤다. 여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덜걱.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음이 도깨비를 숨겼다. 때아닌 방해공작에 여의 볼이 부풀었다. 뭐야. 문 잠궜어? 덜걱덜걱. 몇 번을 돌려도 똑같았다. 덜걱덜걱덜걱덜걱.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도깨비의 언어까지 대신할 판에 여의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그는 명계에서 빌린 능력으로 신의 방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제 방에 들어가 만능열쇠를 꺼냈다. 짤강. 어딘가의 방울 소리 같기도 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제 방 안에서 빙빙 돌던 신은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혼비백산 문앞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직접 잡았다. 덜컹. 방금 전과 다른 소리였다.


"뭐야."


 여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씨름했다. 잠긴 게 풀리긴 했는데 돌아가질 않았다. 문 뒤에서 문고리를 잡고 놓지 않는 도깨비 때문이었다. 동거 차사 못지 않게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한 그가 저 없는 척 까지 포기하며 여를 거부하고 있었다. 여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렇게까지 거절하는 이에게 억지로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 오늘은 물러서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짤강짤강, 짤강. 이대로 뒤돌아서 제 방으로 돌아가면 방금 있었던 일은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내가 열까, 네가 열래.


 하지만 여는 마음을 열었다. 공기의 울림 없이 다시 한 번, 통보였다. 들여야 하는데. 들여야 하는데……. 투명하게 들리는 방 너머 목소리에 홀린 탓이다. 


"……."


 신은 언제부턴가 제 머릿속에 드문드문 찾아오던 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필 이 때일 건 우연인가, 운명인가. 답인가, 질문인가. 신은 눈을 눌러 감았다. 잊지 않기를. 세월이 지나도 한끗도 변하지 않을 목소리였다. 모든걸 지고 가는 주군에게 신하된 자이자 그를 연모하는 이로써 어떤 모습을 보이고 남길 것인가?

 문이 열렸다. 열린 틈을 비집고 솜 뭉개지는 소리가 새다가 곧 종적을 감췄다. 




 여는 그의 방에 들어서자 마자 신의 침대에 걸터 앉았다. 방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메밀군을 주워 원래 있던 자리에 잘 세워놓은 그는 무의식적으로 옆에 앉으려다 제 침대에서 느껴질 리 없던 냉기에 놀라 펄쩍 뛰었다.


"말 좀 할까."


 신은 펄떡대는 제 심장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눈길을 피하느라 고개를 돌렸다. 이름 자 그대로의 검은빛 눈빛이 전깃불을 뚫고 신의 눈 너머를 꿰뚫었다. 신의 경계선에 들어선 건 신이었지만 신처럼 구는 건 눈앞의 사자였다. 늘 그랬다. 그는 신이 무신으로 떠받들리던 시절부터 제것이되 제것이 아닌 권능 만으로도 신을 무릎 꿀렸다. 


"어, 엉."

"들을 게 많은데."


 천지가 뒤집혔지만 신은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매 번 적당한 때에 적당한 기회를 잡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다면 그건 김 신을 찾을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어딘가를 푸드덕대며 날아다닐 나비의 흔적을 찾아야 할 문제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살아온 생이 제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며, 신은 간신히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들을래. 그…… 처음부터?"

"아니. 방금 한 소리부터."


 하지만 첫 마디부터 이럴 줄 알았다면 신은 맹세코 그를 방 안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잡귀라도 들렸어? 뭘 듣고 있는 거야? 그것도 내 목소리로."


 듣긴 뭘 들었다고 그래. 신은 저도 모르게 입을 거치지 않고 여를 다그챘다. 순간 톡 퉁긴 신의 말이 그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는 표정을 구기며 반문했다.


"잊지 않기를."


 야, 그건.


 신은 백짓장처럼 허옇게, 발로 딛은 바닥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어떻게 알았어. 네 신념을 듣는 나를, 나 혼자 알 너와 나를, 우리는 아직 아닌 너와 나를, 어떻게 들었어. 따져 물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공기를 울릴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점점 더 험악하게 구겨지는 여의 얼굴과 마음에, 신은 급기야 풀릴날이 먼 서리가 다 되어 여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순간, 그는 불쑥 제 얼굴을 내밀었다. 기겁한 신이 한 뼘, 고개를 젖혔다. 여는, 이러려고 평소에 그렇게 차게 다니나 싶을 정도로 뜨거운 속덩이를 신에게 냅다 던졌다. 


 지금 내 소리. 들리지.


"들리지. 들리는데, 소리가 좀……."

"그날 그 때부터 내내, 계속 이 크기로 들렸거든."

"설마."


 네 생각. 토씨 하나 안 새고 다.


 신은 차라리 제가 지금 당장 물이 되어 녹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잊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부주의한 도깨비. 언젠가의 저승사자가 친히 도깨비의 머릿속에 찾아와 그를 확인사살했다. 그런 그의 머릿속마저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여는 간단히 평했다.


"칠칠치 못한 저승사자라더니."


 ……들었어?

 들린다니까. 선연히.


"……몰랐어."

"몰랐다고?"


 어떤 낯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던 도깨비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아닌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신은 긴장이고, 눈치고, 우정이고 뭐고, 그 어떤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극도로 흥분했던 그 순간을 어렵게 떠올렸다. 마주볼 이를 볼 여유가 없어 눈마저 감은 채였다.

 숨이 드나드는 것 조차 신의 몸을 거쳐야 간신히 가능할 정도로 막혀있을 때 쯤, 여는 반쯤 시체인 줄 알았던 몸에 열이 옮겨붙는 줄 알 정도로 신에게 잠식되어 있었다. 간신히 신을 통하지 않은 공기를 맞을때면 한참동안 물에서 빠져나오려 헤엄치다 간신히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민듯 했고, 찰나를 참지 못한 신이 저를 덮어올 때면 끝을 모를 불길이 저를 집어삼키는 듯 해선 몇 번을 도리질쳤다. 불이자 물이라던 신은 그를 애정속에서 욕망안으로 삼켰다. 입고 있던 옷가지는 침대 언저리에 아슬아슬 걸쳐 있었고, 이불 속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신의 혀가 스치는 곳 마다 불거나 부었다.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남겨두지 않을 작정으로 손끝 부터 씹어 삼켜온 신은 여의 양 쇄골에 제 흔적을 깊게 새긴 뒤에야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 경고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어 안달이 난 그 순간 조차 끝의 끝까지 제 욕심을 억누르고 신은 한 번, 그를 기다렸다. 나는 이 이상 멈추지 않을 작정인데, 너는 어떻게 할래.

 말은 숨이 가빴고 생각은 전달이 적나라했다. 여는 홀린듯 몸을 일으켜 신의 목을 끌어 안고 목젖을 핥았다.


 으, 음….


  오랫동안 움직임다운 움직임 한 번 없던 침대가 그들의 관계에 발맞춰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이상은 봐줄 일 없다는 듯 유두부터 입에 넣고 굴리는 신의 몸짓에 버벅임 한 번이 없었다. 삼킬 수록 탐할 곳만 늘어 제 손에 넣느라 바쁜 자가 하나, 온 몸을 내어주면서도 저를 탐하는 이의 머리칼에 손 한 번 올리지 못해 안달내는 이가 하나. 쭉, 빨아들일 때면 아랫배가 판판히 당겨지는 게 살갗 너머로 적나라해선, 신은 김 빠지는 웃음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 민망했던지


 그것 좀, 안 하면 안 돼?


 하며 발버둥 치는 여가 있었지만, 그런 그를 덮쳐 누른 이는


 안 하면 이걸 왜 해.


 하며 그 큰 손으로 여의 옆구리를 살살 쓸었다. 누군가의 틀 일만 남은 입술이 불퉁하니 튀어 나왔다. 싫어? 그만 할까? 관둘 생각도 없으면서 예의상 물어보면 도리도리, 흔들리는 머리칼마저 어여뻤던 그는 제가 받았던 그대로 여의 목젖에 살짝 입술을 내리곤, 살짝 나온 입술이 열린 틈에 제 손가락 몇 개를 벌어진 입에 물렸다. 마음이 급해 허공을 몇 번이고 저은 다음에야 잇몸과 이빨 사이를 꾹 문대어 볼 여유가 잠시나마 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츕. 손 마디 마디를 빨아올리는 소리에 눈이 뒤집힌 뒤로는 전부 파편이었다.


 아, 안, 돼. 신. 김…신. 아아…….


 그와중에 몇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던 여의 모습은 어떻게 그리 강렬하게 박혔는지 파편만 쥐고 있는 신은 잘못을 해도 크게 했구나 싶어 그길로 말도 안 되는 테라피를 시작했던 것이다. 신은 한없이 짧은, 끝없이 뜨거운 그날을 간신히 살리고 눈을 떴다.


 너…….


 제 침대 한 구석을 차지한 자의 고개가 두 손에 파묻힌 채 바닥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 있었다. 


 ……다 들린다니까…….


 신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와중에 스친 눈길이 여의 목덜미를 지나쳐 그때 그 빛깔인 걸 보고 말았다. 이 순간 그에겐 권능조차 죄였다. 그는 차라리 여와 나란히 얼굴을 가리는 쪽을 택했다. 볼 이가 절대자 뿐인 게 안타까울 정도로 진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이성을 놓아버린 뒤로 남은 기억이 주말 드라마 재방영분처럼 부분부분 잘려 있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잘못을 해도 크게 했겠거니, 지레 짐작하고 틀어박힌 신이 제게 안긴 이에게 물어볼 의향만 있었다면야 생각외로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걸 신도 알고는 있었다. 불안함이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알면서 행동하지 못할 만큼 신을 막다른 길에 몰 정도로, 도깨비에게 몇 백년만에 찾아온 기억의 공백은 그렇게나 무겁고 무서운 일이었다. 여의 입장에서야 제게 말을 할 준비도 하지 못한 도깨비의 상태가 매일같이 들려오는 판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 보다는 기다리는 게 더 나았다. 해서 신의 눈길과 손길이 닿은 향초 업계가 때아닌 초호황을 누리는 동안 여는 제 삶을 살며 신을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여에게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는 그 순간의 생각이었지 그의 기억은 아니었으므로, 기억에 구멍이 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이야기를 꺼낸 거였고, 그래서 둘은…….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방법 있어?"


 그날 그 밤, 그 순간처럼 다시 한 번 침대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렇지."

"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그를 취해도 괜찮은 걸까. 신의 고뇌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 작정을 하고 신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자신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좀 더 떳떳하게 다가가기 전 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부탁하는 이에게 억지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하질 않아서 그래? 그런 거면 다음에……."


 신은 냉큼 몸을 붙였다. 제 감정의 근원이 여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걸 그는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꽃망울이 괜히 핀 건 아니다. 동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죄책감에 파묻혀 살다가도 편린이 스칠때면 그를 안고싶다는 감정에 휩싸이는 그였다. 그런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여는 이미 그날의 일을 전부 기억하는 제가 그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 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주기로 마음 먹은 뒤였다.

 욕망에 찬 그의 시선이 방황 한 번 없이 그의 밑에 깔린 사내에게 꽂혔다. 꼭 같은 눈길로 마중하며 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엔 기억해봐."


 좀 천천히 하고. 그는 제 셔츠에 신의 손을 직접 끌어오며 덧붙였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모든 것이 엉겨붙기 시작했다.




 잤고, 돌아왔고, 돌아오지 않았다.




 꽃샘추위와 기상이변 사이를 넘나들던 혼란에 점이 찍혔다. 봄 내내 변덕의 끝을 보여주던 도깨비가 사는 그 동네도 늦게나마 봄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는 꽃 피는 잎새가 함께하던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나 이제 푸르고 푸를 날만 받아두고 있었고, 평생의 단위가 아예 다른 둘은 바깥이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왼쪽엔 도깨비, 오른쪽엔 저승사자 나란히 나란히 소파 한 쪽 씩 나눠 앉아 음악 프로그램이나 보고 있었다.


"픽미 걔는 이제 안 나와?"

"픽미 걔라니! 그런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아이-오 해체한 지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이 몰상식한 저승사자야! 연기자로 자리잡은지 오래인데도 여에게 여전히 픽미 걔로 불리는 그녀를 위해 신은 이따만큼 쌓인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그 아이가 그 소리 안 들으려고 몇 년을 노력했는지 알아?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실언을 한 여도 제가 말을 잘못한 줄은 알아서 노래 한 곡이 다 지나도록 얌전히 신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앞으로 내 집에서 픽미 걔라는 말 하지마."


 신이 그 말을 하기 전 까지만.


"내 집이야."

"내 집이야."

"구 년 맡아줬다고 내 집이 네 집 되냐. 여기가 뭐, 점거만 하면 내 집 되는 네덜란드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계약서가 거짓말 하는거 본 적 있어?"

"너 말 잘 했다. 계약서 한 번 보러 갈래? 결판 낼까?"

"그렇게 말하면 뭐, 겁이라도 먹을 것 같아?"


 관계가 요동칠 일을 몇 번이나 겪었지만 둘은 한결같았다. 버튼 한 번 눌렸다 하면 둘을 둘러싼 온갖 것들이 뒤집어지는 것도 여전했다. 바뀐 게 있다면 허구한날 덕화까지 불러다 심판으로 세워놓고 싸워 조금 더 유해하다는 것 정도. 


"덕화야."

"삼촌? 언제 왔어요?"

"방금 문 연 참이다."


 그나마도 덕화는 유씨 가문에서 둘과 함께했던 가닥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무슨 말이고 하니, 그는 몇백 살 먹은 둘이 저보다 더 나잇값을 못 할 때 벌컥 역정을 낼 수 있는 주변인으로 살아온 제 경험을 소중히 간직해뒀다가 이럴 때 마다 아낌없이 풀어재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종친회에 이 소식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대번에 무례하다고 한 소리 들을 만 한 일이었지만 그는 도무지 두려워하질 않았다. 믿는 구석이 제가 모시는 도깨비의 바로 옆, 물병 하나 들어갈 거리만 두고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결국 도깨비의 행복을 위해 사는 유가의 사람이었다. 


"그래, 덕화야. 계약서 말인데."

"아, 깜짝이야! 끝방삼촌은 또 언제 왔어요?"

"방금. 저자가 문을 열었다."

"예? 문 타고 왔어요?"


 이젠 느껴지지 않아도 당연히 있으려니 싶은 그의 존재를 애써 모른척했던 덕화는 슬슬 시동을 걸었다. 행복의 원천을 끼고 나타난 가문의 신이 표정과 다르게 생기에 가득찬 눈빛을 보였다. 제 행복을 티내지 못해 안달이 난 게 분명했다. 그런 그를 보며, 덕화는 오늘도 고운 소리만 해서 보내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데 먹을 것 하나 안 들고 오는데다가 인간의 방법은 절대 안 쓰는 둘에게는 꾸중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그런데라고 했어요?"


 덕화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두 눈은 땡그랗게, 입은 있는 힘껏 벌리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둘 다 티좀 적당히 내요, 좀!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순진하면 어떻게 해!"


 사춘기도 아니고 몇춘기예요, 둘 다? 사랑싸움 하고 올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요. 내 눈을 바라봐, 그거 하려고 그래요? 덕화의 목소리가 점심시간을 맞아 셋 만 남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복도에 샐 정도로 울림이 큰 목소리였지만 정작 두 인외의 존재에게 닿은 덕화의 목소리는 하나 뿐이었다.


"무슨 싸움……."

"남사스럽게 그 무슨……."


 이제 번듯한 가정까지 꾸린 신의 가신은 꾸중이나 하려던 계획은 던져버리고 울분을 못 이긴 채 소리쳤다.


"둘 다 나가요. 나가! 나 밥먹으러 갈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냐, 하면.


"꼴이 말이 아니네, 도깨비."

"사돈 남말 할 처지가 아닐텐데."


 둘은 계약서도 못 보고 쫓겨났고, 멀뚱멀뚱 건물 앞에서 서로만 바라보다가, 에이, 날씨도 좋은데 그냥 걸어가지 뭐,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봄의 끝자락이 여름의 손을 잡고 서 있었고, 그 모습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나날이 오는 것 같기도 해서 서로의 머리칼 위에 실바람이 얹어둔 마지막 봄 몇 장 대신 털어주다가, 우리 데이트나 할까, 하고 말았다. 지하 일 층 백반집으로 도망간 덕화가 알면 그야말로 이모티콘 하나 빼다 박은 얼빠진 표정 그대로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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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oblin2017. 3. 29. 00:08


4부작 외전. 묶임.



 기나긴 도깨비 생애에 고민할 거리야 차고 넘쳤지만 이번 고민은 도깨비 생에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일이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확, 한숨이 휙. 고민의 주체가 인외의 존재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날마다 바쁜 그의 입꼬리를 따라 꽃망울도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이승에 사는 다른 이들도 덩달아 고생이었는데 피고지는 꽃을 보며 애타게 축제를 기다리는 이들은 양반이고 의문의 기상사태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이 늘면서 모처에 사는 김 차사가 매월 할당받는 명부가 한 장 두 장 더 쌓였다.

 누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아는 저승사자나 누가 어떤 일을 왜 벌이게 됐는지 얼추 짐작하고 있는 구 재벌 3세, 현 재벌 2세는 가끔 짜증을 낼 뿐 평소처럼 신을 달달 볶아 상황을 해결하라고 몰아치지 않았다. 당장 신부터가 왜 그런걸 하냐며 비웃던 과거가 무색하게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온갖 것들을 제 집터에 들이고 있었다.


"치약 옆에 그거 뭐야? 면도하다 봤는데."


 오늘만 해도 그는 향초에 직접 불을 붙이며 아침을 시작했다. 그 전에 침대에서는 도움이 된다는 요가 동작을 몇개 떠올려 자세를 잡았고, 전날 밤 자기 전에는 클래식을 잘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선정한 잠들기 딱 좋은 클래식 음악 10선을 틀어놓고 잠들었다. 별 효과는 없었다. 알면서도 시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실 그런 것들 하나 하나가 전부 도깨비에게 효과를 발휘했다면 검을 뽑지 못했을 시절 그는 도깨비 신부가 아니라 국경없는 의사회 출신의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입욕제."


 여는 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힘내.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하고. 그는 제 집터 바로 위에 먹구름을 한 사발 불러오면서도 고개를 주억댔다. 어디 가. 출근. 별 일 없으면 바로 올게. 여는 곧 모자를 쓰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여의 옷자락이 집터에서 사라지는 것 까지 남김없이 지켜본 신은 드넓은 터에 저 혼자만 남자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댔다.

 사실 신은 해결책을 알고 있다.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걸로다가.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 나서도 한동안 둘의 관계는 전진 한 번 없이 지지부진했다. 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신은 남는게 시간이었다. 당사자는 거리낄 게 없어 제일 답답해 하던 건 둘 모두를 제일 가까이서 지켜보는 덕화였다. 그는 기업 내에서 점점 입지를 다져가느라 한참 바쁜 시기라 도깨비 터에 직접 찾아오는 빈도가 제법 줄긴 했는데, 그 와중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과거 제가 들을 땐 그렇게 싫어하던 잔소리를 누구에게 배워온 건지 한 번 들렀다 하면 세상과 격리되기라도 한 듯 느긋하게 구는 둘에게 제발 진도 좀 빼라고 닥달이었다.


"아직도 이래요?"

"뭐가."

"뭐."

"이쪽 끝에 한 사람 앉고 저쪽 끝에 한 사람 앉아서 아무 소리도 안 내면서 밥만 먹고 막. 그러면서 살아요?"


 둘은 별 이상한 이야기를 다 듣는다는 듯 굴었다.


"너 말고 여기에 사람이 어디 있어."

"저 자는 밥 안 먹어."

"아니! 하여간에!"


 평소와 같은 평안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 신이나 그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나 덕화의 혈압을 올리는 건 똑같았다. 저렇게 죽이 잘 맞는데 아직도 진전이 없어, 진전이. 나만 혈압 오르지, 나만 죽어! 


"안심하거라. 그 집에서 혈압으로 고생한 사람은 가문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는다."


 덕화의 억하심정이 얼마나 컸으면 인간의 소원이 되어 신에게까지 닿았을까? 신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냉큼 대답했다.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짧은 인간만 속이 터졌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내 명에 못 살지 싶었던 그는 제가 모시는 신을 데리고 막무가내로 그의 방에 데려갔다. 삼촌. 잠깐 좀 와 봐요. 아니, 끝방삼촌 말고 삼촌만요. 신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영원히 저보다 어릴 가신이 무엇을 할지 두고 볼 요량으로 잠자코 질질 끌려갔다. 탁, 문이 닫히자 마자 덕화는 끝을 보고 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숨기지 않고 쏟았다.


"둘이 언제 사귀는데? 나 죽기 전에 사귀는 거 보고 갈 수는 있어?"

"말이 짧다?"

"……요."


 어떤 면에서는 당사자인 둘 보다 덕화가 더 필사적이었다. 유가의 사람들은 저승사자는 몰라도 도깨비는 알았다. 인간들 사이에서 우뚝 선 그 존재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대를 이어가며 그를 모시는 이들은 어떻게하면 그의 공허를 달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별 소득은 없었지만, 신은 그런 가신들을 기꺼워하여 제가 줄 수 있는 것들 중 인간에게 줄 만한 것들을 찾아다가 별 말 없이 건네기도 했다.


"때가 되면 해결될 일이다. 신경쓰지 말거라."


 그런 신의 태도가 가신들을 더 미치게 했다. 명색이 가신인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 중 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지나치게 한정적이고,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면 그나마도 신이 자신들에게 부와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항상 덕만 보고 그에 대한 보답을 하지 못해 쌓여가는 죄책감은 유가에 뿌리깊게 내려 있었다. 그 집안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하나같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며 신의 걱정을 하는 건 우연이 아니라 내력이었다.


"눈 앞에 행복덩어리가 걸어 다닌다면서 그걸 왜 기다리고 있어요. 가서 잡으면 되지."


 그들이 대를 내려오면서 같이 물려받는 숙원 사업중에는 한때나마 그들의 신을 달랠 수 있는 자를 찾는 것도 있다. 나타나기만 하면 그 즉시 유씨 가문의 영웅이 되어 도깨비의 은혜를 나눠 받을 수 있었다만 인연조차 뚝 떨어지는 게 아닌지라 이 또한 하늘의 영역이었다. 무슨 곡절인지 이번 대는 상서로운 일들이 많았다. 신이 특별히 관심을 두는 인간이 있었고 집에 들여 함께 살기까지 했다는 덕화의 말에 온 집안이 축제 분위기였던 적도 있다. 은탁이 떠나기 전 까지만 해도 신에게 늦게나마 찾아온 행복을 부디 마음껏 누리십사 덕화에게 이런저런 언질을 해두는 건 집안 행사마다 늘 있는 일이었다.


"사과도 익어야 먹지. 안 익은 거 먹을래?"

"사과를 구백…몇 년째야 대체. 여튼 구백 년 동안 안 먹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삼촌."

"내가 사람이냐?"

"아! 진짜! 아!!!"


 답답해 죽겠네! 그러다 좋은 때 다 놓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온 터를 울리는 덕화의 목소리에 거실에서 얌전히 드라마를 보던 여까지 놀라 펄쩍 뛰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삼촌 행복 하나 보고 살아요. 알잖아요. 신은 결국 선심쓰듯 말문을 텄다.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다."


 세월이 무게를 더해 모르는 새 깊어진 건지, 스스로 중히 여겨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빠져든 건지. 시작은 몇번을 돌이켜도 말끔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사랑을 생각조차 하지 않던 이에게 감정을 처음 각인시키고도 다음날 아침 같은 공간에서 한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신 만큼 사려깊게 다가갈 줄 아는 이가 아니라면 신 만큼은 아니더라도 경험을 충분히 쌓은 이들이나 가능한 것을. 이승에 살며 겪을 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 겪어본 도깨비는, 이제와서야 그의 곁에만 서면 제 감정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을 새로 알았다.


"좀 무섭기까지 하고."


 눈 앞에 사랑하는 이가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고, 닿고 있으면 잡고 싶고, 잡고 있으면 영영 그렇게 있고 싶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다. 사랑이란게 원래 그런 거니까. 그래도 뭐, 이정도 선은 세상천지가 도깨비의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수준 까지는 아니었다. 이 사단이 난 건 덕화가 가고 수목 미니 시리즈가 마지막화를 하던 그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어려서 그런가 팔팔해."


 뭐라뭐라 한참동안 제 행복론을 설파하던 덕화는 업체의 연락을 받자 마자 쫓기듯 도깨비 터를 떠났더란다. 붕 소리와 함께 매끄럽게 집터를 빠져나가는 덕화를 보던 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거실로 돌아와 여의 곁에 앉을때 까진 그저 그렇지만 곁에 왕 여가 있는 그런 일상이 지나갈 줄만 알았다.


"뭐라길래?"

"'그러다 영영 떠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신은 과장 좀 더해 말했다. 그 소리가 그 소리 맞기도 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내 말이."


 자기 자신의 생애를 걱정하기도 바쁠 인간에게 걱정 한 대접 통크게 받아온 신은 머쓱하게 웃었다. 나눠 먹으래. 뭐. 내 몫까지 챙겨왔어?


"다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전화받고 가버리더라."

"뭘 털어 놔."

"나는 괜찮은데 네가 부끄럼을 많이 타서 기다리고 있다고."


 틈만 보여주면 바로 데려갈 거라고, 미리 말이라도 해두려고 했었는데. 아깝게 됐어.

 뭐. 어디로 데려가려고?

 내 침대로?

 지금은. 뭐. 못 갈 것 같아?


 그는 여를 바라봤다. 승부욕 때문에 제 상태를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타자의 시선에서 살피면 움찔, 주춤, 흠짓, 난리도 아니었다. 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손을 뻗어 손등으로 뺨을 스치며 거리를 좁혔다. 요동치는 눈가를 보며 손을 잠시 내렸다가, 모르는 척 몸을 완전히 돌려 그를 품에 가뒀다.

 숨결이 닿았다. 도망가는 눈길이 야속해 혀를 섞듯 숨을 섞었다. 어깨 너머를 짚었던 손으로 머리를 받쳐 뉘였다. 소파 한 구석이 깊게 들어갔다.


 못 가지?


 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눈만 굴리다가, 결심한 듯 손을 뻗었다. 그의 손 끝이 신의 구레나룻을 스쳤다. 이마라도 대겠지, 생각하던 신에게 놀랄 일이 벌어졌다.


 야. 너, 지금.


 잘 관리되어 말끔한 입술이 다섯 걸음 먼저 와 있던 신에게. 눈 질끈 감고 슬쩍. 그냥,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서는.


"……별……."


 닿았다. 둘이 손을 맞잡았던 어느 순간 만큼이나 어색하게.




 별 거 아니네 따위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지금와서야 신은 생각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던 그때 그 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그 자신의 간절함이었다. 눈도 귀도 다 닫아둔 여가 잠깐이나마 열어둔 창구를 그대로 닫히게 둘 순 없다는 절박함.


"……도깨비?"


 신은 막무가내로 제 혀를 그 안에 밀어 넣었다. 결리지 않도록 뒷목을 받쳐 올리던 손을 품에 가두는 족쇄로 썼다. 미처 다물리지 못한 공간이 좁고 뜨겁고 축축했다. 여는 온 몸을 짓누르는 신에게 놀라 눈을 떴지만 그의 눈 너머, 저만 보인다는 것에 훨씬 더 놀랐다. 한때 그는 세상이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산 자의 시선보다 망자의 시선을 더 많이 마주하는 존재였다. 그 긴 세월을 보내면서도 익숙해질리 없는 끈적한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가자.


 여는 고개라도 틀려 하면 득달같이 저를 짓누르는 신의 알력에 밀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순간도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간지럽고 부끄러운 순간이 민망해 혀를 빼려고 하면 뒷목에 받쳐둔 손을 당겨서라도 온 숨결을 빨아들이는 신이 거셌다. 읍, 으. 그는 이성, 감성 가리지 않고 전부 말려들어간 제 상태를 증명이라도 하듯 양손으로 신의 목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온 몸이 들렸다.


 내 방.


 순간, 그는 가까운 미래가 덜컥 불안했던 나머지 서로의 생각이 강할 때면 의도치 않게 상대방이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잊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남는 게 시간일 둘에게 잠깐의 망설임은 그야말로 찰나의 일이었지만, 여의 당황이 신에게 툭 던져지자 순간 영겁이 흘렀다.


 잠깐만. 김 신. 잠깐만.


 그러나 곧, 신은 그를 내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혀 끝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입이 다물릴 기미라도 보이면 타액 한 방울 놓치지 않겠다는 양 그의 목을 뒤로 젖혔다. 열 오를 일 없는 몸이 어느새 미지근했다.


 겪어보면 알겠네.


 마침내 입이 떨어져 누구의 타액인지도 모를 타액이 입가에 매달린 걸 여의 눈이 받아들인 순간, 그는 제가 들어간적이 손에 꼽는 신의 방에, 이불을 채 걷지도 않은 침대 위에 안착했다는 걸 알았다. 잠시나마 신이 그의 곁에서 멀어진 그 순간, 그가 맞지 않는 초점을 천천히 맞춰가는 그 동안, 신은 제 니트를 벗어 던졌다. 안에 갖춰 입은 셔츠는 단추를 푸는 것도 거추장 스러웠는지 대충 튿어버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끝까지."




 요지는 이렇다. 끝까지 갔다. 김 신이. 왕 여를 데리고.


 무슨 정신으로 그랬지. 신은 제 머리를 마구 구겼다. 그 날 그 기억은 신에게 일관되게 얄궂었다. 지금 이 순간마저 그의 손바닥에 신 자신의 머리칼이 감기자 그때 그 순간, 드물게도 땀에 젖어 제 손에 감겨오던 누군가의 머리칼을 그의 의식에 내보냈다. 감촉을. 스탠드 빛을 받아 빛나던 빛깔을. 착 달라 붙었던 이마 끝을. 그리고 가면 갈수록 더 크게 고개를 저으며 온 몸으로 울던 누군가를.


 진실되게 말하자면 이렇다. 김 신은 그를 안았다. 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끝까지.


 그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야채를 손질하다가 손을 베이는 것 처럼, 겪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일 처럼, 지금 당장은 몰라도 몇 주만 지나면 평소의 둘로 돌아올 것 처럼.

 신은 이러다가 제가 먼저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제법 신빙성 있는 추측을 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해서, 그는 제 과오를 이런식으로 묻고 싶지 않았다. 끝의 끝이라도 좋으니 그는 여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려면 신은 죄책감과 염려를 담아 여에게 하나만 전하면 됐다.

 벽을 세워도 좋고 도망가도 좋아. 분이 풀릴때까지 때려도 좋아. 없던 일로 만들지는 마.


 하지만 어떻게?


 다 덮어놓고 돌진하기엔 저지른 짓이 있었다. 단적으로 신은 제 자신을 처분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인 것 처럼 굴었다. 하루 하루를 향초와 보내고 클래식과 버텼다. 무슨 낯으로 그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할 수 있을 지, 언젠가처럼 그 모든 걸 전할 기회는 있을지. 그 오랜 세월을 살아 놓고도 알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 답답하게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둘의 관계는 까마득한 과거에 이미 망가진 적이 있었고 그는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홀로 산 세월이 너무나도 긴 도깨비의 내면에 깔려 있는 두려움은 그만큼이나 두텁고도 깊었다.

 바로 다음 날 짐을 싸서 나가지 않은 여에게 감사하면서도 정말 떠나버린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톡톡히 한 몫을 했다. 한 걸음 다가오는 것 만으로도 그를 거침없이 탐했는데 두 걸음 멀어지기라도 한다면 과연 저는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을 지, 끔찍했다.




 신에게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의 생각이 지나치게 강해 그 모든 고뇌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여에게 전부 전달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여는 신에게 잠식되었던 몸이 천천히 열기를 뱉어내는 동안 성북구를 엉망진창으로 박살내는 신을 모른척 하고 있었지만, 제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란 것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밀린 업무를 마저 처리한 뒤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고는 신이 누워있을 방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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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