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작 외전. 묶임.
"도깨비."
고요했다. 진남빛 바람이 연초록 잎새가 스며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한 뜸 한 뜸,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더 귀를 기울여보면 숨을 쉬지 않아도 살 두 존재의 숨소리까지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가 둘이라는 건 집터 안에 도깨비가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는건 지금 김 신이 왕 여의 앞에서 없는 척을 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전히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도깨비."
있는 줄 아는건가? 없는 척 계속 해야 하나? 그의 이야기는 속도 모르고 여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됐다. 아는 사람은 듣는 사람 뿐인 것 까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이대로 가다간 당사자 둘만 몰라 지지부진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여는 한 번 더 숨을 고른 뒤 통보했다.
"들어간다."
현직 저승사자 버릇 못 버릴테니 이름 세 번은 부를 거라고 생각한 신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쥐고 있던 메밀군을 놓쳤다. 여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덜걱.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음이 도깨비를 숨겼다. 때아닌 방해공작에 여의 볼이 부풀었다. 뭐야. 문 잠궜어? 덜걱덜걱. 몇 번을 돌려도 똑같았다. 덜걱덜걱덜걱덜걱.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도깨비의 언어까지 대신할 판에 여의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그는 명계에서 빌린 능력으로 신의 방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제 방에 들어가 만능열쇠를 꺼냈다. 짤강. 어딘가의 방울 소리 같기도 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제 방 안에서 빙빙 돌던 신은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혼비백산 문앞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직접 잡았다. 덜컹. 방금 전과 다른 소리였다.
"뭐야."
여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씨름했다. 잠긴 게 풀리긴 했는데 돌아가질 않았다. 문 뒤에서 문고리를 잡고 놓지 않는 도깨비 때문이었다. 동거 차사 못지 않게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한 그가 저 없는 척 까지 포기하며 여를 거부하고 있었다. 여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렇게까지 거절하는 이에게 억지로 이야기를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 오늘은 물러서는게 나을지도 몰랐다. 짤강짤강, 짤강. 이대로 뒤돌아서 제 방으로 돌아가면 방금 있었던 일은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내가 열까, 네가 열래.
하지만 여는 마음을 열었다. 공기의 울림 없이 다시 한 번, 통보였다. 들여야 하는데. 들여야 하는데……. 투명하게 들리는 방 너머 목소리에 홀린 탓이다.
"……."
신은 언제부턴가 제 머릿속에 드문드문 찾아오던 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필 이 때일 건 우연인가, 운명인가. 답인가, 질문인가. 신은 눈을 눌러 감았다. 잊지 않기를. 세월이 지나도 한끗도 변하지 않을 목소리였다. 모든걸 지고 가는 주군에게 신하된 자이자 그를 연모하는 이로써 어떤 모습을 보이고 남길 것인가?
문이 열렸다. 열린 틈을 비집고 솜 뭉개지는 소리가 새다가 곧 종적을 감췄다.
여는 그의 방에 들어서자 마자 신의 침대에 걸터 앉았다. 방바닥에 대자로 엎어진 메밀군을 주워 원래 있던 자리에 잘 세워놓은 그는 무의식적으로 옆에 앉으려다 제 침대에서 느껴질 리 없던 냉기에 놀라 펄쩍 뛰었다.
"말 좀 할까."
신은 펄떡대는 제 심장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눈길을 피하느라 고개를 돌렸다. 이름 자 그대로의 검은빛 눈빛이 전깃불을 뚫고 신의 눈 너머를 꿰뚫었다. 신의 경계선에 들어선 건 신이었지만 신처럼 구는 건 눈앞의 사자였다. 늘 그랬다. 그는 신이 무신으로 떠받들리던 시절부터 제것이되 제것이 아닌 권능 만으로도 신을 무릎 꿀렸다.
"어, 엉."
"들을 게 많은데."
천지가 뒤집혔지만 신은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매 번 적당한 때에 적당한 기회를 잡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다면 그건 김 신을 찾을 문제가 아니라 오늘도 어딘가를 푸드덕대며 날아다닐 나비의 흔적을 찾아야 할 문제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살아온 생이 제게 자비를 베풀기를 간절히 바라며, 신은 간신히 대답했다.
"……어디서부터 들을래. 그…… 처음부터?"
"아니. 방금 한 소리부터."
하지만 첫 마디부터 이럴 줄 알았다면 신은 맹세코 그를 방 안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잡귀라도 들렸어? 뭘 듣고 있는 거야? 그것도 내 목소리로."
듣긴 뭘 들었다고 그래. 신은 저도 모르게 입을 거치지 않고 여를 다그챘다. 순간 톡 퉁긴 신의 말이 그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는 표정을 구기며 반문했다.
"잊지 않기를."
야, 그건.
신은 백짓장처럼 허옇게, 발로 딛은 바닥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어떻게 알았어. 네 신념을 듣는 나를, 나 혼자 알 너와 나를, 우리는 아직 아닌 너와 나를, 어떻게 들었어. 따져 물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공기를 울릴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점점 더 험악하게 구겨지는 여의 얼굴과 마음에, 신은 급기야 풀릴날이 먼 서리가 다 되어 여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순간, 그는 불쑥 제 얼굴을 내밀었다. 기겁한 신이 한 뼘, 고개를 젖혔다. 여는, 이러려고 평소에 그렇게 차게 다니나 싶을 정도로 뜨거운 속덩이를 신에게 냅다 던졌다.
지금 내 소리. 들리지.
"들리지. 들리는데, 소리가 좀……."
"그날 그 때부터 내내, 계속 이 크기로 들렸거든."
"설마."
네 생각. 토씨 하나 안 새고 다.
신은 차라리 제가 지금 당장 물이 되어 녹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잊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부주의한 도깨비. 언젠가의 저승사자가 친히 도깨비의 머릿속에 찾아와 그를 확인사살했다. 그런 그의 머릿속마저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여는 간단히 평했다.
"칠칠치 못한 저승사자라더니."
……들었어?
들린다니까. 선연히.
"……몰랐어."
"몰랐다고?"
어떤 낯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던 도깨비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아닌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신은 긴장이고, 눈치고, 우정이고 뭐고, 그 어떤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극도로 흥분했던 그 순간을 어렵게 떠올렸다. 마주볼 이를 볼 여유가 없어 눈마저 감은 채였다.
숨이 드나드는 것 조차 신의 몸을 거쳐야 간신히 가능할 정도로 막혀있을 때 쯤, 여는 반쯤 시체인 줄 알았던 몸에 열이 옮겨붙는 줄 알 정도로 신에게 잠식되어 있었다. 간신히 신을 통하지 않은 공기를 맞을때면 한참동안 물에서 빠져나오려 헤엄치다 간신히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민듯 했고, 찰나를 참지 못한 신이 저를 덮어올 때면 끝을 모를 불길이 저를 집어삼키는 듯 해선 몇 번을 도리질쳤다. 불이자 물이라던 신은 그를 애정속에서 욕망안으로 삼켰다. 입고 있던 옷가지는 침대 언저리에 아슬아슬 걸쳐 있었고, 이불 속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신의 혀가 스치는 곳 마다 불거나 부었다. 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남겨두지 않을 작정으로 손끝 부터 씹어 삼켜온 신은 여의 양 쇄골에 제 흔적을 깊게 새긴 뒤에야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 경고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어 안달이 난 그 순간 조차 끝의 끝까지 제 욕심을 억누르고 신은 한 번, 그를 기다렸다. 나는 이 이상 멈추지 않을 작정인데, 너는 어떻게 할래.
말은 숨이 가빴고 생각은 전달이 적나라했다. 여는 홀린듯 몸을 일으켜 신의 목을 끌어 안고 목젖을 핥았다.
으, 음….
오랫동안 움직임다운 움직임 한 번 없던 침대가 그들의 관계에 발맞춰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이상은 봐줄 일 없다는 듯 유두부터 입에 넣고 굴리는 신의 몸짓에 버벅임 한 번이 없었다. 삼킬 수록 탐할 곳만 늘어 제 손에 넣느라 바쁜 자가 하나, 온 몸을 내어주면서도 저를 탐하는 이의 머리칼에 손 한 번 올리지 못해 안달내는 이가 하나. 쭉, 빨아들일 때면 아랫배가 판판히 당겨지는 게 살갗 너머로 적나라해선, 신은 김 빠지는 웃음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 민망했던지
그것 좀, 안 하면 안 돼?
하며 발버둥 치는 여가 있었지만, 그런 그를 덮쳐 누른 이는
안 하면 이걸 왜 해.
하며 그 큰 손으로 여의 옆구리를 살살 쓸었다. 누군가의 틀 일만 남은 입술이 불퉁하니 튀어 나왔다. 싫어? 그만 할까? 관둘 생각도 없으면서 예의상 물어보면 도리도리, 흔들리는 머리칼마저 어여뻤던 그는 제가 받았던 그대로 여의 목젖에 살짝 입술을 내리곤, 살짝 나온 입술이 열린 틈에 제 손가락 몇 개를 벌어진 입에 물렸다. 마음이 급해 허공을 몇 번이고 저은 다음에야 잇몸과 이빨 사이를 꾹 문대어 볼 여유가 잠시나마 생긴 줄로만 알았는데, 츕. 손 마디 마디를 빨아올리는 소리에 눈이 뒤집힌 뒤로는 전부 파편이었다.
아, 안, 돼. 신. 김…신. 아아…….
그와중에 몇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던 여의 모습은 어떻게 그리 강렬하게 박혔는지 파편만 쥐고 있는 신은 잘못을 해도 크게 했구나 싶어 그길로 말도 안 되는 테라피를 시작했던 것이다. 신은 한없이 짧은, 끝없이 뜨거운 그날을 간신히 살리고 눈을 떴다.
너…….
제 침대 한 구석을 차지한 자의 고개가 두 손에 파묻힌 채 바닥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 있었다.
……다 들린다니까…….
신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와중에 스친 눈길이 여의 목덜미를 지나쳐 그때 그 빛깔인 걸 보고 말았다. 이 순간 그에겐 권능조차 죄였다. 그는 차라리 여와 나란히 얼굴을 가리는 쪽을 택했다. 볼 이가 절대자 뿐인 게 안타까울 정도로 진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이성을 놓아버린 뒤로 남은 기억이 주말 드라마 재방영분처럼 부분부분 잘려 있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잘못을 해도 크게 했겠거니, 지레 짐작하고 틀어박힌 신이 제게 안긴 이에게 물어볼 의향만 있었다면야 생각외로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걸 신도 알고는 있었다. 불안함이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알면서 행동하지 못할 만큼 신을 막다른 길에 몰 정도로, 도깨비에게 몇 백년만에 찾아온 기억의 공백은 그렇게나 무겁고 무서운 일이었다. 여의 입장에서야 제게 말을 할 준비도 하지 못한 도깨비의 상태가 매일같이 들려오는 판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 보다는 기다리는 게 더 나았다. 해서 신의 눈길과 손길이 닿은 향초 업계가 때아닌 초호황을 누리는 동안 여는 제 삶을 살며 신을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여에게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는 그 순간의 생각이었지 그의 기억은 아니었으므로, 기억에 구멍이 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이야기를 꺼낸 거였고, 그래서 둘은…….
"괜찮겠어?"
"안 괜찮으면. 방법 있어?"
그날 그 밤, 그 순간처럼 다시 한 번 침대 위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렇지."
"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그를 취해도 괜찮은 걸까. 신의 고뇌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 작정을 하고 신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자신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좀 더 떳떳하게 다가가기 전 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부탁하는 이에게 억지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하질 않아서 그래? 그런 거면 다음에……."
신은 냉큼 몸을 붙였다. 제 감정의 근원이 여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걸 그는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꽃망울이 괜히 핀 건 아니다. 동하지 않았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죄책감에 파묻혀 살다가도 편린이 스칠때면 그를 안고싶다는 감정에 휩싸이는 그였다. 그런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여는 이미 그날의 일을 전부 기억하는 제가 그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 만큼은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실마리를 주기로 마음 먹은 뒤였다.
욕망에 찬 그의 시선이 방황 한 번 없이 그의 밑에 깔린 사내에게 꽂혔다. 꼭 같은 눈길로 마중하며 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엔 기억해봐."
좀 천천히 하고. 그는 제 셔츠에 신의 손을 직접 끌어오며 덧붙였다. 침 삼키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모든 것이 엉겨붙기 시작했다.
잤고, 돌아왔고, 돌아오지 않았다.
꽃샘추위와 기상이변 사이를 넘나들던 혼란에 점이 찍혔다. 봄 내내 변덕의 끝을 보여주던 도깨비가 사는 그 동네도 늦게나마 봄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는 꽃 피는 잎새가 함께하던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나 이제 푸르고 푸를 날만 받아두고 있었고, 평생의 단위가 아예 다른 둘은 바깥이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왼쪽엔 도깨비, 오른쪽엔 저승사자 나란히 나란히 소파 한 쪽 씩 나눠 앉아 음악 프로그램이나 보고 있었다.
"픽미 걔는 이제 안 나와?"
"픽미 걔라니! 그런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아이-오 해체한 지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이 몰상식한 저승사자야! 연기자로 자리잡은지 오래인데도 여에게 여전히 픽미 걔로 불리는 그녀를 위해 신은 이따만큼 쌓인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그 아이가 그 소리 안 들으려고 몇 년을 노력했는지 알아?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실언을 한 여도 제가 말을 잘못한 줄은 알아서 노래 한 곡이 다 지나도록 얌전히 신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앞으로 내 집에서 픽미 걔라는 말 하지마."
신이 그 말을 하기 전 까지만.
"내 집이야."
"내 집이야."
"구 년 맡아줬다고 내 집이 네 집 되냐. 여기가 뭐, 점거만 하면 내 집 되는 네덜란드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계약서가 거짓말 하는거 본 적 있어?"
"너 말 잘 했다. 계약서 한 번 보러 갈래? 결판 낼까?"
"그렇게 말하면 뭐, 겁이라도 먹을 것 같아?"
관계가 요동칠 일을 몇 번이나 겪었지만 둘은 한결같았다. 버튼 한 번 눌렸다 하면 둘을 둘러싼 온갖 것들이 뒤집어지는 것도 여전했다. 바뀐 게 있다면 허구한날 덕화까지 불러다 심판으로 세워놓고 싸워 조금 더 유해하다는 것 정도.
"덕화야."
"삼촌? 언제 왔어요?"
"방금 문 연 참이다."
그나마도 덕화는 유씨 가문에서 둘과 함께했던 가닥이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무슨 말이고 하니, 그는 몇백 살 먹은 둘이 저보다 더 나잇값을 못 할 때 벌컥 역정을 낼 수 있는 주변인으로 살아온 제 경험을 소중히 간직해뒀다가 이럴 때 마다 아낌없이 풀어재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종친회에 이 소식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대번에 무례하다고 한 소리 들을 만 한 일이었지만 그는 도무지 두려워하질 않았다. 믿는 구석이 제가 모시는 도깨비의 바로 옆, 물병 하나 들어갈 거리만 두고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결국 도깨비의 행복을 위해 사는 유가의 사람이었다.
"그래, 덕화야. 계약서 말인데."
"아, 깜짝이야! 끝방삼촌은 또 언제 왔어요?"
"방금. 저자가 문을 열었다."
"예? 문 타고 왔어요?"
이젠 느껴지지 않아도 당연히 있으려니 싶은 그의 존재를 애써 모른척했던 덕화는 슬슬 시동을 걸었다. 행복의 원천을 끼고 나타난 가문의 신이 표정과 다르게 생기에 가득찬 눈빛을 보였다. 제 행복을 티내지 못해 안달이 난 게 분명했다. 그런 그를 보며, 덕화는 오늘도 고운 소리만 해서 보내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데 먹을 것 하나 안 들고 오는데다가 인간의 방법은 절대 안 쓰는 둘에게는 꾸중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 그런데라고 했어요?"
덕화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두 눈은 땡그랗게, 입은 있는 힘껏 벌리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둘 다 티좀 적당히 내요, 좀!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순진하면 어떻게 해!"
사춘기도 아니고 몇춘기예요, 둘 다? 사랑싸움 하고 올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요. 내 눈을 바라봐, 그거 하려고 그래요? 덕화의 목소리가 점심시간을 맞아 셋 만 남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복도에 샐 정도로 울림이 큰 목소리였지만 정작 두 인외의 존재에게 닿은 덕화의 목소리는 하나 뿐이었다.
"무슨 싸움……."
"남사스럽게 그 무슨……."
이제 번듯한 가정까지 꾸린 신의 가신은 꾸중이나 하려던 계획은 던져버리고 울분을 못 이긴 채 소리쳤다.
"둘 다 나가요. 나가! 나 밥먹으러 갈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냐, 하면.
"꼴이 말이 아니네, 도깨비."
"사돈 남말 할 처지가 아닐텐데."
둘은 계약서도 못 보고 쫓겨났고, 멀뚱멀뚱 건물 앞에서 서로만 바라보다가, 에이, 날씨도 좋은데 그냥 걸어가지 뭐,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봄의 끝자락이 여름의 손을 잡고 서 있었고, 그 모습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나날이 오는 것 같기도 해서 서로의 머리칼 위에 실바람이 얹어둔 마지막 봄 몇 장 대신 털어주다가, 우리 데이트나 할까, 하고 말았다. 지하 일 층 백반집으로 도망간 덕화가 알면 그야말로 이모티콘 하나 빼다 박은 얼빠진 표정 그대로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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