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5. 27. 20:49



오메가버스 설정 주의. 니키님께 드립니다.



 신은 한참동안 청소기 헤드를 뺐다 꽂아 가며 끝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방 주인은 졸지에 구름 한 점 없는 저 위에서 마구 깨져내리는 빛, 윙윙거리는 기곗소리, 흙내타령이 끊이질 않는 신의 목소리가 온 천지를 울려대는 판에 결국엔 잠을 잃었다.


"좀 씻고 다녀라."

"자기전에도 씻고 잤거든? 못 본 사람처럼 그러네 아주!"


 신은 졸지에 저를 향해 콕 찍힌 손가락을 멀뚱, 보다가 작게 말했다.


"향이 나는 걸 어떡하라고."




 며칠 전, 영 밤에 잠이 안 와서 하루를 꼬박 샌 그는 소파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누워 눈이 부신 오시, 스륵스륵 감기는 눈꺼풀을 마저 감았다. 잠든 건 한낮이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그는 한 밤중, 휘영청 뜬 달이 한 줌 물 위에 얹어져 있는 광경 앞에 서 있었다.


"잠이 안 오더라니."


 얕게 보면 자각몽이고 깊게 보면 호출이었다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호숫가로 걸어갔다. 김 신은 반신의 존재로서 신과 인간의 사이에 선 중간 관리자로 그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온전한 신들이 그를 불러낼때면 종종 그에 응했다. 인간 여성의 모습을 빌린 신과 만났을 때가 그랬고, 나비의 움직임을 빌린 신과 만났을 때가 그랬다. 


"왔나?"

"꿈으로 다 부르시고."


 개중 주변을 달빛 하나를 위해 꾸며둔 신은 그가 알기로 하나 뿐이었다. 달만 끼고사는 건 아닐텐데 항상 보는 건 달빛 아래고, 필요할때면 용모를 바꾸는 삼신과는 달리 항상 늙은 인간의 몸으로만 나다니면서도 붉은 실 만큼은 언제든지 들고 다니는.


"이 날 달이 참 예쁘게도 떴기에 보여 주고자. 오래 묶여 있을 광경이 아니니 잘 봐둬."

 몇 백년 전의 풍경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반신은 신을 마주했다. 신은 반신을 향해 한 손으로 넥타이 핀에 엮인 붉은 실 한 줄을 살짝 흔들었다. 빌린 외모로도 가려지지 않는 통찰이 보였다. 반신 쯤은 되어야 보이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는 평소의 반신이 아니라 하루 밤을 꼬박 샌 반신이었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롭고 퉁명스러웠다.


"아닌 거 압니다."

"반신다워. 느긋함이 없는 게."


 신은 천 년도 못 살아 본 애송이 치고 영 귀여운 맛이 없다고 생각했다. 


"잠까지 설쳐가며 왔습니다."


 날 때부터 신이셔서 모르시겠지만 반신한테는 있던 느긋함도 다 사라질 일이거든요 이게. 김 신은 나이에 맞는, 혹은 나이에 맞지 않는 투정을 부렸다. 인세에서는 더이상 보일 일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디 허투루 부르던가?"


 달빛 아래에 서 있던 신, 월하는 제 넥타이에 수없이 꽂혀 있던 넥타이 핀 중 하나를 풀어 신에게 건넸다. 거기엔 붉은 실이 같이 엮여 있었는데, 그는 실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통째로 건넸다. 인연을 관장하는 신에게서 실이 떠난다는 건 실에 얽힌 존재가 그의 권속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였으므로, 신은 지금 아직 어린 반신에게 어떤 존재의 운명을 통째로 넘기는 것과 다름 없었다.


"안 그러시던 분이 직무 유기를 다 하시네요."
"반대야. 일 안 한다 뒷말을 하기에 직접 온 거거든. 자네, 경계에서 산 적 있지?"
"네."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누군가의 부름 하나만 기다리던 9 년이 영원처럼 꿈결처럼 지나갔다.

"그 때부터 구하던 건데 영 꼬여서 늦었어. 징하게도 얽혔더구만."
"제 것도 아닌 걸 뭐하러 주시는지."

 노인은 귀찮다는 듯 재차 핀을 내밀었다. 반신은 얼결에 누군가의 운명을 받았다.

"받았으니 이제 자네 거고 자네 권속이야. 자네 일생을 다 돌아 구한 거니 소중히 해."
"저와 얽힐 자의 것입니까?"
"모르지. 이제 자네 손에 있지 않나?"

 하지만 이 향은, 그는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월하의 손짓 한 번에 영역에서 쫓겨났다.

"……."

 순간, 눈이 부신 오시였다. 자고 일어난 건데도 갑절은 피곤했다. 넥타이 핀도, 거기에 엮여 있던 실도 온데간데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핀을 건네받은 순간 누군가의 운명이 제 소관이 됐다는 걸 알았다. 그 누군가가 당장 어제집터에 있었던 이라는 것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실타래에서 익숙한 향이 난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받아도 되는 건가?"

 그는 얼떨결에 여의 인연줄을 받았다. 그 때, 제 운명을 신이 쥐게 된지도 모르고 있던 김 차사는 카페를 나서며 한참 후배를 추궁하고 있었다.



 신은 차사의 인연줄을 받은 뒤, 이전에 비해 제 동거인에 관한 일들에는 몇 배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자각했다. 정도가 심해 당사자가 자기보다 더 민감하게 군다고 타박을 하는 수준이었다. 식사를 함께 하며 머리를 맞댄 결과 문제의 흙내가 그가 얼떨결에 후배에게 등떠밀려 나간 자리에서 만났다던 알파의 향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큰 수확이었다. 

"아직도 나?"
"어."

 하지만 알파의 향이라는 게 한 번 머무르면 일 주일을 넘게 묻어있는 찌든 때 같은 건 절대로 아니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한다면 이틀내내 거슬릴 이유가 없었다.
 다시 난관이었다. 씻고 나와도 그대로였고 향수를 덧뿌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틀 내내 그랬던 것 처럼 셋째 날 까지 흙내를 맡게 생긴 신이나, 그런 그의 생각을 그대로 들으며 고통받을 여나 나란히 노이로제에 걸리게 생겼다. 향을 맡는 도깨비나, 향을 못 맡는 차사나 속이 뒤집어질 미래가 틀로 찍어낸 양 같았다.

"도깨비."
"왜?"
"너. 나랑 어디 좀 가야겠다."
"뭐? 어디 가려고?"

 여는 끝방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됐던 시절 주변을 얼리던 그때 목소리였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제법 오랜만에 서리가 끼는 도깨비 집터를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깨지기 쉬운 것들이 주변에 있었나 머리를 팽팽 돌렸다. 주방과 거리가 좀 있어 다행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이쯤에서 여의 시선을 돌려주기만 하면 세간살이가 얼다못해 터져나갈 일은 없어 보였다. 

"계룡산."

 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으로 코트를 내왔다. 곁에서 장갑을 끼는 차사가 결의에 차 눈매에 날이 서 있었다.

"끝장을 봐야지, 안 되겠어."

 쟤 화 났네. 화 나면 무서운데. 들리기라도 할까 신은 생각마저 조용히 마쳤다. 그는 번거롭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만 할 수 있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평소처럼 다른 향 한 줌 안 섞인 그의 향 곁에서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에게는 그 순간이 중요했다.

"지금 바로?"

 매일 밤, 여의 곁에서 쉬는 그 순간이 은탁을 떠나보낸 뒤의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라도 지탱해왔다는 걸 알았다. 베타였던 은탁에게 끝까지 얻지 못했던 안정감을 그녀가 떠난 뒤에야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는 건 모순된 일이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끝이 없는 일들이지만 그를 진정시키는 대상이 왕 여라는 점이 의혹을 덮었다. 상실을 보상 받는 느낌은 김 신의 생에서 은탁을 처음 알게 된 뒤로 처음있는 일이었다.

"어."

 그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다가가지 못해 한이 된 세월과 과업을 끝내지 못해 죽은듯 살아남은 세월을 전부 알고 위로하듯 다가오는 손길이 징하게도 달았다. 오메가 이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여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에게 이런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왕 여 뿐이었다.
 부작용도 있었다. 이제 그는 여가 업을 진 채 김 차사로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때면 제 손에 죽어 김 신의 반역이라는 죄를 완성시켰을 왕 여 뿐만 아니라 형질이 몸에 자리잡기는 커녕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것들이 완벽하게 다른 세상의 일인 왕 여 까지 함께 상상해야 했다. 그건 제 인생을 대부분 전쟁터에서 보낸 신에게도 제법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

"입구에서 봐."

 모든 이별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조건 하에 저를 반신으로 만든 존재는 그의 외로움까지 빚어낸 셈이 됐다. 오늘 이 순간조차 그의 곁에 찰거머리처럼 잘도 붙어 있었다. 영원한 만남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연을 놓치 못할 자신을 아는 신은, 이제는 거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발 먼저 떠난 여가 남기고 간 잔향을 맡았다. 외로움 만큼이나 질기게 달라붙어 있을 인연이 하나라도 있다면 좀 덜 할까.



 산은 비어 있었다. 산에 오르려는 인간들이 누구의 도움 없이도 화려한 빛을 들인 단풍길 마디 마다 북적댔지만 정작 산세를 돌보아야 할 이무기가 제 터를 비워두고 어딘가로 나간 듯 했다. 그와중에 신은 제 곁의 걸어다니는 흑단나무빛 김 차사가 인간을 볼 때 마다 진저리를 내는 모습을 보며 이번 달 어치 하루야채를 대신 사두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산을 타야 하는 건 둘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심장마비, 추락사……."

 그는 차사의 삶에 몇 안 될 휴일 아침에 무턱대고 깨운 제 행동을 반성하다가 온갖 사인을 줄줄이 외고 있는 여를 보고 놀라 슬쩍 말을 걸었다. 그가 말을 걸 줄은 몰랐던 건지, 여는 물가에서 갓 빠져나온 삽살개마냥 몸을 파드득 털었다.

"주변에 차사 있어? 없는 것 같은데?"
"없어."
"그런데 왜? 향이라도 느껴져?"
"그런 거 아니야."

 자세히 보니 정면으로 마주본다면 압도되는 건 차사가 아니라 인간일 텐데도 여는 풍경을 보다가 인간이 시선에 스칠때면 매번 몸을 떨었다. 눈에 띄는 반응을 하는 여의 모습이 그에게 이상하게 비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손끝 하나 입술 한 번 못 스치는 차사의 몸인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바라보기만 해도 인간의 미래까지 보이는 건가 싶어 그는 재빨리 여의 앞을 가로 막았다.

"설마……. 너도 저 자들의 미래가 보여? 안 그랬잖아."

 인간의 미래를 본다는 건 행보다 불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적어도 신에게는 그랬다. 그는 당사자만 원한다면 인연줄을 잡은 김에 그의 인연을 조절해 권능을 맡아둘 의향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향이라도 살짝 뿜어 그의 생각을 돌릴 작정이었다.

"안 보여. 그냥 막막해서 그래."
"이무기? 기다리면 오겠지. 자기 집터잖아."

 다행인 건 그의 짐작이 들어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가 외투를 정돈하며 말을 이었을 때,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 잡혔다.

"그거 말고. 같은 일을 삼백 년 쯤 하다보면 보이는 게 있어서."
 
 도깨비 생 천 년차가 다 되어가는 자의 앞에서 삼백 년 경력을 대는 차사가 제 곁에서 당분간 계속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니까 뜬금없이 저 자에게 섞여든 이 산의 향만 쳐내면 다 해결될텐데. 신은 여전히 저만 불편해하는 여의 향을 고동빛 흙더미에서나 날법한 향에서 몰래 분리해볼 겸 앞장 서면서 제 향을 슬쩍 뿌렸다.

"단풍나무 이파리에 붉은 기만 돌아도 다 알아. 좋은 철 다 갔구나."
"좋은 철은 언젠데?"
"없어."

 그러나 신의 의도는 말끔히 비껴갔다. 여는 제게 난다는 이무기의 흙내는 몰라도 그의 향은 알았기 때문에, 그의 향이 남아있는 곳은 쏙쏙 피해가며 따라 붙었던 것이다. 그런 여를 눈치챈 도깨비는 점점 향이 넓게 퍼지도록 더 진한 향을 더 자주 뿌리기 시작했다.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더니 평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여의 곁에서나 내보일 정도의 농도에 가까워질 지경이었다.

"좋은 철, 오게 해줄까?"
"네가? 저승사자한테?"
"할 수 있어."

 뭘? 점점 진해지는 향을 눈치챈 여가 페도라를 쓰고 공간을 뛰어넘어야 할지 고민하며 물었고,

"네 인연을 건드리는 거."

 그는 제 심정과 향을 꾹꾹 눌러담아 대답했다. 

"어떻게, 월하께서 직접 인연줄을 다루시는데."

 여는 코웃음을 쳤다. 신과 반신의 차이는 반신과 인간의 차이 만큼이나 격차가 크다. 이리재고 저리재도 월하의 권능이 도깨비에 비해 훨씬 강하다는 뜻이 된다. 김 신이 다른 신들의 호출을 받을 때 순순히 불려가는 건 귀찮은 일이 더 많이 생겨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제로도 존재간의 격차가 유의미하게 나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시던데."
"뭘?"
"네 인연 줄."

 그런 존재인 월하에게서 인연줄을 받아왔다고 주장하는 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낱 저승사자의 권한 만으로는 김 신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제 인연줄에서 김 신, 두 글자를 분리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서, 여는 차라리 그가 거짓을 말했길 바랐다. 김 신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눈에 그 광경을 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꼴을 보느니 당장 방 빼고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게 왕 여의 정신을 지탱하는 데에는 훨씬 더 나을 게 분명했다.

"말도 안 돼."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만일 신이 정말로 왕 여의 인연줄에서 자기 자신을 분리했다면 계룡산을 탈 이는 둘 중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필요하면 말해. 인연줄에 생명 한 줄 엮으면 될 것 같은데."
"내가 마리아야? 혼자 낳게?"
"마……."

 신은 우뚝 멈춰섰다.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차사의 코가 그대로 신의 등과 인사하며 모자와 한 세트로 자비없이 처박혔다. 모자 하나 간신히 잡아챈 그는 고개를 번쩍 들며 틱틱댔다.

"왜 갑자기 멈춰?"
"네가 그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인력 지원 간 적 있어."

 그는 제 모자를 탈탈 털어 다시 썼다. 메이드 인 헤븐, 끄트머리에 붙은 표딱지가 펄럭였다. 두어 번, 허공에 탈탈 털기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구김이 사라졌다. 신은 뒤를 돌아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차사들이 모자를 드라이크리닝까지 맡겨가며 관리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너희도 달라붙었어?"
"그 많은 순교자들을 그쪽에서 다 어떻게 처리 해?"

 인력난 앞에는 치외법권도 망자 우선권도 없다. 하기사, 그는 신의 누이에게 어필을 한다며 컨셉을 천사로 밀었던 자다. 그런 그가 마리아를 모르면 그것만큼 모순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여튼, 새 생명은 됐어."
"애는 별로야?"
"차사 업무도 있고, 굳이 인연을 이을 거라면……."
"?"

 반려의 인연을 이어줘. 방 빼고 나가라고 하면 나갈 테니까. 여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모를까, 제 입으로는 말할 생각이 없었던 이야기를 하게된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재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질 나쁜 꿈일 거야. 아닌 걸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나간, 다고."

 그때, 여가 제 현실을 부정하느라 바빴던 그 때, 신의 말을 듣고 그냥 해본 소리라는 말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뭐라고?"

 아니면, 산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도 별 소득이 없었던 그 순간에라도 늦게나마 제 진심을 숨겼더라면 어땠을까.

"아니야."

 그랬다면 그의 뱃속에 도깨비의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재를 불러 저와 비슷한 나이대의 영물을 소개해달라 말할 수도 있었고, 딱히 그의 인연줄을 건드릴 생각도 없었던 김 신이 혼자만 맡던 향의 주인이 진실로 왕 여와 깊은 인연을 가질 수도 있었다.

"싱겁게."

 그가 징하게 맡아온 계룡산 이무기의 향은 저승사자 왕 여의 몸에 밴 향이 아니라 신이 들고 있던 의 인연줄에 밴 것이었기 때문이다.








Posted by _zlos
Goblin2017. 5. 17. 01:14



 오메가버스 설정 주의. 니키님께 드립니다.



 여는 끝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먼저 한 손에 들고 있던 페도라를 먼저 건 다음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 다음,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머리를 툭툭 털어 눌린 부분을 살짝 풀며 의자에 앉은 그는 종이를 꺼내 단단히 고정해둔 뒤 잘 닫아둔 먹물 든 병의 마개를 열어 작은 벼루에 부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붓을 들어 글을 한 줄 썼다. 


 도깨비의 아이를 뱄다.




 꼬박 구 년만에 인간의 부름을 타고 속세로 돌아온 한 수호신이 있었다. 인간 출신이기에 성별이 있었고, 여와는 구면이었다. 돌아오더니 늦게나마 행복을 찾아가던 그의 발걸음에 남몰래 복을 빌기도 했던 차사는 그의 부재를 홀로 견딘 자기 자신의 세월은 못본 척 넘겨버렸다.

 한참 스물 아홉의 은탁과 행복한 삶을 살던 신을 지켜보던 여는 일, 이년은 예전에 넘겨버린 제 외사랑도 드디어 그 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도깨비 내외는 늘 행복해보였다. 이런 둘이라면 문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등을 돌릴때면 그의 등 뒤를 따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누구든 나 좀 헤집어 줬으면 좋겠다.


 그럴때면 그는 오메가로써의 형질이 알파 형질을 찾고 있는 것이겠거니, 애써 넘겨냈다. 김 신은 도깨비가 되면서 알파 형질이 순식간에 개화한 경우에 속했고, 왕 여는 차사직을 너무 오래 맡은 탓에 오메가 형질이 몸에 막 자리잡기 시작한 사이에, 은탁은 그 어느쪽의 형질도 반응하지 않는 베타로 살았다 보니 집 안에 알파는 신 뿐이라서 그를 욕심내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애초에 여는 그들의 사랑이 형질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운명은 늘 그렇듯 그 집에 산다 싶으면 하나같이 얄궃게만 찾아왔다. 신과 은탁은 형질의 벽은 넘었지만 생사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도깨비 신부는 서른을 못 넘기고 페도라를 쓴 여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없었을 생을 억지로 늘린 셈이라 언제 죽어도 장수한 것이 되는 그녀의 생은, 그 끝을 자기의 선택으로 매듭지으며 신에게 기다림의 굴레를 다시 씌우고 말았다.


"금방 오겠지."


 지칠대로 지친 신에게 말버릇이 하나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 신부조차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긴 인연으로 내린 누군가를 원망이라도 했다면 좀 나았을까, 그에게는 이제 그럴 힘 마저 남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여는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둘은 마침 알파와 오메가였고, 오메가 형질은 알파 형질과 반응해 쌍방을 안정화하는 특성이 있었다. 해서, 언제부턴가 집 안에서 신이 여를 향해 양 팔을 벌리면 여는 양 팔로 신의 머리를 끌어 안고 있었고, 그러면 신의 팔은 자연스레 여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 신은 여의 허리에 감긴 제 손을 풀며 말했다.


"고맙다."


 그럴때면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여의 외사랑은 매번 다시 끝났다.




 신을 진정시키는 건 왕 여가 아니라 오메가의 형질이라는 걸 여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신을 도닥이며 살았다. 텅 빈 마음을 채울 이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차사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산 자와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는 것도 전부 업무가 되는 판에 서로의 위안이 되어줄 이를 찾는다는 건 복권 당첨 확률만큼이나 낮았다. 같은 차사들은 다 같이 오메가가 되어가는 판국이니 제 코가 석자에, 어디까지나 직장 동료 사이에 이런 일까지 터놓을 이유도 없었다.


"선배님?"

"어. 여기."


 그나마 말할 수 있는 상대라면 사는 곳이 가까워 가끔 만나는 민재 정도다. 


"잘 돼 가냐?"

"늘 바쁜 분이셔서요."


 그는 일찌감치 누군가의 눈에 들어 업을 끝내는 순간 그와 함께한다는 내용의 영원가약을 맺었다. 백년가약으론 너무 짧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전언 덕분에 그렇게 됐다. 언제부턴가 민재의 곁에 당사자만 모르게 주변을 맴도는 나비가 있다는 걸, 차사들은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모르는 차사는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여는 제 몫의 아메리카노에 빨대를 꽂았다.


"아니. 그냥. 이 때 아니면 바쁘잖아."

"가을 타십니까?"

"그런가. 싱숭생숭하네."


 그는 입을 달싹였지만 여에게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한채 제 몫의 카푸치노를 휘휘 젓기만 했다. 그의 곁을 맴도는 나비 만큼이나 여의 말도 안 되는 동거 이야기도 차사 사이에선 유명했다. 쟤는 도깨비 잡은 거냐? 억측이 사실인 양 돌았던 시절도 있다. 개중엔 여 만큼이나 드라마를 즐기는 차사도 몇 있었고, 그들은 은근히 도깨비 내외와 매사가 진지한 그 김 차사 사이에 불륜 관계라도 있는 거 아니냐며 음모론에 힘을 실었던 적도 있다. 모순되게도 그 김 차사 무리의 유흥은 도깨비 신부가 찻집에 들던 순간 박살이 났다.


"정 그러시면, 잘 말씀드려 볼테니 소개라도 한 번 받아보세요."

"차사가 무슨 소개팅이야."

"미팅도 해보셨잖습니까?"

"그땐 인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고, 지금은 인연도 없어."


 후생에서 알파로 각성한 선과의 이야기도 이젠 추억이 될 시기가 온 여다. 제대로 끝맺지 못했던 인연을 이제서야 보내준 그는 다시 만날 날까지 선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떠올릴 때면 늘 슬프고 아렸다. 행복이 멀었다.


"들은 게 있어서 그럽니다."


 지이잉. 벨이 울리기 무섭게 그는 벌떡 일어서 음료 두 잔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멈추질 않았다.


"뭐가."

"저희 가약, 월하께서 도와주셨거든요. 그때 살짝 여쭤봤어요."

"내 인연을 물어봤다고? 네가?"


 팍삭 가라앉았던 여가 관심을 가지는 티를 내자 그는 신나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 좋은 방향의 관심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런 것 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당장 그에게 중요한 사실은 웬간한 일은 심드렁하니 넘겨버리는 그 선배가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한 가지였다.


"처음에 선배님께서 저 많이 도와 주셨잖습니까. 그분께서 늘, 덕을 봤으면 덕으로 갚으라고도 하시구요."


 박중헌 건을 처리할 때 그가 민재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건 그 전에 민재와의 인연이 그만큼 닿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그 순간,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박 중헌을 잡아 넣어야 했지만 그만큼 위험한 망자에 관한 일을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갓 발령받은 새끼차사가 삘삘대는 데, 그걸 모른 척 해?"

"여전하시네요."


 민재는 그렇게 말하며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더니 설탕을 더 넣었다. 그가 갓 발령을 받았을 때, 동기들이 말하는 사수의 대부분은 신고식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거나, 저 차사도 제 몫을 해야지, 같은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단 한 번을 안 도와주는 게 통상적인 상황이었다.


"뭐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여는 김 차사 간 위계서열을 없앤 영웅이 되지는 않았지만 고된 일에 부딪칠 때 말 한 마디 없이 일을 거드는 은인이기는 했다. 정작 당사자는 제 행동의 어느 부분이 감사를 받을 일인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튼, 찾아야 올 거랍니다. 선배님 인연이요."

"원래 그렇게 두루뭉술한 분이신가."

"저도 그때 처음 뵌 분이라, 그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제가 월하를 뵐 일이 있었겠습니까. 직접 아이들을 점지하고 다니신다는 삼신도 뵐 일이 없는 걸요. 민재는 변명하듯 말 보따리를 풀었다. 따지고 보면 삼신과도 인연이 있는 그지만 알지 못하는 인연은 없느니만 못했다.


"말씀 드려볼까요?"

"조금 있으면 환절기라 일 많아져. 내년 이맘때쯤에나 시간 좀 날까."


 여는 빨대로 쭉, 제 커피를 빨아들였다. 그는 인연이 커피를 마시는 만큼만 어려웠다면 매일 아침에 시작해 그날 밤에 끝나는 사랑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일 안 하시나 보네. 그는 민재의 말마따나 한낱 김 차사의 신분으로는 월하를 볼 일이 있겠냐는 생각에 몰래 흉이나 보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가을 타는 거 아니냐는 민재의 말이 맞기는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몇 주 지나지 않아 민재와 마주 앉았던 그 카페 그 자리에서 민재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나 그 누구보다도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단골 도장을 찍은 지 오래인 여는 저를 외면해주는 직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맑고 말도 그럭저럭 잘 통하는 상대라 여는 상대방만 괜찮다면 인연을 이어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제 양 어깨를 잡고 바닥으로 누르는 듯한 기분만 아니었다면 먼저 말을 꺼냈을 지도 몰랐다.


"평소엔 계룡산에서 나올 일이 없는데, 이렇게 또 나와보네요."

"계룡산 사시나봐요."

"네. 한 사백 년 좀 넘게 살고 있습니다."

"사백 년이요?"


 내가 기억하는 생만 구백 년이 넘는데, 사백 년 좀 더 산 이무기를 어떻게 꼬드긴 거지? 여는 평소 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는 습관의 덕을 봤다. 그의 손끝이 닿아 있는 코트 자락이 습기를 잃고 얼어 붙었다.


"나이가 좀 많죠. 부담되실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여 씨같은 분도 뵙게 되고 좋네요."

"아뇨,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저, 혹시 제 나이는 알고 나오셨나요?"

"차사 된 지 삼백 년 언저리 쯤 되셨다고 듣고 왔습니다."


 …….


"죄송합니다. 볼 일이 좀, 생겨서."

"예?"

"정말 죄송합니다. 직장이 직장이라……. 먼저 실례 하겠습니다."


 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한 번 푹 숙인 뒤, 지갑을 꺼내 제 몫의 커피 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뛰어가듯 도망갔다. 그러고는 찻집으로 달려가며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너. 날 어떻게 소개한 거야.

 예?

 됐고, 선약 언제 끝나.

 퇴근하는 중이었는데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날 삼백 몇 살로 알고 있던데.


 민재는 그 날 얼마 남지도 않은 제 쌈짓돈을 탈탈 털었다. 여는 덜컥 비싸진 제 입맛을 탓하면서도 그의 사죗값은 톡톡히 받아냈다. 다른 차사면 모를까 신이 없던 시절 여의 이름자와 그의 기억속에 있는 세월을 여에게 직접 들어 알게된 그 민재 만큼은 해선 안 될 실수였다.


"제가 마음이 급했나봐요."

"내 인연인데 왜 네 마음이 급해."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급해지네요."


 결국엔 죄를 지은 차사까지 달래고 온 그는 망자가 될 자와의 선약 하나 없는 드문 날이었는데도 녹초가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그런 그가 말끔히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에 나왔을 때, 신은 말없이 다가오다가 대번에 눈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야."

"어."

"너 그거 무슨 냄새야?"

"방금 샤워했는데."


 여는 제 몸에 대고 향을 맡았다. 섬유 유연제 냄새 약간에 바디워시 향이 풀풀 났다. 그는 설마 저승에 발을 걸친 이들에게만 나는 고유의 향을 트집 잡으려는 거라면 그건 못 돼먹은 거라며 쏘아붙일 준비까지 단단히 마치고는 눈매에 날을 세웠다.


"별 냄새 안 나잖아."

"안 나긴 뭐가 안 나."


 하지만 신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말을 했다. 그것도 제 얼굴을 바싹 갖다대면서.


"흙내가 진동을 하는데."


 차사의 작업복 만큼이나 검은 잠옷 위로 신의 향이 훅 끼쳤다. 그는 적잖게 놀라 신과의 거리를 벌렸다. 뭐 하냐. 설명을 요구한 건 덤이다. 신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너, 오늘 산에서 구르고 왔어?"

"카페 갔다가 밥먹고 왔는데."

"누구랑."

"……개인적으로 만날 인연이 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여는 잠시나마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의 말을 기억했다. 계룡산 어쩌구 했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새 향이 배었나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묻은 향을 어떻게 아는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곡 하는 망자는 흔한 편이니까. 


"다음에도 만날 일 있으면 피해."


 그러거나 말거나 신은 구겨진 표정 그대로 냉큼 돌아섰다. 향도 갈무리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어지간히 화가 났나 싶었던 여는 공연히 손목을 들어 향을 맡아봤지만 제 몸에서 나던 향 말고 다른 향을 맡지는 못한 그는 신이 그날따라 좀 예민하다고만 생각하며 끝방에 들어가 얌전히 잠을 청했다. 




"으……."


 아침 열한 시, 뜬금없이 도깨비 집터 안 끝방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하면.


"해가 중천이야."


 모처럼 밤에 선약이 없었던 왕씨 성의 김 차사가 온 몸의 긴장을 풀고 자던 중 난데없이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에 이미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제 상태를 부정하는 소리다.


"잘 거야……."

"해 떴다니까? 그것도 저 위에 떴어."


 위잉, 윙. 신의 말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청소기는 오늘도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소리도 얼마 안 난다는 최신식 청소기를 몇 대나 충동구매 해둔 신은 막상 청소 만큼은 굳이 예전에 쓰던, 빨아들이는 속도도 조금 느리고 소리가 아니라 소음이 나는 청소기를 썼다. 차사를 깨우는 데 특효라는 제법 간단한 이유에서다.


"왜, 또. 왜!"


 화를 내건 어쩌건 결국 일어난 여를 본 그는 부리나케 끄기 버튼을 누른 뒤 청소기의 헤드를 뺐다. 뽁. 앙증맞은 소리가 여의 심지를 긁었다. 심심하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권능을 쓰는 존재가 둘이나 사는 집터에서는 이미 집안일을 분담해둔 지 오래다. 끝방 사는 왕씨 성의 김 차사는 직업 특성 상 집에 머무는 시간이 들쭉날쭉 하다는 점을 감안한 결과 의는 여, 식은 각자, 주는 신, 각각 결정을 낸 상태였다.


"침대도 한 번 밀어야 돼. 일어나."


 그런데도 여가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구는 건, 평소에는 신이 집에 아무도 없을 때에만 청소기를 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게 아닐 경우에 여가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지금 신에게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삐졌거나, 화났거나, 기타등등 기타등등. 이럴 때는 어떤 게 그렇게 신의 마음에 거슬렸는지 필사적으로 알아내 빨리 풀어주는게 낫다는 걸, 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충 들어주고 잠이라도 더 자야겠단 생각을 하며 그가 말했다.


"또 뭐 때문인데?"


 신은 버튼을 다시 누른 뒤 침대 위 틈새에 청소기를 대며 말했다.


"네 침대에 흙 냄새 다 뱄어."









Posted by _zlos
Goblin2017. 5. 16. 00:48

 


 오메가버스 중의 연작. 취향이 아니라면 지나가세요.



 남매는 은탁을 태운 차가 현장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선은 금세 도착한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임시로 주변을 통제해달라 요청하고 있었고, 이야기가 좋게 끝나 지원 인력이 도착할 예정이라는 말에 신을 찾았다. 은탁을 따라가도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선이 보게된 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신이 절제되지 않은 상태로 처음 세상에 나온 은탁의 향을 뚫고 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식 석상에서의 김 신은 왕 여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중인 약혼자이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사이였다. 


"정신 차려."


 그는 길바닥에 엎어져 있던 여를 은탁의 향 더미에서 건져 올려 등에 업었다. 이미 의식이 끊긴 여는 말이 없었다. 대신 은탁의 향에 이끌린 오메가로써의 본능은 건재했는지 그의 향이 점점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 이상 여를 은탁의 향에 노출시켜선 안 된다는 생각에 곧장 주변을 빠져 나왔다. 그의 주변에 여의 수행원들이 급히 다가갔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신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같이 가시죠. 저희쪽이 더 가까울 겁니다."


 그는 여를 은탁을 부탁한 병원과 같은 곳으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여의 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병원은 거리가 제법 됐고, 거기에 은탁이 알파로 발현한 이상 선과 배우자가 될 여가 익숙해져야 할 곳이기도 했다. 곧 여의 가문에서 보낸 차가 한 대 도착했다. 두 남매는 여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그 애, 이번 시기 잘 넘기면 우리 가문 사람 되는 거지?"

"그래야지."


 그들을 실은 차가 막 구역 통제를 시작한 경찰의 배려를 받으며 현장을 빠져 나왔다. 


"입양 시킬거야?"

"그 애가 원한다면."

"알아서 해. 나도 이 사람 꽤 마음에 들었거든."


 선은 제 몸 쪽으로 여를 끌어당겼다. 두 알파의 사이에서 간헐적으로 제 향이 섞인 숨만 뱉던 여의 몸은 손길 닿는 대로 선의 품에 안겨들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것도 상황을 볼 때 작용하는 알파나 오메가의 직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알파의 향을 조금 더 오래 누리고 싶다는 욕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신의 시선 또한 본능에 따른 것이어야만 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호르몬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쌓아가면서 수월하게 본딩을 끝낼 미래를 부러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됐다. 그는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 발현 하나만 기다려 왔던 은탁에게 더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발현했고 드디어 곁에 둘 수 있게 됐는데, 드디어 이 긴 냉전이 끝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는데 여기서 모든 것을 어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생, 알 수가 없어서.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은탁은 눈을 떴다. 그녀는 공백에도 소리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부모를 모두 잃고 친척집에서 신세를 지며 여럿이 살아도 혼자 사는 것 같던 시절을 지난 뒤 재능을 인정받기 전 까지 혼자 자취하며 살던 은탁에게 공백이란 말 그대로 공백이었다. 그게 못내 외로웠던 그 시절에 지금 이 느낌을 알았다면 조금 더 행복하게 보냈을까 고민할 만큼,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이 너무 시끄러웠다. 이쪽에서는 머물다 간 사람의 향이, 저쪽에서는 얼마전까지 있었던 기계에 묻었던 땀내가 났다. 향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완전히 닫혀 있는 창문 너머 저 멀리서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까지 들려 때아닌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는 것 조차 괜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그녀 자신에 대해 슬슬 짜증이 날 시점의 일이다.


"환자분, 어디가 불편하세요?"

"너무 시끄러워요. 여기저기 향도 너무 강해서 머리도 아프구요. 어떻게 안 될까요?"


 그녀는 곧바로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에게 심정을 탈탈 털어놓았다. 간호사는 난감해 하면서도 미리 내려둔 진단 결과를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 설명했다. 우성으로 발현하는 바람에 모든 감각이 발현 전에 비해 지나치게 민감한 상태인데 첫 발현이기 때문에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를 익히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며, 해결 방법은 환자 자신이 호르몬을 다루는 법을 알기 전까지 기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최대한 빨리 좀 부탁드릴게요. 진짜 너무 힘들어요……."


 그녀의 고통의 기록은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기기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뒤, 그녀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들에 둘러싸여 매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알파로써의 삶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특별할 것 하나 없던 것들 조차 매번 색을 바꿔가며 다가왔다. 모든 것이 특별했다.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든 것이 달랐다.

 그녀에겐 처음으로 맡은 향이 평생 뇌리에 짙게 남아 있을 것이었다. 알파의 향은 선의 것을, 오메가의 향은 여의 것을 가장 처음 접해 두 형질의 기준이 그 두 사람으로 잡혔다. 병실에서 기기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나 둘 감각을 여닫기 시작한 계기는 병실에만 있기엔 갑갑하다는 그녀 자신의 의지였다. 몸이 한결 괜찮아진 뒤 유리벽을 하나 두고 만났을 지언정 처음으로 다시 본 알파는 선이었다. 그 모든 순간에 신은 없었다.


"두 번째로 보는 건데도 벌써 오랜만이네요, 우리."

"써니 언니! 안녕하세요!"


 신이 없었다. 모든 고민의 근원이자, 사랑이고, 미래였던 사람이 없었다. 싸웠다지만 발현 전까지 은탁의 인생을 함께 걸어가던 사람이 없었다. 전액 장학금을 조건으로 간신히 돈을 마련해 들어갔던 대학교에서 처음 만나, 실은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었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고통에서 해방된 순간 먼저 떠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퇴원한 뒤 어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라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나마도,


"다른건 아니고, 몇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입양 관련해서 오빠랑 말은 해 봤어요?"

"네?"


 발현 후 그녀가 신을 떠올린 그 순간 조차 선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한참은 미뤄졌을 것이란 점이 못내 쓰렸다.




 신은 신대로 바빴다. 사고 당일, 그는 은탁과 여, 두 사람을 각각 한쪽 끝과 반대쪽 끝 병실에 격리 조치 해뒀다는 보고를 받은 뒤 집에 돌아갔다. 마음같아선 병실을 지키고 서 있어도 부족했지만 형질을 이유로 격리 병실에 들어간 지금, 알파인 그는 두 사람이 입원한 층에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병원 신세를 질 두 사람의 뒷처리를 먼저 해 두는 게 낫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버렸다. 여를 향해 걸어가는 길 내내 은탁의 향을 맡았지만, 제 연인의 향이라는 걸 알면서도 같은 알파로써 느끼는 약간의 거부감 말고는 그 어떤 설렘도 느끼질 못했던 제 자신에게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탓이다. 분명 은탁의 발현은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지표였다. 부쩍 어색해졌던 두 사람의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순간이었다.


 그런데 왜, 조바심이 나지.


 그는 한참동안 닫아뒀던 서랍을 열었다. 자료 더미로 가득 차 잘 열리지도 않는 걸 억지로 연 그는 안에 있던 자료들을 전부 꺼내 책상 위, 제 앞에 전부 펼쳐놓기 시작했다. 키보드까지 침범하며 책상을 가득 메운 것 모두 그의 필기로 공백 하나 없었다. 알파 형질 발현자 행동 분석 보고서 : 인간 관계(III), 알파 형질 발현자-형질 비 발현자 간 관계 지속성에 관한 연구, 알파 형질 분석 : 성향 변화를 중심으로, 3차 성징기 : 형질 발현자 간 사회 관계망에 관하여, 기타등등, 기타등등.


"왜 없지?"


 신은 그렇게 소중히 모아뒀던 종이더미를 전부 헤치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찾아 헤메도 막막하기만 했지 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 자료는 그 더미 안에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알파와 베타의 사랑이결국 형질의 벽을 넘을 수 없는 건지에 관해 의뢰를 맡긴 알파, 혹은 베타가 없을 리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제 자료 더미에서 나오지 않는 건, 아마 연구자가 없었던 게 아니라 이미 나와있는 연구 결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신 자신이 의도적으로 자료를 넣어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알파도 결국엔 인간이었다. 실수 할 줄도 알았다. 제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애써 모른척 할 줄도 알았다. 그러니까 그는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형질 차이 같이, 누구 한 쪽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사랑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은탁과 자신의 관계도 그렇게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신은 열린 서랍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이젠 냉전 같은 단어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날이 오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녀만 괜찮다면 어떻게든 붙잡을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그녀를 보고 싶었다. 이야기를 해야 했다. 까딱하면 뒤틀릴 지 모르는 관계 속에선 당사자 간의 대화만이 돌파구였다.


 그러니까, 소식이 들어 와야 말이지.


"아직도 별 소식 없어?"


 신은 며칠째 오지 않는 연락만 기다렸다. 벨소리가 들릴 때 마다 화면을 바라봤지만 항상 신이 원하는 이름들만 제외하고 찍혔다. 은탁의 첫 발현에 대한 참고인으로 그를 소환될지언정 그녀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은탁이 아닌 여의 상태를 말하기 위해서라도 병원 측에서 연락이 왔다면 기대라도 한 번 했을텐데, 이틀동안 감감 무소식이었다. 이젠 슬슬 불안할 지경이었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몸을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그는 더이상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빠한테 뭐 안 갔어?"

"특별히 없었는데."


 본가에서 만난 두 사람은 나란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선의 입장에서도 은탁의 상태는 중요했다. 은탁이 정신을 차리고 나면 물어볼 게 두 가지 있었다. 입양 절차가 필요한지, 발현하기 전 처럼 신과의 결혼 계획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지. 두 가지 모두 3차 성징기에 들어간 은탁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두 사람 다?"

"병원에서 아예 연락이 안 왔어."

"이상한데. 슬슬 전화 한 번 올 때 안 됐어?"


 바로 그 순간에 연락이 온 건, 어쩌면 운명의 한 단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은탁이 좀 괜찮아 졌대. 면회 가능한가봐."


 신에게 온 연락은 업체에서의 연락이었다는 것과 선에게 온 연락은 병원에서의 연락이었다는 것, 그로 인해 신은 은탁이 깨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병원과 정 반대 방향인 인천에 먼저 들러야 하는 상황이 나온 것, 그 사이 은탁을 보러 간 선이 입양에 관련해 신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은탁이 깨닫게 되면서 결국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두 사람의 인연이 마침표를 찍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


"같이 갈래?"


 그 모든 일들이 단 한 번의 엇갈림으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신이나 선이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에게는 제 세계의 향방을 가르는 어떤 날이 하루쯤은 있는 법이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고민해왔던 많은 것들이 바뀌는 순간이 한 번 쯤은 오는 법이다.


"……부탁 좀 하자. 나 갈 곳이 좀 있어서."


 하필 은탁의 의식이 돌아온 날에 그런 순간이 찾아왔을 뿐이다. 신과 은탁에게는 분통을 터뜨릴만큼 불공평한 일이었다. 몇 번의 위기를 함께 헤쳐온 둘의 사이가 선택 한 번으로 끝나고 마는 거라면 차라리 관계를 시작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파건 베타건 오메가건, 결국은 사람이라서.



"설명해 줄게요. 길어질 거니까 은탁 씨도 거기 앉고."

"아, 네."


 선은 옆에 있던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맞은편의 은탁도 얼결에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알파건 오메가건 발현을 한 사람은 두 가지를 꼭 확실히 정하고 퇴원해야 해요."

"두 가지요?"

"뭉뚱그리면 한 가지로 말 할 수도 있고. 그게 나아요?"

"네! 한 가지가 낫죠! 편하구!"


 발현을 해도 사람의 성정이 전부 변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은탁의 경우 발현 전 성정이 향의 방향성을 결정할 정도로 전후관계가 뒤바뀐 사례이기도 했다. 선은 연하게 웃었다. 


"가족 관계를 좀 정리하고 나가야 편해. 성을 바꾸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야."

"그럼요? 뭘 결정해야 하나요?"

"입양 여부랑 결혼 여부?"

"에이, 입양되면 성 바꿔야 하는 거 아니예요?"


 은탁은 속았다는 듯 장난스레 둘 사이를 지키는 유리를 툭 쳤다. 향조차 넘어가지 못하도록 특수 처리가 끝난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동 한 번 없는 벽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은탁 씨보다 훨씬 조절이 힘든 알파도 그 벽은 못 뚫어요.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가 이렇게 만날 수 있고."

"와……."

"아무튼, 3차 성징 이후에 입양 절차를 밟는다면 성을 바꿀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입양이라면 한 가족이 되는 걸텐데 성씨를 바꾸지 않고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건지도 궁금했고, 실제로도 사람을 입양하겠다고 찾아온 가문에서 그런 걸 용납할지도 궁금했다. 그간 은탁에게 신과 선이 태어난 가문과 같은 곳들은 무척 권위적으로 비쳐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가문에서 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별 상관 없어요. 중요한 건 성씨나 핏줄이 아니라 형질이니까."


 하지만 선이 실제 제가 겪어온 이야기들을 하나씩 할 때 마다, 은탁은 제가 했던 생각들이 대부분 베타의 편견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분명 권위적이긴 한데 베타의 시점에서 바라봤을 때와는 또 달랐다. 형질 뿐만 아니라 온갖 잣대를 대며 까다롭게 따질 줄 알았건만, 그냥 형질 하나면 모든 게 프리패스라는 식의 설명이 돌아왔던 것이다.


"형질이란 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중요하지. 은탁 씨가 오빠랑 결혼하겠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이유도 형질 때문이면서?"


 그렇지만 은탁은 어딘지 한 구석이 허했다. 어느 쪽이건 발현만 하면 되니 그때까지만 참자던 신, 어차피 발현할테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거라던 여를 알고 있는 그녀조차 막상 알파로 발현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신의 존재를 떠올리지도 않고 살았던 며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베타였던 시절부터 신과의 관계는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둘만 아는 불안감이었던 데다가 안정적이질 않으니 역으로 사랑이 더 오래가기도 해서 전화위복이 된 적도 많다. 하지만 불안함까지 사랑의 땔감으로 삼았던 사이 마저 발현 한 번에 어느새 흩어지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궁금한 거라도 있어요?"


 그건 그녀에게 적잖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 술 더 떠, 이제는 신과의 관계가 우리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발현을 하면, 그 전에요. 그러니까 베타였던 시절에 쌓았던 인간 관계가 변할 수도 있나요?"


 그렇기에 그녀는 선의 대답이 자신을 구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발현 초기에만 혼란스러울 뿐 시간이 지나 좀 더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간다면 당신이 베타였던 시절에 알던 그 관계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 한 마디만 들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이번 위기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람 나름?"

"네?"


 그러나 선이 내놓은 대답은 은탁의 기대를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발현이란 거, 생각보다 드문 일이예요.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일인 것도 맞고."

"그렇긴 하지만……. 발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까지 다 날아가는 건 아니잖아요."

"기억은 그런데 감정은 몰라요. 괜히 결혼 여부를 물어 보는 게 아니야."


 세상 사람 대부분이 베타잖아요. 3차 성징기 안 거치고 잘만 살다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난 곧 알파 아니면 오메가가 될 거니까 결혼은 보류할 거라고 하는 베타, 본 적있어요? 선은 은탁의 마음 속 틈새에 제 말을 한 마디, 두 마디, 휙휙 던져댔다. 그러다 한 순간, 한 번 크게. 


"그래도 이미 결혼한 뒤에 발현하면 좀 다르지 않을까요? 산 세월도 있고, 자식이 있으면 또 어떡해요."

"뒤늦게 발현한 사람들 중에 3차 성징기 잘 마치고 나서 가정 유지하는 사람.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백에 하나야. 알파와 알파 간 본딩이 될 확률과 같은 그 수치로, 선은 신과 은탁의 사이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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