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5. 11. 02:56



 오메가버스 중의 연작. 취향이 아니라면 지나가세요.



 3차 성징기를 마친 사람들은 부,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을 포상처럼 누려왔지만 그 대가로 제 몸을 제 의지대로 다룰 수 없는 순간을 견뎌야 했다. 억제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구세주처럼 내려왔지만, 억제제는 결국은 진통제라 현상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알파건 오메가건 백날천날 억제제를 들고 다녀도 어느 순간에는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첫 발현을 떠올리는 시기가 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환자분, 정신 드셨어요?"


 은탁이 오메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뻗은 첫 향을 그대로 맞고 그 자리에서 엎어졌던 여가 의식을 찾으며 처음 한 생각은 주변이 너무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주변이 조용해 겨우 들리는, 그것도 조금 떨어져 나는 소리가 분명한 걸 알면서도 평소의 몇 배로 거슬려 했다. 알파의 호르몬을 들이 부은 셈이라 모르는 새 히트 사이클까지 앞당겨 지면서 가뜩이나 베타에 비해 민감한 감각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열려 있었던 탓이다. 


"……."


 그래도 정신을 잃은 채로 히트 사이클을 보낸 셈이 된 그는 시기상 거의 끝물이 다 되어서야 의식을 차린 셈이라 평소에 비해 수월하게 견디는 중이었다. 거기에 제일 고통스러울 순간은 이미 넘긴 뒤였고, 형질 자체가 가라 앉는 기간에 들어서고 있던 중이었다. 여의 감각이 말했고 의료진의 지표가 증명하고 있었다.


"제 말 들리시면 눈 한 번 깜빡여보세요."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에도 평소보다 몇 배는 자극적인 빛이 그의 눈 속으로 쏟아지다 사라졌다. 제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전부 베타라는 사실을 인식한 뒤에는 천천히 긴장을 풀며 주변을 살폈고,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입을 여닫고 팔을 들었다 내릴 때 쯤에는 왜 제가 병실에 눕게 되었는지를 잠깐 잊을 정도로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이게 더 괜찮은 것도 같고. 


 상태는 많이 나아지셨으며 이번 히트 사이클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나흘 정도 경과를 지켜 본 뒤에 퇴원 절차에 대해 이야기 하자는 말을 끝으로 의료진은 병실에서 나갔다. 그는 그제서야 제 몫의 병실 하나를 전부 차지할 수 있었는데, 혼자가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제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마저 찾아갈 겸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다. 창문 너머는 언젠가처럼 밤이었다.


 지금 몇 시지.


 곱게 잠들어 있던 화면을 건드린 그는 11:24 p.m.을 보고 안심하려다 그 옆 Sun.을 보고 눈을 번쩍 떴다.


 일요일?


 여는 못해도 4일은 더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합쳐놓고 보면 어영부영 일 주일을 통으로 날리는 셈이었다. 그래서 사이클이 끝물이었구나. 새삼 깨달은 그는 저 없이 상황을 수습했을 남매를 떠올렸다. 난감했다.

 그의 입장에서 은탁은 차라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첫 발현때 제일 위급한 순간은 처음으로 향을 내보일때다. 그녀는 절제되지 않은 호르몬이 향과 섞여 한 번에 퍼지는 그 시기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행된 점만 뺀다면 첫 발현 자체는 괜찮게 넘긴 편이었다. 그 시기가 지나면 남는 건 심신을 진정시키는 것 뿐이니 그때부터는 주변에 있는 알파나 오메가들의 영역 보다는 선의 연락을 받았던 김 씨 가문의 주치의들이 책임을 져야 할 영역이 된다. 거기에 김 신과 그의 계약을 생각해본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자연히 그에게 전달될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왕 여 그 자신은 달랐다. 호르몬 한 번 잘못 들이 마셨다고 기절한 것도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던 데다가, 의식이 없는 제가 두 알파 앞에서 정돈되지 않은 향을 뿜었을 걸 생각하니 남매를 볼 낯이 없었다. 


 먼저 연락해야 하나?


 어디까지나 얼렁뚱땅 넘어간 히트 사이클을 그가 다행으로 생각했던 건, 지금의 그로써는 통상적 방법으로 히트 사이클을 넘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파혼을 준비하고 있다지만 공식적으로는 정혼자가 있고, 그런 그와 동거중에 다른 사람과 히트 사이클을 보내려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정해진 수순이니, 이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간다면 문제 생길 일은 없겠다고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그다.


 연락을…….


 하지만 알고보니 몇 배로 복잡해진 상황 앞에서, 왕 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이번 일을 가문 대 가문의 단위에서 김씨 가문과 인연이 있는 은탁을 위해 왕씨 가문인 제가 도움을 주다가 사고가 난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고, 은탁에게 휩쓸려 홀릴뻔 한 정혼자를 신과 선이 막은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그가 어떤 방향으로 사건을 설명하더라도 거기에 말을 맞춰줄 사람들이었다.


 ……연락을 해야 하는데.


  사실 답은 낸 지 오래다. 그런 그가 가문을 끌어들일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건, 두 사람을 지금 이 시점에서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모르는 거였네요."

"뭐가."

"알파로 발현할 지, 오메가로 발현할 지, 그거요."


 왕 여는 가장 비겁한 선택을 했다.


"그래."


 우성 알파로 발현한 그녀는 3차 성징기를 갓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은 순간적으로 치솟는 호르몬 수치를 기기의 도움을 받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방문 신청을 한 여는 첫 발현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알파와 히트 사이클이 끝나지 않은 오메가를 같은 장소에 안내하는 건 양쪽 모두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병원측의 판단 하에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


"미리 알았으면 다른 분 불러다가 옮겨 주셨을 거니까요. 맞죠?"


이틀 뒤 그가 다시 보게 된 은탁은 지금까지 봤던 그녀의 모습과 비교하면 조금 차분했고, 좀 더 날카로웠다. 냅다 틀린 쪽으로 추측하는 걸 보면 직감도 다듬어 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지만 그는 그녀의 곁에 설 김 신을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안 그래.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았겠지."

"그렇겠네요……."


 물론, 아무리 다듬어도 여의 경우를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기는 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김씨 가문이 연을 맺어둔 병원의 환자가 되어 만나고 있는 꼴 부터가 예외처럼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민망한 사람이 된 둘은 세상의 진중함을 있는대로 끌어와 주변에 촥촥 뿌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알파지?"

"네. 우성이래요."

"그래.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면 향으로 대답하고."


 은탁은 비상 상황을 대비해 대기중이던 간병인에게 부탁해 기기와 의자를 앞쪽으로 더 가까이 댔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간병인과 마주 웃었다. 그녀의 형질도 다른 알파들과 똑같을텐데 누군가를 누르는 느낌보다는 행복을 타고 퍼지는 것 처럼 보였다. 그는 은탁 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향으로 대답을 해요?"

"김 신이 가르쳐 줄 거야."


 발현했으니 결혼도 문제 없을 거고. 축하한다. 그는 작게 웃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표정을 굳히는 은탁과 대비되어 지나치게 맑아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곧 그보다 훨씬 크게 웃어보였지만 히트 사이클이 완전히 끝나지않은 여의 시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는 은탁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알파로 발현하며 겪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할 거라 생각했던 여의 기대를 정면에서 부정하기라도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 중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헤어졌어요."

"헤어졌다고?"


 가장 비겁한 선택을 한 대가로 그는 며칠동안 있었던 일 중 가장 심각한 사건과 마주했다. 제가 병실에서 그 어느때보다 편한 히트 사이클 기간을 거치고 있던 동안, 은탁의 세계는 신체 내부의 호르몬보다 훨씬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 여의 공식적인 진단명은 일시적인 쇼크로 인한 혼절 이었다. 정신을 차린 뒤부터는 혼자서도 일반적인 생활이 가능한 수준인 걸 확인한 의료진은 전체 회진 시간에 그의 상태를 점검하거나 매일 한 번씩 수치를 체크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에게 알파와의 접촉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의 상태가 가문의 일정을 점검하고 조정하던 중 남는 시간에 은탁을 만나고 온 뒤 급격히 악화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벽을 짚어가며 간신히 제 병실로 돌아오는 모습을 본 담당 간호사는 조용하던 1인 실에 의료진을 전부 호출해 그에게 주어진 자유를 전부 뺏어갔다.


"환자분.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언제쯤 퇴원할 수 있나요? 모레부터 일정이 좀 있어서 퇴원을 앞당기고 싶은데요."


 어느새 여섯 시간에 한 번씩 제게 꼬박 찾아와 호르몬 수치를 체크하게 된 그 간호사는 호르몬을 체크하는 기계에 여의 입안에서 채취한 타액을 넣고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정 다시 조정하셔야 할 거예요."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퇴원 얘기 했었는데요."

"본인도 느끼고 계시겠지만, 히트 사이클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요."


 보이시죠? 그는 통상적인 기준보다 한참 높게 찍힌 제 호르몬 수치를 보고 고개를 떨궜다.


"여섯 시간 뒤에 다시 체크할게요."


 여는 병실에 홀로 남아 이마를 짚었다. 평소보다 따뜻할 손바닥보다 이마가 더 뜨거웠다. 결국 제 탓이었다. 저희 헤어졌어요, 은탁의 한 마디에 그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어그러질 지 감히 자신이 예측해도 되는 지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의 고민은 빠르게 끝났다. 그녀는 고민하는 기색도 안 비치고 곧바로 그에게 모든 일을 털어냈기 때문이다.


"정신 딱 차렸는데 주변에 기계랑 사람이랑 엄청 많았거든요."

"그래."

"출입 제한 걸려 있는 병실 이더라구요. 저 그런 곳 처음 들어가봤는데."


 은탁은 발현의 여파를 평소에 비해 활발한 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겪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당 수치가 평소보다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질병으로 분류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그녀에게 내려진 처방은 시시때때로 환자에게 제공되는 쿠키를 섭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작은 탁자 위에 올려둔 쿠키박스를 열어 바나나가 잔뜩 박힌 파이를 하나 꺼냈다.


"전부 베타 아니면 알파더라구요. 갑자기 다른 형질인 사람이 다가오면 서로한테 위험하다나."


 첫 발현으로 병원에 실려오는 환자들은 한 번씩은 전부 겪어본다는 격리 조치였다. 알파나 오메가만이 겪어볼 수 있는 처방 이었으므로, 알파나 오메가의 관계에서 초면인 경우 친밀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자주 나오는 화제거리 기도 했다. 제 병력을 공개하는 것은 제법 큰 패널티였지만 자신이 3차 성징기를 거쳤다는 점을 밝혔을 때 얻을 게 잃을 것 보다 훨씬 많은 세상이었다. 얻는 것의 수준이 병력 하나를 제 입으로 말하는 것에 비해 너무 높아서, 황혼길에 접어든 줄 알았던 운명론자의 지위를 단숨에 올려버린 세상.


"잘못하면 본딩하려고 서로한테 달려드니까."

"네. 근데 전 사실 별 상관 없었어요. 결혼할 사람도 있었구."


 전부 옳은 말이었다. 여가 두 사람의 이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시밭길 다 걸었으니 이제 누릴 것들 누리며 살기만 하면 됐는데, 행복 바로 앞에서 모든 일들이 멈춰섰다. 일정은 일정대로 진행해야 하는 신의 성격에도, 서로 사랑하는 삶을 위해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어온 은탁의 행보에도 들어맞는 게 하나 없는 결과였다.


"병실에 오메가라도 들었던 거야? 본딩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뇨. 써니 언니가 얘기를 잘 해주셔서 오메가인 분들은 제 병실 근처에 오지도 못했었대요. 되게 고마웠어요."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접이야. 그럼 설마, 그거 가지고 그 가문 사람이 인색하게 굴기라도 했어?"

"아니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 말했다.


"여기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생각이 안 났어요."


 그는 스물 넷의 왕 여가 지나간 어느 순간과 얼마 전 침대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던 왕 여를 겹쳤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처지와 꼭 닮은 이야기가 그에게 부정할 기회도 주지 않겠다는 듯 추억으로, 장면으로, 더해서 그의 현실까지 옭아매기 시작했다.

 세 순간이 엮이기 시작하자 그의 몸은 그의 것이 아니라 본능의 것에 가깝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는 은탁이 한 말의 뜻을 물어봤다간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 혀, 숨, 소리,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뭐가?"

"김 신이라는……. 알파가요."


 그는 두 사람의 관계가 이런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자기 몸 아프면 아무 생각도 안 나. 3차 성징기만 잘 마치면 또 달라질 거고."

"평소였으면 견뎠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요."


 그는 은탁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스물 넷의 왕 여를 위한 변명을 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부턴가 여는 점점 머릿속으로 열이 몰린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도 그녀의 말만은 또렷이 듣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 싸웠었잖아요."


 알파와 베타의 관계는 항상 불안해. 신이 털어놓던 한 마디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그는 신의 말에 반박하듯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알파로 완전히 각성이 끝나면……."

"알파와 알파 사이에서 본딩이 될 확률은 1 퍼센트 내외잖아요."

"알파와 베타 사이에서는 확률이 아예 존재하질 않고."


 실제로 3차 성징기를 거친 사람 간 정략 결혼을 추진할 때 가장 선호되는 조합이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인 건 사실이었다. 본딩 확률이 제일 높다는 점은 결혼 생활이 꾸준히 이어질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으므로 충분히 메리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알파와 알파, 오메가와 오메가 간의 결합도 심심찮게 보였다. 베타가 섞인 관계라면 아예 불가능할 일들이 그들에게는 낮은 확률이지만 가능성으로 존재했다. 오히려 가문의 지위는 유동적인 것이라 필요할 때 이혼을 할 수 있으면서도 결혼 생활중에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써 각광받기도 했다. 은탁의 발현이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도 상관 없었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알아요."

"그런데 왜?"

"저, 사실 싸운 날부터 계속 고민 했었거든요. 왜 그 사람한테 기대질 못했던 건지."


 그녀는 초코칩이 잔뜩 박힌 쿠키 하나를 집어 먹은 뒤 말을 이었다.


"불안해서 그랬나봐요."


 항상 불안했거든요. 확신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결국 베타고, 그런 저는 두 분이 아무리 발현한다고 말해줘도 불안했어요. 그냥, 김 신이라는 사람이 지 은탁이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아는데…….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동거를 하고 있지도 않고, 커플링 하나도 못 하는 사이였으니까 남는 건 감정이랑 기억 뿐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 두 가지만 잡고 갔어요. 그러니까 저는, 기대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사랑해야 하니까. 온전한 관계인 척 불안한 관계였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현 시작하더니 생각도 안 나요. 그거 믿고 여기까지 온 건데."


 하지만 말투는 끝까지 무덤덤했다. 은탁이 말하는 감정이 날아간다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여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동안 그녀는 홀로 평화로웠다.


"그럼 믿을 건 1 퍼센트 짜리 본딩 확률 뿐이잖아요. …그래서 헤어졌어요."


 그걸 버틸 자신은 없었거든요. 베타 지 은탁의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Posted by _zlos
Goblin2017. 5. 7. 19:35


 오메가버스 중의 연작. 취향이 아니라면 지나가세요.



 모처럼 휴일이었다. 전날 밤 늘어지게 자다가 업무 시작시간도 넘긴 시간에 밍기적거리다 일어나 하품이나 하고 이불 속에서 한 삼십 분 쯤 더 보낼 생각에 한참 들떠 있던 여는 오랜만에 지인들을 불러다 원없이 술을 부어댔다. 


 흐억!


 일단 용케 돌아왔다 싶을 걸음걸이로 집에 돌아와 낑낑대며 양말만 겨우 벗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던 것 까지는 완벽한 휴일 일정이었는데, 한참 이른 때인 게 분명한 시간에 심장을 강타하는 진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혼이 다 놀랄 울림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셔츠부터 외투까지 단추란 단추는 하나도 안 빠지고 다 잠긴 채 잠든 바람에 전화를 알리는 진동이 가슴 언저리에서 지치지도 않고 울리는 중이었다.


"뭐야, 누구야."


 꿈에 젖었던 여를 현실로 불러오는 21 세기 식 심폐소생술을 받은 여는 그날 새벽에 컨디션 한 병만 믿고 달렸던 사람 답지 않은 속도로 외투 안 주머니를 뒤졌다. 신보다 더 익숙한 이름이 될 뻔한 이름이 찍혀 있었다. 평소 직접 연락하기 보다 신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그는 어쩐지 억울해졌다. 이왕 전화할 거라면 두 시간만 늦게 하지. 그는 투덜대면서도 착실하게 화면을 밀었다.


 여보세…… 큼, 크흠. 여보세요……?


 그가 알기로 제게 연락을 준 사람은 중요한 일이 터진 게 아니고서야 맥락도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 제 이야기를 퍼부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예의와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선 자리에 직접 나왔다면 두말 않고 결혼을 진행했을 사람이기도 했다.


 두 사람 싸웠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래서 화면 너머로 대뜸 쏟아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제 자신을 정돈했다. 머리 위 사정은 폭탄 맞은 까치 집이어도 옷 매무새는 정비했다. 어지러워 정신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말 한 마디라도 놓칠까 이어폰을 연결했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대대로 정계를 휘어잡아 온 가문의 철칙이었다.


 선 씨?

 써니요.

 아, 예. 써니 씨.

 방금 일어나셨나 보네요. 기다린다고 기다린 건데.


 여는 대화 몇 가닥 만에 그녀에게 머릿속이 채 정리가 안 된 제 자신을 통째로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보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신은 제 계획에 선을 포함시켰다. 신과 여가 바라는 대로만 상황이 흘러가 준다면 여의 옆은 결국 선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어질 인연은 이어지나봐. 신이 제 동생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선을 소개한 날, 첫 순간에 선이 한 말이다. 그때 맞은 편에 신과 함께 앉아 있던 여는 살짝 웃었다.


 죄송합니다. 어제 과음을 해서요…….

 나야말로 미안해요. 상황이 좀 급해서.

 평소에 연락 잘 안 하시는 분이신 걸요. 사정이 있으셨겠죠.


 여는 선에게 기꺼이 제 미래를 맡길 수 있겠단 확신을 받았다. 그녀는 신과 살고 있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보장받을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고, 제가 바라보는 앞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사람의 곁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그는 그런 제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런데, 누가 누구랑 싸웠길래 연락을 주신 건가요?


 그런 선이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오빠랑 그 애랑요. 여기까지 와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데, 좀 데려가요.

 혹시 은탁이……. 은탁 씨 한테 따로 연락 없었나요?


 설마, 연락은 했겠지. 가볍게 생각한 여는 폭탄 하나를 더 맞았다.


 네. 전혀.

 …금방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는 제 몫으로 빼둔 휴일이 통째로 날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부족한 인원수로도 기득권을 잡게 한 3차 성징을 마친 사람 특유의 감각이 그렇게 일러주고 있었다. 술 마실 때나 좀 말리지. 억울함에 통화가 끊기자 마자 폭탄 맞은 까치집에 폭탄 하나를 더 터뜨린 그는 털레털레 일어났다. 이 꼴로 밖에 나다닐 수는 없었다.




 세 시간 뒤, 때 빼고 광 낸 여는 선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에 들어섰다. 저택의 주인이 알파나 오메가라면, 손님도 알파나 오메가인 경우 몇 배는 신중하게 걸음해야 했다. 주인이 초대했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방문 자체가 주인에게 실례이기 때문이다.


"가주님은 어디 계신가요?"


 배우자가 있고 함께 생활하기라도 하면 더더욱 그랬다. 한 저택에서 알파나 오메가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건, 저택 밖에서라면 충분히 자제할 향이나 충동을 배우자와 함께 풀겠다는 뜻을 비치는 것이다. 그런데 제 3의 누군가가 그 안에서 머물다 간다면 한동안 향이 저택 내부에 남을 것이고, 그 향이 다 날아가기 전 까지는 그들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셈이다.


"아버님이요?"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선은 가족 정도라는 걸 제 부모님을 뵙기 위해 본가에 갈 때 마다 느끼는 여로써는 곧 가족이 될 예정인 가문의 저택이라 해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잠자코 선의 뒤만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를 안내하던 선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도 헷갈려 하며 잠시 뒤를 돌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바싹 굳어 있었다.


"어머님이랑 같이 휴가 내시고 별장 가 계세요. 한동안 안 오신다고 연락도 왔구."

"아, 네."

"2층만 안 가시면 돼요. 거긴 전부 부모님이 쓰시니까."


 시선을 돌리며 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긴장 풀라는 소리를 곱게 돌려 말하는 선의 배려에 그는 역으로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런 그를 본 선은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었지만 타고난 절제력으로 제 충동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는 교양있는 알파로 여를 대하고 있었고, 여와의 결혼에 거부감을 비치지도 않았다. 여는 그런 선을 보며 신과 모종의 거래를 마친 뒤일 거라 짐작했다.


"저 방, 보여요?"


 그녀는 1층 안쪽 방을 가리켰다. 입구에서 왼 편으로 시야를 돌렸을 때 방문 몇 개를 지나면 나올 방이었다. 여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은 다른 방과 다를 바 없는 짙은 등나무 빛을 띠고 있었지만 문 너머의 익숙한 향 만큼은 오늘 저택에 처음 온 그도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저기예요. 통 나오지를 않네."


 원래 저러던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불안해서. 부탁 좀 할게요. 선은 말을 마치고는 오른 편으로 발을 돌렸다. 여지 한 줌 없이 칼 같았다. 자연히 여만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 저택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저택에 사는 사람도 신과 선 말고는 전부 공적인 자리에서만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 뿐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선을 불렀다. 저, 써니 씨.


"네."

"은탁 씨 데려오는 게 제일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불러와도 될까요?"

"오란다고 오겠어요?"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곧게 걸어가선 김 신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선의 방인 듯 했다. 이 이상의 도움은 없을 거라는 단호한 의사표현에 여는 할 말을 잃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신이 알파 특유의 감각으로 그녀와 제가 하는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남았을 걸 알면서도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 방 안에 있는 그를 부를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똑똑, 낮고 깊은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왔냐?"


 여는 속을 쓸어 내렸다. 문 너머의 제 향을 맡을 정도라면 선이 우려한 것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저와 이야기 할 의지도 있는 것 같았다. 곧 화해하고 계획을 이어 갈거란 생각에 긴장이 풀린 그는 선과 함께 있을 때보다 한결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들어가도 돼?"

"거실 가 있어. 금방 갈게."

"거실이 어딘데?"


 팅, 통, 퉁,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리저리 튕기던 말이 잠시 끊겼다. 


"몰라?"

"모르지. 처음 와 보는데."


 같이 산 세월이 길었고 지금도 동거하는 처지라지만 엄연히 그는 신의 본가에 처음 온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신은 그를 안내하기 위해서라도 밖에 나가야 하는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곤 선을 떠올렸다. 늘 치밀한 그녀의 예리한 한 수였다. 부르는데 안 나온다고 제 발로 걸어나오게 만들 줄이야. 신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면서 허, 빈 웃음을 냈다.




 가신으로 유 가를 둔 선의 가문은 가주의 직계 자손인 선과 신, 모두가 알파로 발현하는 바람에 네 가족 중 가주의 반려만 오메가였다. 가주는 세 알파 사이에서 사는 배우자를 위해 때가 되면 둘 만의 휴식기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다.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여에게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들렸던 건 제 오메가의 곁에 유일한 알파로 서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심과 신과 선에게 가문 경영권을 점차적으로 넘기려는 이성적인 의도를 겸한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이번엔 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저택 곳곳에 스며든 세월을 음미하고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저택을 관리해온 김 씨 가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신이 저택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을 보여주겠다며 데려간 방은 창고의 수준을 넘어 작은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싸웠어."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고고하게 방 가운데에 서 있는 등잔걸이의 한 기둥에 제 몸을 기댄 등잔이었다. 별 다를 것 없는 모양새였고, 신은 가문에서 제일 아끼는 고려 황실의 물건이라는 이야기만 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검을 보여주겠다며 먼저 몇 걸음을 앞서 나간 순간 그에게는 무심코 지나간 그 등잔이 흥미 거리가 됐다. 궁금한 게 많았다. 불을 붙여본 지는 얼마나 오래 된 거지. 기름이 들어있다는 건 매일같이 갈아준다는 걸텐데. 거기에 열이 옮겨붙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판 추측만 할 수 있는건 저와 신의 관계와 똑같았다.


"그건 알아."


 신은 어떤 물건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정작 그에게는 등 뒤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여로써는 신의 눈을 보지 않고서는 그의 진심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가 궁금한 거지."

"사귀는 사이에 싸울 수도 있지."


  그리고 신은 늘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 사람 이었으므로, 이번에도 화제가 바뀌기 전 까지 그의 눈을 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 애랑 싸우기는 왜 싸웠는지, 이 등잔은 김씨 가문에서 왜 소중한 건지, 안전한 줄 알았던 둘의 사이가 왜 나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무슨 대답을 들어도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근거가 없었다.


"뭐부터 볼래. 청자?"

"집 나갈 정도로 심각한 적은 없었잖아."


 청자는 이미 이야기 할 이유가 없어진 듯 했다. 선 곳 마저 막다른 곳이었다. 그는 깊게 한탄했다.


"그래."

"집에서 한 자리 달래?"

"아니. 걘 그럴 가족도 없어."

"……몰랐는데."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던 그녀의 가정사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듣는 상황은 영 탐탁지 않았다. 안면을 튼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자신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던 은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 좋은 방향으로 있을 거라 어느정도 짐작한 여는 그녀의 이야기만 들었지, 그 주변의 이야기를 캐묻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도 이해를 못 하겠는 건.


"그렇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돼?"


 오히려 가족이 없는 경우를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가문의 시작을 제 가문의 자손으로 시작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한 가문의 시조가 나온다는 명예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신의 가문도 그럭저럭 호의적인 편이었다.


"아니. 차라리 그런 문제였으면 좋겠는데."


 신이 웅얼거렸다. 저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잘 들리지도 않아, 그는 신을 불러 세웠다.


"안 들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야?"


 그와 떨어졌던 세월 동안 사람이 크게 바뀌지도 않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그런 그가 아는 김 신이란 이런 상황을 겪을 가능성조차 없는 사람 이었으므로, 이제는 둘 간의 관계도 관계지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런 말을 제 스스로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네가?"


 자기 자신보다 가문을 더 먼저 생각해서? 그렇게 중요한 가문보다 은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 못해 제 선자리까지 나왔던 사람에게 믿음을 못 가진다는 게 말이 되나? 김 신의 이름 자가 울 판이었다.


"그 애, 의지를 안 해."

"너를??"


 들으면 들을 수록 가관이었다.


"네가 그때 그랬었잖아."

"나 뭐."


 그와중에 뜬금없이 불려나온 제 존재가 이질적인 것 까지 완벽하게 혼란 그 자체이기까지. 둘 만의 관계여야 할 이야기에 제가 끼어드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게 싫어 은탁의 3차 성징만 기다리고 있는 제 목덜미를 잡아 채는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헤어진다 어쩐다 했던 거. 기억 안 나?"


 하지만 이래서야, 빠져나갈 수가 없다.


"너 설마, 내 탓이라고 말하는 거야?"

"네 탓은 아니고 그냥. 알파와 베타의 관계는 항상 불안해."

"불안할 게 뭐 있어. 억제제 다 들고다니는 세상에."

"러트가 갑자기 당겨지기라도 하면? 우린 아직 각인이 불가능 한 관계인데?"


 그들도 결국 인간이었다. 이제는 제도권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3차 성징기를 거쳐 발현된 형질은 사회에서 특출난 강점이라는 걸 알았지만 러트나 히트 사이클이 오는 순간 그 전까지 얻었던 이점이 전부 약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구조까지 전부 배워 알고 있었다. 3차 성징기를 거친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회를 따로 만들 정도로 폐쇄성을 가지게 된 건 이런 이유도 있다.


"괜찮다고 쳐. 은탁이 걔, 발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보다 나랑 연애하는 것부터 알려졌어."


 발현 가능성 이야기 나오기 전 까지, 그 애가 고운 시선 받으면서 다니기는 했던 걸까? 어디를 다니더라도? 지 은탁이라는 사람이 발현이 예정되어 있는 베타라는 게 알려지기 전에 그녀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일들을 신은 알지 못했다. 어쩌다 알아차려도 은탁은 그 모든 걸 신의 곁에 선 저에 대한 질투로 단정지었다. 맞는 판단이었다. 신도 알았다. 하지만 애정 관계란 항상 옳은 판단만 하기 위해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늘 정답일 수는 없으니 간혹 틀리는 순간이 와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연인이었다. 적어도 신에게는 그랬다.


"난 그 애가 이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격이었거든."


 그는 은탁이 이별을 이야기할 때 덜컥 충격을 먹었던 제 자신을 떠올렸다. 과거의 저라면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을 제가 어느새 신과 같은 방향으로 그 일을 바라본다는 걸 알았다. 신은 등잔을 보고 있었다. 불 한 줌 붙지 않은 잔이 신과 여, 둘의 시선을 전부 받고 있었다.


"그런데?"

"차라리 너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해도 사귀는 나한텐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이 없어."


 한 번도 그애가 힘들다고 털어놓는 걸 본 적이 없어.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관계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신은 그날 여의 한 마디로 그녀와 연인 관계를 시작했던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가 자신에게 집착한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베타의 기준으로는 건전한 관계였고, 알파나 오메가의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말라붙어 버석한 관계였다.


"단 한 번도."


 베타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의미가 없는 건가, 아니면 알파와 오메가의 그것이 과도하게 많은 의미가 있는 건가. 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할 고민과 맞닥뜨렸다. 알파로 각성을 끝내가던 신을 마음에 품은 스물 몇 살의 베타 왕 여의 사랑은 당사자조차 희미해져 추억으로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정략 결혼이었던 신의 부모는 알파와 오메가 간의 결합이라는 안정성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부부로 살아온 데다가, 제 자식들이 장성하고 나서도 배우자를 위해 거처를 옮겨가며 배려하는 기저에 정만 깔리는 게 아니라 사랑과 집착을 같이 깔아 대한다.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여는 둘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과 은탁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건 형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라면 차라리 두 사람 모두 인간인 게 문제였다.


"난 아닌데, 은탁이는?"


 애초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확실하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온전한 관계란 건 불확실성을 건드리지 않는 관계를 뜻한다. 그렇기에 안정적이고, 그렇기에 위태롭다. 그런 둘의 사이에 여는 저도 모르게 그들의 관계에 작은 불씨 하나를 던진 셈이 됐다. 여는 그제서야 제 한 마디가 어디까지 상황을 만들었는지 완전히 알았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냐. 그냥……."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터지지만 않았다면 무사히 발현한 은탁과 그런 은탁의 곁에 섰을 신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영원히 얌전할 등전 안 기름도 주변을 지나가던 잔불 한 줌과 마주치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자신을 목숨 째로 불사르는 것 처럼. 




 그들의 냉전은 생각보다 길어져 은탁과 선이 여의 주선아래 처음 만날 날을 한 손으로 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여는 두 사람의 만남을 준비하면서도 신에게 그날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아예 신과 은탁, 둘의 관계에 대해 그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써니 씨, 왕 여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은탁 씨 소개 말인데, 이번 주 목요일 괜찮으세요?


 오히려 그런 그에게 신이 다가와 부탁을 하고 갔다. 이대로 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인연이 끝날 거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네 :D 여섯시 반이죠?


 장소도 예약하고, 시간도 잡고, 약속까지 잡아 전송 버튼도 터치했지만 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곧 결혼할 사이끼리 관계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다면 신을 데리고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선과 은탁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려 한다면 십중팔구 약속은 파토였다.


 네. 그때 뵙겠습니다 :)


 몰래 데려갈 것인가, 데려가지 않을 것인가에 관한 저울질이 끝나지 않는 이유였다.


 은탁아 목요일 괜찮다고 했지

 ㅇㅇㅇㅇ 비워놨어여

 ㅇㅇ 그날 보자 써니씨랑 같이 갈게

 헐진짜요? 아 떨렼ㅋㅋㅋㅋㅋ


 선은 그 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은탁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고, 은탁은 선을을 짝사랑이라도 하나 의심할 정도로 대놓고 들떠있었다. 이런 둘에게 대뜸 신을 데려간다면 제가 남아나지 않을 건 확실했다.


 오늘부터 팩 쎈거해야겠다 나 완전 잘보여ㅑ댐

 선보냐

 먼 선이에옄ㅋㅋㅋ 선보다 더중요하짘ㅋㅋㅋㅋㅋㅋㅋ


"얘기는 잘 돼가?"

"어. 목요일."


 그렇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신과 15 년을 넘게 같이 산 친구 딱 한 번만 눈 감고 좀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맴돌고 있었다. 일 자체는 훨씬 말끔하게 풀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지. 말 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 여에게 신이 다시 물었다.


"몇시, 어디?"


 세월이 무거워서 그랬을까, 그 중 5 분의 1 간신히 채웠던, 이제는 기억조차 의심이 가는 왕 여의 사랑이 아까워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면 은근하게 제 향까지 풀어가며 절박한 심정을 티내는 그가 안타까워서 그랬을까. 여는 눈 딱 감고 대답했다.


"여섯 시 반, 늘 가던 곳."


 같이는 못 가. 적당히 시간 벌려놓고 와. 몇 마디씩 말을 덧붙였지만 신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다."


 여는 채널을 돌렸다. 뉴스, 봤던 거, 재방송, 재미없는 거, 기타등등, 기타등등. 영 볼 만한 게 없었다. 그는 버튼 하나를 더 눌렀다. 삐롱. 방금 전까지 화면에 온갖 색을 쏘아대던 TV가 눈을 감았다. 그도 눈을 감았다. 향은 또 왜 안 걷고 가, 저거.




 예의를 아는 사람 간의 만남이었고, 말끔한 사람 간의 만남이었다. 선이 은탁에게 무조건 네 편이니 걱정 말라는 말을 한 게 만난 지 두 시간 조금 더 됐을 무렵이었고, 은탁이 선의 부케를 받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건 그 뒤로 이십 분 쯤 뒤의 일이었다. 여가 그 모든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는 은탁이 자로 잰 듯 삼십 분에 한 번 화장실에 가선 십 분 남짓 돌아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은탁이, 어디 아픈 곳 있어요?"

"항상 건강하던 애라 저도 잘 모르겠어요. "


 그는 말끝을 흐렸다. 저 건강 빼면 시체거든요. 완전 튼튼! 은탁이 저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본능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신이 아직 오지 못했지만, 은탁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그도 제 사정을 이해해줄 것이었다.


"오늘은 좀 빨리 헤어지고 다음에 한 번 더 시간 내셔서……."

"지 은탁씨 일행 분, 계십니까?"


 선과 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본능에 적신호가 켜졌다.


"잠시 따라 오시겠어요?"


 큰 일은 아니어야 할텐데, 중얼대면서도 어느 한 명 괜찮을 거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큰 일이 아니라면 지배인 까지 불려나와 그들을 데려갈 리가 없었다. 이 쯤 되고보니 둘은 은탁이 어디에 있건 최대한 빨리 상황을 봐야 겠다는 생각과 조바심만 남아 발걸음만 급해졌다. 얼마 지나지않아 둘은 화장실 바로 옆, STAFF ONLY 팻말을 지나 은탁을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아파요? 나, 나 지금 심장이. 심장이 너무 아파요."


 제 몸, 그중 심장 부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은탁은 깊고 두꺼운 고통 한 굴레만 진 채 동공을 점점 키워나갔다. 한 알파와 한 오메가는 단번에 눈치챘다. 시작이었다. 나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덕분에 대비하지 못한 발현 치고는 천운 중 천운이었다. 선은 가문 전속 주치의에게 급히 연락을 넣었다. 여는 근처에 대기하던 제 사람 몇을 불러 차를 준비시키는 한편, 신을 불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말 잘 들어, 지 은탁. 너 지금 발현하려는 거야."

"막, 너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기분 내고 왔다며 발간 빛으로 덮여 있던 은탁의 뺨이 창백하기 질리기 시작했다. 발현에 동반되는 고통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고통에 못 이기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한 쪽으로 온전히 발현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두 사람은 견디라는 말도, 참으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병원 가자. 사람 금방 와. 일어날 수 있겠어?"

"못 하겠어, 못 해. 못 해요. 아파 죽을 것 같아."

"기대. 한 층만 내려가자."


 여는 은탁을 부축했다. 선은 이미 여의 수행원들을 찾아 내려가고 있었다. 지배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 그들은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의 수행원들과 김 씨 남매를 발견했다.


"데려가요."


 수행원에게 은탁을 인계하고 서둘러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늦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두 사람 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빨리 안 가면"


 늦어요, 까지 말을 이으려던 여는 두 남매에게 각각 손목을 붙잡힌 채 멈춰섰다.


"기다려요."

"같이 가야지, 왜 이래요."

"쟤 말 맞아. 기다려."


 왜 자꾸 잡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그는 둘을 모두 뿌리치고 달려갔다. 그 다음에 있을 일을 직감한 둘은 어떻게든 여를 말리기 위해 덩달아 달렸다. 갓 발현하는 시점이 되면 심신 모두 진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러면 상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 제 형질과 반대의 형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끌어당긴 뒤 향을 내뿜는다. 3차 성징을 겪는다는 건 사람을 끌어들이거나 향을 내뿜는 것 등을 조절해나가는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충동 조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첫 발현이 가까워지면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충동 조절을 못 하니까.

 은탁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신과 선이 아닌 여에게만 반응이 온다는 건 그녀가 알파로 발현할 것이고,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오메가인 여를 통해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는 의미였다. 


"멈춰!"


 여는 기어코 은탁의 근처까지 도착했다. 누가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 그만큼이나 그에겐 급박한 일이었다.


"나 왔어."

"도……."

"이제 괜찮을 거야."

"도망가요."

"…지 은탁?"


 그녀가 제 향을 처음으로 풀어내려던 그 순간 수행원 한 명이 급히 차 문을 닫았다. 이런 일에 대해 잔뼈가 굵은 사람들만 데려온 덕분에 최악의 불상사는 막은 셈이다. 하지만 그녀의 향은 이미 그 주변에 번져 버렸고, 우성인 것이 분명한 농도로 번진 덕분에 바로 곁에 있던 여가 호르몬 과다 노출로 혼절하는 것 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Posted by _zlos
Goblin2017. 5. 4. 20:15



 오메가버스 중의 연작. 취향이 아니라면 지나가세요.






 아직까지는 결혼이 엎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양측 가문에서는 동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둘에게 결혼식 날짜부터 잡자고 연락을 넣는 판국이었다. 놀란 여가 약혼식으로 타협안을 내자 신은 제 입장을 여의 입장에 맞췄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고, 실제로는 신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한 여의 선택이었다. 약혼식은 간략하게 진행만 해 두고 결혼식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어 하는 가문의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가문 간 합의를 거쳐 둘은, 혹은 셋은 1 년에서 2 년 남짓의 시간을 벌었다.


"히트 사이클 언제 쯤 오냐?"


 자연스럽게 신과 여의 동거 기간도 길어지고 있었다. 새로울 것 하나 없을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어서, 여는 옛날 기분이나 내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 알게 된 건, 애정 전선에서 아예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건지는 몰라도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는 제법 괜찮게 고른 것 같다는 점이었다. 러트나 히트 사이클을 약점이 아니라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한 집에서 산다는 사실이 그에게 안정감을 선물했다. 각성이 늦었던 만큼 그의 지인들도 발현 전의 그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보니 그의 3차 성징기가 끝난 뒤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생각이 맞질 않았다.


"보름 전후? 겹쳐?"


 3차 성징을 거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인식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건 성관계에 관한 입장 차이다. 차이가 나는 건 러트, 혹은 히트사이클 뿐이라지만 반대라는 개념부터 다 같은데 한 가지만 다를 때 쓰는 것이긴 하다. 오히려 베타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인 알파-오메가가 수적 열세를 뒤집고 기득권을 잡은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점이 존중받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 이번엔 안 겹쳐. 너 끝나고 일 주일쯤 뒤에 시작이야."

"그래?"


 과거의 여 또한 그랬지만 베타는 성욕을 통제할 수 없는 시기가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알파의 러트,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을 조절하는 억제제 관련 산업이 매년 규모를 불려도 사치재가 아니라 필수재로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평온한 일상 전체가 휘둘리는 일이라는 걸 배우기는 하지만 그뿐, 어느 쪽으로건 발현만 하면 인종, 성별, 출신 따지지 않고 기득권으로 편입되는 세상에서 돈이나 기회가 부족해 억제제를 구하지 못하는 알파 혹은 오메가의 사례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역으로 그들의 세계에 끼지 못하는 베타의 신분으로는 그러한 상황을 볼 일도 거의 없었다. 안 보인다고 안 믿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가까운 개념도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억제제 들고는 다녀."


 히트 사이클 건에 한해서는 이해할 생각도 하지 않을 지인보다 김 신 한 명이 더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됐다. 여는 제가 베타일 적 연애를 이어가지 못하고 성격차로 헤어진 연인을 떠올렸다. 김 신과 함께 지낸다면 그 꼴은 안 날 테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3 개월 짜리 사랑보다, 3 년 짜리 애정보다, 30 년 갈 존중이 나았다. 본딩을 한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가능성은 배제하는 게 맞았다. 본딩은 커녕 애정 관계 자체를 포기한 그다.


"어. 나 늦는다."

"회사 가? 쉰다며?"

"은탁이 보러 가는 거야. 회사 가는거 아니고."


 그는 말을 맞출 겸 안면을 텄던 은탁과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은탁은 맑고 밝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첫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을 여에게조차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만으로 그 김 신이 어떻게 푹 빠졌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게끔 납득시킨 사람이었다. 


"네가 은탁이를 왜 봐? 가만. 은탁이? 너, 지금 은탁이보고 은탁이라고 했어?"

"우리 가끔 만나는데?"

"우리?"


 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술 마셨어? 여는 심드렁하게 받아치며 가방을 들었다.


"너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데?"

"너 출장갔을 때. 간다."

"야, 어디 가는데. 말은 하고가야지. 어디로 가냐니까? 나 기다린다? 기다린다고!"


 동공 크기까지 키워가며 이성을 잃어가는 신을 뒤로하고 그는 집을 나섰다. 뒤의 몇 마디는 듣지도 못한 채였다.




"진짜 그랬어요?"


 은탁은 한참을 웃다가 옆 테이블 사람이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볼 쯤이 되서야 간신히 진정했다. 여는 서버에게 물 한 잔을 더 부탁했다.


"체한다."

"안 그래요. 저 건강 빼면 시체거든요. 완전 튼튼!"


 한 입 남은 판나코타를 아까워 하면서도 곧 나올 케이크를 기대하랴 정신이 없는 그녀와, 그런 그녀에게 제 몫으로 나온 판나코타를 선뜻 내미는 그나, 두 사람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김 신이 아니고서야 성립조차 할 수 없었던 관계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광경이었다. 


"그래서, 진짜 그랬냐고?"

"네!"

"어. 조금만 더 놀렸으면 주먹으로 쥐불놀이 했을 걸."

"아! 비유 완전 옛날 사람이야!"

"나 원래 이래. 걘 원래 안 그러는 사람이고."


 여는 그새 테이블에 올라온 케이크 접시까지 맞은편으로 밀어 놓았다. 은탁의 연락으로 잡힌 약속이었다. 왕 여씨 안녕하세요! 저 지 은탁입니다! 다음 주 쯤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 밥 한 번 사주시면 안 될까요? 요새 한참 쪼들려 살았거든요. 마침 점심시간 막바지였던 여는 다다다다 갱신되는 채팅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모르는 새 입가에 미소까지 띄워가며 비싼 거 골라, 비싼 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는 좋은 지인을 알게 된 셈 치기로 했다. 연인 삼을까 싶지는 않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겪으며 살면 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김 신이……. 원래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 아니면 선 그어놓고 안 넘는 스타일이거든."


 그리고 지금은 이 정도는 되어야 김 신의 울타리 안쪽을 볼 수 있는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가 신의 울타리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 세월이 길어서 울타리 밖에있어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일 뿐이지 하나 하나 뜯어보면 하나 부터 열 까지 전부 추측이었다.


"설마요. 저희 사귀게 된 것도 그분이 먼저 오셔서 시작한 건데요?"


 그래서 여는 그의 울타리 안에서 그의 생각을 온전히 듣는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그의 가족들이나 제가 바라보고 있는 은탁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은 했지만, 여 자신은 이대로 그와 배우자가 되어 한 가족 대접을 받는다 해도 울타리 안 사람이 될 수 있을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네가 특별한 거야."


 시간은 최대한 벌어줄 테니 발현만 해라. 그는 어느새 제 가문 사람들이 제게 버릇처럼 하던 말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목적이 가문의 권력보다 제 처신에 더 무게가 쏠려있기는 했지만, 권력적인 면까지 전부 고려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가?"

"내가 보기엔 그래. 그래서 네가 3차 성징기에 들어갈 가능성 하나 보고 기다리는 거고."

"저, 근데요."


 그렇기에 그가 밀어둔 접시를 막 발견한 은탁의 한 마디가 그에게 더 깊게 꽂혔던 걸지도 모른다.


"만약에 저희 둘이 헤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만남이 있다면 이별도 있는 법이다. 간단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다. 알파나 오메가의 경우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은 베타에 비해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본딩을 맺은 상태면 더했다. 시작이 어떻건 본딩은 결국 삶의 방향을 사랑을 향해 틀어버린다. 심지어 그 대상을 한 사람으로 한정짓기까지 한다. 이별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면에서 부인하는 결속 관계는 일견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 수준이 베타의 시선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다.


"뭐?"


 오죽하면 베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는 상태에서 오메가로 발현해 시작한 3차 성징기를 끝낸 지 1 년이 안 된 여 조차 이별을 이야기하는 은탁의 말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실제로 이별을 겪어본 적도 있던 여지만 어느샌가 그는 신과 은탁의 관계에선 이별이 낄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걔 혹시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녀는 케이크 위의 딸기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둘 다 성인이잖아요. 무슨 일이 생길 지 장담 못 하니까."

"못하긴 뭘 못 해."

"제가 어느쪽으로건 발현 못 하면 다 엎어지는 거라면서요. 기간도 정해져 있고……."


 여는 말을 골랐다. 그녀의 말 그대로 그들이 짠 계획은 신과 여, 둘 사이의 결혼식 전 까지 은탁이 3차 성징기를 시작한다는 가정하에 세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제한에서 벗어나 있는 계획들은 말 그대로 혹시나에 대비한 것들 뿐, 제대로 된 계획이라고 말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안 엎어져."


 하지만 신과 그는 은탁의 시선에서는 이상해 보일 정도로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요? 3차 성징은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요."

"알 수는 있어."


 베타인 은탁에게 이해시킬 수 없어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두 사람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은탁은 두 사람의 결혼식 이전에 3차 성징기에 들어선다. 알파건, 오메가건. 베타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시선으로 눈치챈 것이고, 둘만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래요? 그럼 알파가 될지, 오메가가 될지, 그런 것도 알아요?"


 이미 신과 여의 가문에서도 은탁의 존재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알파-오메가 간의 정략결혼을 파토낼 여지가 있는 은탁에게 본래대로라면 한바탕 난리가 났어야 했지만 그녀와 그녀의 지인들이 무사한 이유도 그녀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신이 숨겼고 여가 묵인했기에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것일 뿐, 그들이 살고 있으며 은탁이 곧 살게 될 세계는 기질이 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시선을 바꾸는 세상이었다. 이 사실을 그녀에게 언제 알려줘야 할지 여는 천천히 시기를 재고 있었다.


"발현하기 전 까진 몰라."


 동족의식 같은 거라서. 그는 뒷말을 삼켰다. 딸기 케이크를 다 먹은 은탁이 마침 여의 몫으로 나왔던 치즈 케이크 위의 블루베리 한 알을 입에 넣더니 있는 표정 없는 표정 다 내며 얼굴을 구겼기 때문이다.


"왜 그래?"

"이거 엄청 셔요. 와. 이럴 줄 알고 저 준 거예요? 완전 나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손도 안 댔어."


 투닥대던 둘은 은탁이 제 신변잡기를 마구잡이로 풀기 시작하자 그대로 이야기를 갈아타선 한참을 이야기했다. 창 너머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는 제가 신에게 한 말을 그대로 지켰다. 


"진짜 늦게 오냐? 30 초만 더 늦었어도 자정 채웠겠다."


 신도 그에게 한 말을 그대로 지켰다. 


"여태 안 자고 뭐 했어?"

"너 기다렸지."

"날 왜 기다려?"


 하지만 기다릴 거란 이야기를 미처 듣지 못하고 집을 나선 여에게는 무슨 일 있냐고 되물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평소 신은 제 자신이 정해둔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데에 제법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의 일상을 생각하면 자정 전후의 그는 거실에서 여를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제 방에서 막 잠이 들었어야 했다.


"말할 게 있어서."

"전화 하지."

"얼굴 보고 해야 하는 이야기라 기다렸어. 앉아 봐."


 여는 자정에도 훤히 켜져있는 거실 전등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신이 권한대로 소파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에 앉은 신은 선 대신 여의 선자리에 나와 그에게 부탁하던 그 순간 처럼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때처럼 컵에 물 한 잔을 얼음까지 띄워와 한 모금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했던 적 있어?"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 15 년을 같이 사냐?"


 살다살다 술 안 푼 김 신이 헛소리 하는 걸 다 보네. 잔다. 여는 소파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걸어갔다. 신은 그런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말 몇 마디로 그를 돌려 세웠을 뿐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해?


"너, 나 사랑했었어?"


 여는 생각했다. 은탁이 이야기 하던 사람 주지 말 걸. 얼마전 신이 저를 보좌할 사람을 급하게 구한다기에 흔쾌히 넘겨준 결과였다. 방심했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대놓고 걸음까지 멈췄으니 부정은 못 하겠고, 그러면…….


"지금은 아냐."


 사실을 말할밖에.


"그랬던 적은 있단 거잖아."

"어."


 다는 말고, 알 만큼만. 부부도 아니고, 부부 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이제와서 신에 대한 그의 연정을 그 스스로가 이야기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 모든 파편덩어리는 천천히 가라 앉아 덩어리가 되더니 베타 시절의 추억으로 성격을 바꾼 지 오래였다. 게다가 그는 또 방심하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

"전에."


 베타였던 시절의 그에겐 신을 사랑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오메가가 된 지금 그 당시를 되짚어보면 기억은 여전히 강렬했지만 감정은 약간의 아련함만 남기고 전부 날아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지금의 여는 그때 그 감정이 어떻게 그때 그 시절의 자신을 흔들었는지 이제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말도 안 했었잖아."


 그는 멀게만 느껴지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모든 걸 되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에게는 제 윗 침대에서 자던 신이 멀게만 느껴져 아무도 모르게 몇 날 며칠 밤을 창문만 보던 순간이 있었다. 연인이 되자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단 한 명도 안 남기고 전부 쳐내던 신의 모습에 반은 기대하고 반은 포기하던 밤도 있었다. 그와의 동거를 때려치고 나올 용기도 없는 자신이 미웠던 밤도 있었다.


"말 할 정도로 큰 감정은 아니었나 보지."


 거짓이었다. 여는 그 시절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당시의 자신이 신에게 가졌던 감정의 무게는 정확하게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기 자신을 보고 확실히 결론 내렸다. 오늘 밤은 그 밤들과 달랐다. 시야 한 번 돌리지 않아도 고요한 밤이었고 신을 마주 보고 있어도 평온한 밤이었다.


"은탁이나 신경 써.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한테 헤어지면 어떻게 되는거냔 소리를 해."


 알파와 베타의 사랑은 같은 집 사는 사람이 한참 보여주고 있었고 베타와 베타의 사랑은 직접 해본 그는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에 대해 점점 미련을 버리고 있었다. 방어기제로 시작했지만 합리적인 결과가 나오는 걸 보면서 제 결심이 방향을 제대로 잡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한결 개운해진 목소리로 그는 다시 한 번 잔다, 말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은탁에게 선을 소개 시켜주기로 약속한 걸 떠올린 그는 화면을 몇 번 건드려 일정을 추가했다. 더이상 창문 밖이 궁금하지 않았다.




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