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blin2017. 5. 17. 01:14



 오메가버스 설정 주의. 니키님께 드립니다.



 여는 끝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먼저 한 손에 들고 있던 페도라를 먼저 건 다음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 다음,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머리를 툭툭 털어 눌린 부분을 살짝 풀며 의자에 앉은 그는 종이를 꺼내 단단히 고정해둔 뒤 잘 닫아둔 먹물 든 병의 마개를 열어 작은 벼루에 부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붓을 들어 글을 한 줄 썼다. 


 도깨비의 아이를 뱄다.




 꼬박 구 년만에 인간의 부름을 타고 속세로 돌아온 한 수호신이 있었다. 인간 출신이기에 성별이 있었고, 여와는 구면이었다. 돌아오더니 늦게나마 행복을 찾아가던 그의 발걸음에 남몰래 복을 빌기도 했던 차사는 그의 부재를 홀로 견딘 자기 자신의 세월은 못본 척 넘겨버렸다.

 한참 스물 아홉의 은탁과 행복한 삶을 살던 신을 지켜보던 여는 일, 이년은 예전에 넘겨버린 제 외사랑도 드디어 그 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도깨비 내외는 늘 행복해보였다. 이런 둘이라면 문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등을 돌릴때면 그의 등 뒤를 따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누구든 나 좀 헤집어 줬으면 좋겠다.


 그럴때면 그는 오메가로써의 형질이 알파 형질을 찾고 있는 것이겠거니, 애써 넘겨냈다. 김 신은 도깨비가 되면서 알파 형질이 순식간에 개화한 경우에 속했고, 왕 여는 차사직을 너무 오래 맡은 탓에 오메가 형질이 몸에 막 자리잡기 시작한 사이에, 은탁은 그 어느쪽의 형질도 반응하지 않는 베타로 살았다 보니 집 안에 알파는 신 뿐이라서 그를 욕심내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애초에 여는 그들의 사랑이 형질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운명은 늘 그렇듯 그 집에 산다 싶으면 하나같이 얄궃게만 찾아왔다. 신과 은탁은 형질의 벽은 넘었지만 생사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도깨비 신부는 서른을 못 넘기고 페도라를 쓴 여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없었을 생을 억지로 늘린 셈이라 언제 죽어도 장수한 것이 되는 그녀의 생은, 그 끝을 자기의 선택으로 매듭지으며 신에게 기다림의 굴레를 다시 씌우고 말았다.


"금방 오겠지."


 지칠대로 지친 신에게 말버릇이 하나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다. 신부조차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긴 인연으로 내린 누군가를 원망이라도 했다면 좀 나았을까, 그에게는 이제 그럴 힘 마저 남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여는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둘은 마침 알파와 오메가였고, 오메가 형질은 알파 형질과 반응해 쌍방을 안정화하는 특성이 있었다. 해서, 언제부턴가 집 안에서 신이 여를 향해 양 팔을 벌리면 여는 양 팔로 신의 머리를 끌어 안고 있었고, 그러면 신의 팔은 자연스레 여를 끌어안은 채 천천히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 신은 여의 허리에 감긴 제 손을 풀며 말했다.


"고맙다."


 그럴때면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여의 외사랑은 매번 다시 끝났다.




 신을 진정시키는 건 왕 여가 아니라 오메가의 형질이라는 걸 여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신을 도닥이며 살았다. 텅 빈 마음을 채울 이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차사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산 자와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추는 것도 전부 업무가 되는 판에 서로의 위안이 되어줄 이를 찾는다는 건 복권 당첨 확률만큼이나 낮았다. 같은 차사들은 다 같이 오메가가 되어가는 판국이니 제 코가 석자에, 어디까지나 직장 동료 사이에 이런 일까지 터놓을 이유도 없었다.


"선배님?"

"어. 여기."


 그나마 말할 수 있는 상대라면 사는 곳이 가까워 가끔 만나는 민재 정도다. 


"잘 돼 가냐?"

"늘 바쁜 분이셔서요."


 그는 일찌감치 누군가의 눈에 들어 업을 끝내는 순간 그와 함께한다는 내용의 영원가약을 맺었다. 백년가약으론 너무 짧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전언 덕분에 그렇게 됐다. 언제부턴가 민재의 곁에 당사자만 모르게 주변을 맴도는 나비가 있다는 걸, 차사들은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모르는 차사는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여는 제 몫의 아메리카노에 빨대를 꽂았다.


"아니. 그냥. 이 때 아니면 바쁘잖아."

"가을 타십니까?"

"그런가. 싱숭생숭하네."


 그는 입을 달싹였지만 여에게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한채 제 몫의 카푸치노를 휘휘 젓기만 했다. 그의 곁을 맴도는 나비 만큼이나 여의 말도 안 되는 동거 이야기도 차사 사이에선 유명했다. 쟤는 도깨비 잡은 거냐? 억측이 사실인 양 돌았던 시절도 있다. 개중엔 여 만큼이나 드라마를 즐기는 차사도 몇 있었고, 그들은 은근히 도깨비 내외와 매사가 진지한 그 김 차사 사이에 불륜 관계라도 있는 거 아니냐며 음모론에 힘을 실었던 적도 있다. 모순되게도 그 김 차사 무리의 유흥은 도깨비 신부가 찻집에 들던 순간 박살이 났다.


"정 그러시면, 잘 말씀드려 볼테니 소개라도 한 번 받아보세요."

"차사가 무슨 소개팅이야."

"미팅도 해보셨잖습니까?"

"그땐 인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고, 지금은 인연도 없어."


 후생에서 알파로 각성한 선과의 이야기도 이젠 추억이 될 시기가 온 여다. 제대로 끝맺지 못했던 인연을 이제서야 보내준 그는 다시 만날 날까지 선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떠올릴 때면 늘 슬프고 아렸다. 행복이 멀었다.


"들은 게 있어서 그럽니다."


 지이잉. 벨이 울리기 무섭게 그는 벌떡 일어서 음료 두 잔을 들고 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멈추질 않았다.


"뭐가."

"저희 가약, 월하께서 도와주셨거든요. 그때 살짝 여쭤봤어요."

"내 인연을 물어봤다고? 네가?"


 팍삭 가라앉았던 여가 관심을 가지는 티를 내자 그는 신나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 좋은 방향의 관심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런 것 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당장 그에게 중요한 사실은 웬간한 일은 심드렁하니 넘겨버리는 그 선배가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 한 가지였다.


"처음에 선배님께서 저 많이 도와 주셨잖습니까. 그분께서 늘, 덕을 봤으면 덕으로 갚으라고도 하시구요."


 박중헌 건을 처리할 때 그가 민재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건 그 전에 민재와의 인연이 그만큼 닿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그 순간,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박 중헌을 잡아 넣어야 했지만 그만큼 위험한 망자에 관한 일을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갓 발령받은 새끼차사가 삘삘대는 데, 그걸 모른 척 해?"

"여전하시네요."


 민재는 그렇게 말하며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시더니 설탕을 더 넣었다. 그가 갓 발령을 받았을 때, 동기들이 말하는 사수의 대부분은 신고식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거나, 저 차사도 제 몫을 해야지, 같은 그럴싸한 이유를 대며 단 한 번을 안 도와주는 게 통상적인 상황이었다.


"뭐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여는 김 차사 간 위계서열을 없앤 영웅이 되지는 않았지만 고된 일에 부딪칠 때 말 한 마디 없이 일을 거드는 은인이기는 했다. 정작 당사자는 제 행동의 어느 부분이 감사를 받을 일인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여튼, 찾아야 올 거랍니다. 선배님 인연이요."

"원래 그렇게 두루뭉술한 분이신가."

"저도 그때 처음 뵌 분이라, 그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제가 월하를 뵐 일이 있었겠습니까. 직접 아이들을 점지하고 다니신다는 삼신도 뵐 일이 없는 걸요. 민재는 변명하듯 말 보따리를 풀었다. 따지고 보면 삼신과도 인연이 있는 그지만 알지 못하는 인연은 없느니만 못했다.


"말씀 드려볼까요?"

"조금 있으면 환절기라 일 많아져. 내년 이맘때쯤에나 시간 좀 날까."


 여는 빨대로 쭉, 제 커피를 빨아들였다. 그는 인연이 커피를 마시는 만큼만 어려웠다면 매일 아침에 시작해 그날 밤에 끝나는 사랑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일 안 하시나 보네. 그는 민재의 말마따나 한낱 김 차사의 신분으로는 월하를 볼 일이 있겠냐는 생각에 몰래 흉이나 보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가을 타는 거 아니냐는 민재의 말이 맞기는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몇 주 지나지 않아 민재와 마주 앉았던 그 카페 그 자리에서 민재가 아닌 다른 이를 만나 그 누구보다도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단골 도장을 찍은 지 오래인 여는 저를 외면해주는 직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맑고 말도 그럭저럭 잘 통하는 상대라 여는 상대방만 괜찮다면 인연을 이어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제 양 어깨를 잡고 바닥으로 누르는 듯한 기분만 아니었다면 먼저 말을 꺼냈을 지도 몰랐다.


"평소엔 계룡산에서 나올 일이 없는데, 이렇게 또 나와보네요."

"계룡산 사시나봐요."

"네. 한 사백 년 좀 넘게 살고 있습니다."

"사백 년이요?"


 내가 기억하는 생만 구백 년이 넘는데, 사백 년 좀 더 산 이무기를 어떻게 꼬드긴 거지? 여는 평소 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는 습관의 덕을 봤다. 그의 손끝이 닿아 있는 코트 자락이 습기를 잃고 얼어 붙었다.


"나이가 좀 많죠. 부담되실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여 씨같은 분도 뵙게 되고 좋네요."

"아뇨,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저, 혹시 제 나이는 알고 나오셨나요?"

"차사 된 지 삼백 년 언저리 쯤 되셨다고 듣고 왔습니다."


 …….


"죄송합니다. 볼 일이 좀, 생겨서."

"예?"

"정말 죄송합니다. 직장이 직장이라……. 먼저 실례 하겠습니다."


 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한 번 푹 숙인 뒤, 지갑을 꺼내 제 몫의 커피 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뛰어가듯 도망갔다. 그러고는 찻집으로 달려가며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너. 날 어떻게 소개한 거야.

 예?

 됐고, 선약 언제 끝나.

 퇴근하는 중이었는데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날 삼백 몇 살로 알고 있던데.


 민재는 그 날 얼마 남지도 않은 제 쌈짓돈을 탈탈 털었다. 여는 덜컥 비싸진 제 입맛을 탓하면서도 그의 사죗값은 톡톡히 받아냈다. 다른 차사면 모를까 신이 없던 시절 여의 이름자와 그의 기억속에 있는 세월을 여에게 직접 들어 알게된 그 민재 만큼은 해선 안 될 실수였다.


"제가 마음이 급했나봐요."

"내 인연인데 왜 네 마음이 급해."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그런가, 저도 모르게 급해지네요."


 결국엔 죄를 지은 차사까지 달래고 온 그는 망자가 될 자와의 선약 하나 없는 드문 날이었는데도 녹초가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그런 그가 말끔히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에 나왔을 때, 신은 말없이 다가오다가 대번에 눈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야."

"어."

"너 그거 무슨 냄새야?"

"방금 샤워했는데."


 여는 제 몸에 대고 향을 맡았다. 섬유 유연제 냄새 약간에 바디워시 향이 풀풀 났다. 그는 설마 저승에 발을 걸친 이들에게만 나는 고유의 향을 트집 잡으려는 거라면 그건 못 돼먹은 거라며 쏘아붙일 준비까지 단단히 마치고는 눈매에 날을 세웠다.


"별 냄새 안 나잖아."

"안 나긴 뭐가 안 나."


 하지만 신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말을 했다. 그것도 제 얼굴을 바싹 갖다대면서.


"흙내가 진동을 하는데."


 차사의 작업복 만큼이나 검은 잠옷 위로 신의 향이 훅 끼쳤다. 그는 적잖게 놀라 신과의 거리를 벌렸다. 뭐 하냐. 설명을 요구한 건 덤이다. 신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너, 오늘 산에서 구르고 왔어?"

"카페 갔다가 밥먹고 왔는데."

"누구랑."

"……개인적으로 만날 인연이 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여는 잠시나마 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이의 말을 기억했다. 계룡산 어쩌구 했던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새 향이 배었나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묻은 향을 어떻게 아는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곡 하는 망자는 흔한 편이니까. 


"다음에도 만날 일 있으면 피해."


 그러거나 말거나 신은 구겨진 표정 그대로 냉큼 돌아섰다. 향도 갈무리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어지간히 화가 났나 싶었던 여는 공연히 손목을 들어 향을 맡아봤지만 제 몸에서 나던 향 말고 다른 향을 맡지는 못한 그는 신이 그날따라 좀 예민하다고만 생각하며 끝방에 들어가 얌전히 잠을 청했다. 




"으……."


 아침 열한 시, 뜬금없이 도깨비 집터 안 끝방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하면.


"해가 중천이야."


 모처럼 밤에 선약이 없었던 왕씨 성의 김 차사가 온 몸의 긴장을 풀고 자던 중 난데없이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에 이미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제 상태를 부정하는 소리다.


"잘 거야……."

"해 떴다니까? 그것도 저 위에 떴어."


 위잉, 윙. 신의 말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청소기는 오늘도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소리도 얼마 안 난다는 최신식 청소기를 몇 대나 충동구매 해둔 신은 막상 청소 만큼은 굳이 예전에 쓰던, 빨아들이는 속도도 조금 느리고 소리가 아니라 소음이 나는 청소기를 썼다. 차사를 깨우는 데 특효라는 제법 간단한 이유에서다.


"왜, 또. 왜!"


 화를 내건 어쩌건 결국 일어난 여를 본 그는 부리나케 끄기 버튼을 누른 뒤 청소기의 헤드를 뺐다. 뽁. 앙증맞은 소리가 여의 심지를 긁었다. 심심하면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권능을 쓰는 존재가 둘이나 사는 집터에서는 이미 집안일을 분담해둔 지 오래다. 끝방 사는 왕씨 성의 김 차사는 직업 특성 상 집에 머무는 시간이 들쭉날쭉 하다는 점을 감안한 결과 의는 여, 식은 각자, 주는 신, 각각 결정을 낸 상태였다.


"침대도 한 번 밀어야 돼. 일어나."


 그런데도 여가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구는 건, 평소에는 신이 집에 아무도 없을 때에만 청소기를 밀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게 아닐 경우에 여가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지금 신에게 마음에 안 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삐졌거나, 화났거나, 기타등등 기타등등. 이럴 때는 어떤 게 그렇게 신의 마음에 거슬렸는지 필사적으로 알아내 빨리 풀어주는게 낫다는 걸, 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충 들어주고 잠이라도 더 자야겠단 생각을 하며 그가 말했다.


"또 뭐 때문인데?"


 신은 버튼을 다시 누른 뒤 침대 위 틈새에 청소기를 대며 말했다.


"네 침대에 흙 냄새 다 뱄어."









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