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가버스 중의 연작. 취향이 아니라면 지나가세요.
모처럼 휴일이었다. 전날 밤 늘어지게 자다가 업무 시작시간도 넘긴 시간에 밍기적거리다 일어나 하품이나 하고 이불 속에서 한 삼십 분 쯤 더 보낼 생각에 한참 들떠 있던 여는 오랜만에 지인들을 불러다 원없이 술을 부어댔다.
흐억!
일단 용케 돌아왔다 싶을 걸음걸이로 집에 돌아와 낑낑대며 양말만 겨우 벗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던 것 까지는 완벽한 휴일 일정이었는데, 한참 이른 때인 게 분명한 시간에 심장을 강타하는 진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혼이 다 놀랄 울림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셔츠부터 외투까지 단추란 단추는 하나도 안 빠지고 다 잠긴 채 잠든 바람에 전화를 알리는 진동이 가슴 언저리에서 지치지도 않고 울리는 중이었다.
"뭐야, 누구야."
꿈에 젖었던 여를 현실로 불러오는 21 세기 식 심폐소생술을 받은 여는 그날 새벽에 컨디션 한 병만 믿고 달렸던 사람 답지 않은 속도로 외투 안 주머니를 뒤졌다. 신보다 더 익숙한 이름이 될 뻔한 이름이 찍혀 있었다. 평소 직접 연락하기 보다 신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그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이왕 전화할 거라면 두 시간만 늦게 하지. 그는 투덜대면서도 착실하게 화면을 밀었다.
여보세…… 큼, 크흠. 여보세요……?
그가 알기로 제게 연락을 준 사람은 중요한 일이 터진 게 아니고서야 맥락도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 제 이야기를 퍼부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예의와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선 자리에 직접 나왔다면 두말 않고 결혼을 진행했을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 싸웠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화면 너머로 대뜸 쏟아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제 자신을 정돈했다. 머리 위 사정은 폭탄 맞은 까치 집이어도 옷 매무새는 정비했다. 어지러워 정신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말 한 마디라도 놓칠까 이어폰을 연결했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대대로 정계를 휘어잡아 온 가문의 철칙이었다.
선 씨?
써니요.
아, 예. 써니 씨.
방금 일어나셨나 보네요. 기다린다고 기다린 건데.
여는 대화 몇 가닥 만에 그녀에게 머릿속이 채 정리가 안 된 제 자신을 통째로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신은 제 계획에 선을 포함시켰다. 신과 여가 바라는 대로만 상황이 흘러가 준다면 여의 옆은 결국 선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어질 인연은 이어지나봐. 신이 제 동생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선을 소개한 날, 첫 순간에 선이 한 말이다. 그때 맞은 편에 신과 함께 앉아 있던 여는 살짝 웃었다.
죄송합니다. 어제 과음을 해서요…….
나야말로 미안해요. 상황이 좀 급해서.
평소에 연락 잘 안 하시는 분이신 걸요. 사정이 있으셨겠죠.
여는 선에게 기꺼이 제 미래를 맡길 수 있겠단 확신을 받았다. 그녀는 신과 살고 있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보장받을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고, 제가 바라보는 앞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사람의 곁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그는 그런 제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런데, 누가 누구랑 싸웠길래 연락을 주신 건가요?
그런 선이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오빠랑 그 애랑요. 여기까지 와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데, 좀 데려가요.
혹시 은탁이……. 은탁 씨 한테 따로 연락 없었나요?
설마, 연락은 했겠지. 가볍게 생각한 여는 폭탄 하나를 더 맞았다.
네. 전혀.
…금방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는 제 몫으로 빼둔 휴일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부족한 인원수로도 기득권을 잡게 한 3차 성징을 마친 사람 특유의 감각이 그렇게 일러주고 있었다. 술 마실 때나 좀 말리지. 억울함에 통화가 끊기자 마자 폭탄 맞은 까치집에 폭탄 하나를 더 터뜨린 그는 털레털레 일어났다. 이 꼴로 밖에 나다닐 수는 없었다.
세 시간 뒤, 때 빼고 광 낸 여는 선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에 들어섰다. 저택의 주인이 알파나 오메가라면, 손님도 알파나 오메가인 경우 몇 배는 신중하게 걸음해야 했다. 주인이 초대했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방문 자체가 주인에게 실례이기 때문이다.
"가주님은 어디 계신가요?"
배우자가 있고 함께 생활하기라도 하면 더더욱 그랬다. 한 저택에서 알파나 오메가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건, 저택 밖에서라면 충분히 자제할 향이나 충동을 배우자와 함께 풀겠다는 뜻을 비치는 것이다. 그런데 제 3의 누군가가 그 안에서 머물다 간다면 한동안 향이 저택 내부에 남을 것이고, 그 향이 다 날아가기 전 까지는 그들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셈이다.
"아버님이요?"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선은 가족 정도라는 걸 제 부모님을 뵙기 위해 본가에 갈 때 마다 느끼는 여로써는 곧 가족이 될 예정인 가문의 저택이라 해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잠자코 선의 뒤만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를 안내하던 선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도 헷갈려 하며 잠시 뒤를 돌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바싹 굳어 있었다.
"어머님이랑 같이 휴가 내시고 별장 가 계세요. 한동안 안 오신다고 연락도 왔구."
"아, 네."
"2층만 안 가시면 돼요. 거긴 전부 부모님이 쓰시니까."
시선을 돌리며 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긴장 풀라는 소리를 곱게 돌려 말하는 선의 배려에 그는 역으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런 그를 본 선은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었지만 타고난 절제력으로 제 충동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는 교양있는 알파로 여를 대하고 있었고, 여와의 결혼에 거부감을 비치지도 않았다. 여는 그런 선을 보며 신과 모종의 거래를 마친 뒤일 거라 짐작했다.
"저 방, 보여요?"
그녀는 1층 안쪽 방을 가리켰다. 입구에서 왼 편으로 시야를 돌렸을 때 방문 몇 개를 지나면 나올 방이었다. 여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은 다른 방과 다를 바 없는 짙은 등나무 빛을 띠고 있었지만 문 너머의 익숙한 향 만큼은 오늘 저택에 처음 온 그도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저기예요. 통 나오지를 않네."
원래 저러던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불안해서. 부탁 좀 할게요. 선은 말을 마치고는 오른 편으로 발을 돌렸다. 여지 한 줌 없이 칼 같았다. 자연히 여만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저택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저택에 사는 사람도 신과 선 말고는 전부 공적인 자리에서만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 뿐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선을 불렀다. 저, 써니 씨.
"네."
"은탁 씨 데려오는 게 제일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불러와도 될까요?"
"오란다고 오겠어요?"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곧게 걸어가선 김 신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선의 방인 듯 했다. 이 이상의 도움은 없을 거라는 단호한 의사표현에 여는 할 말을 잃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신이 알파 특유의 감각으로 그녀와 제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남았을 걸 알면서도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 방 안에 있는 그를 부를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똑똑, 낮고 깊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왔냐?"
여는 속을 쓸어 내렸다. 문 너머의 제 향을 맡을 정도라면 선이 우려한 것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저와 이야기 할 의지도 있는 것 같았다. 곧 화해하고 계획을 이어 갈거란 생각에 긴장이 풀린 그는 선과 함께 있을 때보다 한결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들어가도 돼?"
"거실 가 있어. 금방 갈게."
"거실이 어딘데?"
팅, 통, 퉁,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리저리 튕기던 말이 잠시 끊겼다.
"몰라?"
"모르지. 처음 와 보는데."
같이 산 세월이 길었고 지금도 동거하는 처지라지만 엄연히 그는 신의 본가에 처음 온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신은 그를 안내하기 위해서라도 밖에 나가야 하는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곤 선을 떠올렸다. 늘 치밀한 그녀의 예리한 한 수였다. 부르는데 안 나온다고 제 발로 걸어나오게 만들 줄이야. 신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면서 허, 빈 웃음을 냈다.
가신으로 유 가를 둔 선의 가문은 가주의 직계 자손인 선과 신, 모두가 알파로 발현하는 바람에 네 가족 중 가주의 반려만 오메가였다. 가주는 세 알파 사이에서 사는 배우자를 위해 때가 되면 둘 만의 휴식기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다.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여에게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들렸던 건 제 오메가의 곁에 유일한 알파로 서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심과 신과 선에게 가문 경영권을 점차적으로 넘기려는 이성적인 의도를 겸한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이번엔 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저택 곳곳에 스며든 세월을 음미하고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저택을 관리해온 김 씨 가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신이 저택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을 보여주겠다며 데려간 방은 창고의 수준을 넘어 작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싸웠어."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고고하게 방 가운데에 서 있는 등잔걸이의 한 기둥에 제 몸을 기댄 등잔이었다. 별 다를 것 없는 모양새였고, 신은 가문에서 제일 아끼는 고려 황실의 물건이라는 이야기만 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검을 보여주겠다며 먼저 몇 걸음을 앞서 나간 순간 그에게는 무심코 지나간 그 등잔이 흥미 거리가 됐다. 궁금한 게 많았다. 불을 붙여본 지는 얼마나 오래 된 거지. 기름이 들어있다는 건 매일같이 갈아준다는 걸텐데. 거기에 열이 옮겨붙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판 추측만 할 수 있는건 저와 신의 관계와 똑같았다.
"그건 알아."
신은 어떤 물건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정작 그에게는 등 뒤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여로써는 신의 눈을 보지 않고서는 그의 진심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가 궁금한 거지."
"사귀는 사이에 싸울 수도 있지."
그리고 신은 늘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 사람 이었으므로, 이번에도 화제가 바뀌기 전 까지 그의 눈을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 애랑 싸우기는 왜 싸웠는지, 이 등잔은 김씨 가문에서 왜 소중한 건지, 안전한 줄 알았던 둘의 사이가 왜 나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무슨 대답을 들어도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근거가 없었다.
"뭐부터 볼래. 청자?"
"집 나갈 정도로 심각한 적은 없었잖아."
청자는 이미 이야기 할 이유가 없어진 듯 했다. 선 곳 마저 막다른 곳이었다. 그는 깊게 한탄했다.
"그래."
"집에서 한 자리 달래?"
"아니. 걘 그럴 가족도 없어."
"……몰랐는데."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던 그녀의 가정사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는 상황은 영 탐탁지 않았다. 안면을 튼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자신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던 은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 좋은 방향으로 있을 거라 어느정도 짐작한 여는 그녀의 이야기만 들었지, 그 주변의 이야기를 캐묻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도 이해를 못 하겠는 건.
"그렇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돼?"
오히려 가족이 없는 경우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가문의 시작을 제 가문의 자손으로 시작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한 가문의 시조가 나온다는 명예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신의 가문도 그럭저럭 호의적인 편이었다.
"아니. 차라리 그런 문제였으면 좋겠는데."
신이 웅얼거렸다. 저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잘 들리지도 않아, 그는 신을 불러 세웠다.
"안 들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야?"
그와 떨어졌던 세월 동안 사람이 크게 바뀌지도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그런 그가 아는 김 신이란 이런 상황을 겪을 가능성조차 없는 사람 이었으므로, 이제는 둘 간의 관계도 관계지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말을 제 스스로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네가?"
자기 자신보다 가문을 더 먼저 생각해서? 그렇게 중요한 가문보다 은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 못해 제 선자리까지 나왔던 사람에게 믿음을 못 가진다는 게 말이 되나? 김 신의 이름 자가 울 판이었다.
"그 애, 의지를 안 해."
"너를??"
들으면 들을 수록 가관이었다.
"네가 그때 그랬었잖아."
"나 뭐."
그와중에 뜬금없이 불려나온 제 존재가 이질적인 것 까지 완벽하게 혼란 그 자체이기까지. 둘 만의 관계여야 할 이야기에 제가 끼어드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게 싫어 은탁의 3차 성징만 기다리고 있는 제 목덜미를 잡아 채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헤어진다 어쩐다 했던 거. 기억 안 나?"
하지만 이래서야, 빠져나갈 수가 없다.
"너 설마, 내 탓이라고 말하는 거야?"
"네 탓은 아니고 그냥. 알파와 베타의 관계는 항상 불안해."
"불안할 게 뭐 있어. 억제제 다 들고다니는 세상에."
"러트가 갑자기 당겨지기라도 하면? 우린 아직 각인이 불가능 한 관계인데?"
그들도 결국 인간이었다. 이제는 제도권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3차 성징기를 거쳐 발현된 형질은 사회에서 특출난 강점이라는 걸 알았지만 러트나 히트 사이클이 오는 순간 그 전까지 얻었던 이점이 전부 약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구조까지 전부 배워 알고 있었다. 3차 성징기를 거친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회를 따로 만들 정도로 폐쇄성을 가지게 된 건 이런 이유도 있다.
"괜찮다고 쳐. 은탁이 걔, 발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보다 나랑 연애하는 것부터 알려졌어."
발현 가능성 이야기 나오기 전 까지, 그 애가 고운 시선 받으면서 다니기는 했던 걸까? 어디를 다니더라도? 지 은탁이라는 사람이 발현이 예정되어 있는 베타라는 게 알려지기 전에 그녀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일들을 신은 알지 못했다. 어쩌다 알아차려도 은탁은 그 모든 걸 신의 곁에 선 저에 대한 질투로 단정지었다. 맞는 판단이었다. 신도 알았다. 하지만 애정 관계란 항상 옳은 판단만 하기 위해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늘 정답일 수는 없으니 간혹 틀리는 순간이 와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연인이었다. 적어도 신에게는 그랬다.
"난 그 애가 이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격이었거든."
그는 은탁이 이별을 이야기할 때 덜컥 충격을 먹었던 제 자신을 떠올렸다. 과거의 저라면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을 제가 어느새 신과 같은 방향으로 그 일을 바라본다는 걸 알았다. 신은 등잔을 보고 있었다. 불 한 줌 붙지 않은 잔이 신과 여, 둘의 시선을 전부 받고 있었다.
"그런데?"
"차라리 너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해도 사귀는 나한텐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이 없어."
한 번도 그애가 힘들다고 털어놓는 걸 본 적이 없어.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관계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신은 그날 여의 한 마디로 그녀와 연인 관계를 시작했던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가 자신에게 집착한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베타의 기준으로는 건전한 관계였고, 알파나 오메가의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말라붙어 버석한 관계였다.
"단 한 번도."
베타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의미가 없는 건가, 아니면 알파와 오메가의 그것이 과도하게 많은 의미가 있는 건가. 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할 고민과 맞닥뜨렸다. 알파로 각성을 끝내가던 신을 마음에 품은 스물 몇 살의 베타 왕 여의 사랑은 당사자조차 희미해져 추억으로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정략 결혼이었던 신의 부모는 알파와 오메가 간의 결합이라는 안정성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부부로 살아온 데다가, 제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서도 배우자를 위해 거처를 옮겨가며 배려하는 기저에 정만 깔리는 게 아니라 사랑과 집착을 같이 깔아 대한다.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여는 둘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과 은탁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건 형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라면 차라리 두 사람 모두 인간인 게 문제였다.
"난 아닌데, 은탁이는?"
애초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확실하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온전한 관계란 건 불확실성을 건드리지 않는 관계를 뜻한다. 그렇기에 안정적이고, 그렇기에 위태롭다. 그런 둘의 사이에 여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관계에 작은 불씨 하나를 던진 셈이 됐다. 여는 그제서야 제 한 마디가 어디까지 상황을 만들었는지 완전히 알았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냐. 그냥……."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터지지만 않았다면 무사히 발현한 은탁과 그런 은탁의 곁에 섰을 신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영원히 얌전할 등전 안 기름도 주변을 지나가던 잔불 한 줌과 마주치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자신을 목숨 째로 불사르는 것 처럼.
그들의 냉전은 생각보다 길어져 은탁과 선이 여의 주선아래 처음 만날 날을 한 손으로 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여는 두 사람의 만남을 준비하면서도 신에게 그날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아예 신과 은탁, 둘의 관계에 대해 그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써니 씨, 왕 여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은탁 씨 소개 말인데, 이번 주 목요일 괜찮으세요?
오히려 그런 그에게 신이 다가와 부탁을 하고 갔다. 이대로 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인연이 끝날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네 :D 여섯시 반이죠?
장소도 예약하고, 시간도 잡고, 약속까지 잡아 전송 버튼도 터치했지만 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곧 결혼할 사이끼리 관계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다면 신을 데리고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선과 은탁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려 한다면 십중팔구 약속은 파토였다.
네. 그때 뵙겠습니다 :)
몰래 데려갈 것인가, 데려가지 않을 것인가에 관한 저울질이 끝나지 않는 이유였다.
은탁아 목요일 괜찮다고 했지
ㅇㅇㅇㅇ 비워놨어여
ㅇㅇ 그날 보자 써니씨랑 같이 갈게
헐진짜요? 아 떨렼ㅋㅋㅋㅋㅋ
선은 그 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은탁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고, 은탁은 선을을 짝사랑이라도 하나 의심할 정도로 대놓고 들떠있었다. 이런 둘에게 대뜸 신을 데려간다면 제가 남아나지 않을 건 확실했다.
오늘부터 팩 쎈거해야겠다 나 완전 잘보여ㅑ댐
선보냐
먼 선이에옄ㅋㅋㅋ 선보다 더중요하짘ㅋㅋㅋㅋㅋㅋㅋ
"얘기는 잘 돼가?"
"어. 목요일."
그렇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신과 15 년을 넘게 같이 산 친구 딱 한 번만 눈 감고 좀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맴돌고 있었다. 일 자체는 훨씬 말끔하게 풀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지. 말 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 여에게 신이 다시 물었다.
"몇시, 어디?"
세월이 무거워서 그랬을까, 그 중 5 분의 1 간신히 채웠던, 이제는 기억조차 의심이 가는 왕 여의 사랑이 아까워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면 은근하게 제 향까지 풀어가며 절박한 심정을 티내는 그가 안타까워서 그랬을까. 여는 눈 딱 감고 대답했다.
"여섯 시 반, 늘 가던 곳."
같이는 못 가. 적당히 시간 벌려놓고 와. 몇 마디씩 말을 덧붙였지만 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다."
여는 채널을 돌렸다. 뉴스, 봤던 거, 재방송, 재미없는 거, 기타등등, 기타등등. 영 볼 만한 게 없었다. 그는 버튼 하나를 더 눌렀다. 삐롱. 방금 전까지 화면에 온갖 색을 쏘아대던 TV가 눈을 감았다. 그도 눈을 감았다. 향은 또 왜 안 걷고 가, 저거.
예의를 아는 사람 간의 만남이었고, 말끔한 사람 간의 만남이었다. 선이 은탁에게 무조건 네 편이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한 게 만난 지 두 시간 조금 더 됐을 무렵이었고, 은탁이 선의 부케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건 그 뒤로 이십 분 쯤 뒤의 일이었다. 여가 그 모든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는 은탁이 자로 잰 듯 삼십 분에 한 번 화장실에 가선 십 분 남짓 돌아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은탁이, 어디 아픈 곳 있어요?"
"항상 건강하던 애라 저도 잘 모르겠어요. "
그는 말끝을 흐렸다. 저 건강 빼면 시체거든요. 완전 튼튼! 은탁이 저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신이 아직 오지 못했지만, 은탁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그도 제 사정을 이해해줄 것이었다.
"오늘은 좀 빨리 헤어지고 다음에 한 번 더 시간 내셔서……."
"지 은탁씨 일행 분, 계십니까?"
선과 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본능에 적신호가 켜졌다.
"잠시 따라 오시겠어요?"
큰 일은 아니어야 할텐데, 중얼대면서도 어느 한 명 괜찮을 거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큰 일이 아니라면 지배인 까지 불려나와 그들을 데려갈 리가 없었다. 이 쯤 되고보니 둘은 은탁이 어디에 있건 최대한 빨리 상황을 봐야 겠다는 생각과 조바심만 남아 발걸음만 급해졌다. 얼마 지나지않아 둘은 화장실 바로 옆, STAFF ONLY 팻말을 지나 은탁을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아파요? 나, 나 지금 심장이. 심장이 너무 아파요."
제 몸, 그중 심장 부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은탁은 깊고 두꺼운 고통 한 굴레만 진 채 동공을 점점 키워나갔다. 한 알파와 한 오메가는 단번에 눈치챘다. 시작이었다. 나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덕분에 대비하지 못한 발현 치고는 천운 중 천운이었다. 선은 가문 전속 주치의에게 급히 연락을 넣었다. 여는 근처에 대기하던 제 사람 몇을 불러 차를 준비시키는 한편, 신을 불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말 잘 들어, 지 은탁. 너 지금 발현하려는 거야."
"막, 너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기분 내고 왔다며 발간 빛으로 덮여 있던 은탁의 뺨이 창백하기 질리기 시작했다. 발현에 동반되는 고통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고통에 못 이기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한 쪽으로 온전히 발현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두 사람은 견디라는 말도, 참으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병원 가자. 사람 금방 와. 일어날 수 있겠어?"
"못 하겠어, 못 해. 못 해요. 아파 죽을 것 같아."
"기대. 한 층만 내려가자."
여는 은탁을 부축했다. 선은 이미 여의 수행원들을 찾아 내려가고 있었다. 지배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 그들은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의 수행원들과 김 씨 남매를 발견했다.
"데려가요."
수행원에게 은탁을 인계하고 서둘러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늦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두 사람 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안 가면"
늦어요, 까지 말을 이으려던 여는 두 남매에게 각각 손목을 붙잡힌 채 멈춰섰다.
"기다려요."
"같이 가야지, 왜 이래요."
"쟤 말 맞아. 기다려."
왜 자꾸 잡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그는 둘을 모두 뿌리치고 달려갔다. 그 다음에 있을 일을 직감한 둘은 어떻게든 여를 말리기 위해 덩달아 달렸다. 갓 발현하는 시점이 되면 심신 모두 진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러면 상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 제 형질과 반대의 형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끌어당긴 뒤 향을 내뿜는다. 3차 성징을 겪는다는 건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향을 내뿜는 것 등을 조절해나가는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충동 조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발현이 가까워지면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충동 조절을 못 하니까.
은탁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신과 선이 아닌 여에게만 반응이 온다는 건 그녀가 알파로 발현할 것이고,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오메가인 여를 통해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는 의미였다.
"멈춰!"
여는 기어코 은탁의 근처까지 도착했다. 누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 그만큼이나 그에겐 급박한 일이었다.
"나 왔어."
"도……."
"이제 괜찮을 거야."
"도망가요."
"…지 은탁?"
그녀가 제 향을 처음으로 풀어내려던 그 순간 수행원 한 명이 급히 차 문을 닫았다. 이런 일에 대해 잔뼈가 굵은 사람들만 데려온 덕분에 최악의 불상사는 막은 셈이다. 하지만 그녀의 향은 이미 그 주변에 번져 버렸고, 우성인 것이 분명한 농도로 번진 덕분에 바로 곁에 있던 여가 호르몬 과다 노출로 혼절하는 것 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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