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4.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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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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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2015. 4. 10. 17:56

* 아레님이 의뢰해주신 커미션입니다.

* 로라드렉(로라스x드렉슬러 // cyphers).

* 에버님의 용사마왕(https://twitter.com/chiznoguri/status/581138750043885568)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3차창작(https://twitter.com/Faithpear_cp/status/581661903669194753) 관련 이야기

※ 본 커미션은 원작자인 에버님의 허락하에 진행됩니다. 

원작자의 의사 철회시 의뢰비는 전액 환불해드리고, 해당 글은 삭제 처리됩니다.

* 중편 커미션 (1/5), 각 3500자(현재 편 : 4000자 내외)

전체공개 옵션으로, 본 글은 공개되었습니다.


그 마왕성에는 용사님이 산다 


 마왕들은 대대로 성 하나를 물려받았다. 성은 수도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심심하면 침입해오는 인간들이 제 몸에는 흠집 하나 못 내는 주제에 몇백 년 동안 가꿔온 도시는 잘도 부수고 다니는 걸 못 견뎌했던 다섯대쯤 윗 마왕이 수도를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그 마왕성에는 퍽 이질적인 손님이 한 개체 있었다. 분명 그는 마왕을 토벌하러 왔다고 했으니 손님이라고 칭하기는 민망한 구석이 있었으나 마왕이 직접 제 손님이라고 공언해 두었으므로 다른 이들은 마왕이 안 하던 짓을 한다며 신기해 할지언정 그의 출신성분에 대해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응? 용사. 하자. 내가 낳으면 되잖아. 응?"

"……."

 그것이 인간일지라도 말이다.


 마왕 다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마계에 들어왔던 알베르토 로라스가 손님 신분으로 마왕성에 머무르게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현 마왕 또한 그의 한 마디만 아니었어도 상대해주는 척 하다가 죽이거나 돌려보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이토록 정교한 기술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네.

 하지만 말 한 마디에 홀랑 넘어가버린 마왕은, 그를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무구를 막무가내로 선물한 것도 모자라 좀 더 머물다 가라며 이름도 모르는 한 인간을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마계에 그의 이름을 아는 존재는 없었다. 그는 용사 아니면 손님으로 불렸다. 그는 제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그래왔듯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크들이 성에 찾아와 소나 돼지 따위를 납품하고 가면 장난끼많은 임프들이 스테이크를 만들어 식탁에 내 놓는 동안, 그는 말끔히 씻고 갑주를 손질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말하는 무구가 마왕을 무자비하게 깨웠다. 그때까지도 정신 없이 자던 마왕은 그때서야 비적비적 일어나 손짓 몇 번으로 갑주를 두르고 식당에 내려와 금화를 던졌다(임프들이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한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했다. 다행히 마계의 가축은 인간들이 기르는 것과 같아 식사는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로라스에게는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마왕은 한 마디 덧붙였다.

"구성원이 주식이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용사, 그러니까 로라스는 돼지고기를 한 점 씹으며 생각했다.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사악한 마왕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지 오래였으니 진작 고국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지금 제 꼴을 보면 영락없는 손님이다. 그것도 마왕의. 기한도 정해진 바 없이 계속 머무르고 있으니 여관에 잠시 들른 것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넓게만 보였던 마왕성이 이제는 발 가는대로 움직여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공간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가?"

"당연하지."

 더 큰 문제는 마왕에게까지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왕은 가끔 로라스를 제 공방에 불렀다. 그의 공방은 그의 모든것이었지만, 마왕이 되는 바람에 공방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자 그는 마왕성 안에 포탈을 만드는 초강수를 뒀다. 저 포탈을 타고 누군가 자네를 죽이러 오면 어떻게 하나? 마왕은 삼 초도 안 되서 대답했다. 

"죽인다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서."

 여지껏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다.

"궁금하냐?"

"흥미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군."

 필멸의 존재에게 영원을 산다는 것은 까마득하게 먼 일이다. 마왕은 때때로 그의 식견을 마음껏 풀었는데 가끔은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그 모든 것이 나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너 오십은 됐냐?"

"멀었네."

"궁금할 만도 하네."

 마왕은 그렇게만 말했다. 신나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던 평소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포탈을 타고 마왕성으로 돌아온 로라스는 홀로 몸을 단련하다가 생각에 빠졌다. 그런 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왕의 권능을 쓰던 모습이나 장인으로서의 책임감 같은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팔십을 넘긴 노현자가(물론 마왕은 그보다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갓 성인이 된 청년들을 바라보는 듯한, 혹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측은함은 아니었다. 차라리 부러움에 가까웠다. 무지를 동경하는 이를 보는 것은 또 처음이다.

 문득 로라스는 그가 보는 자신이 궁금해졌다. 손님이 아니라 실은 자신은 그의 눈에 한낱 미물일 뿐이고, 미물이지만 자신의 작품을 인정했으니 한순간의 변덕으로 살려두고 지켜보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마왕성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

 한참 합금 비율을 적어내려가던 마왕은 샐쭉 웃더니 뻣뻣하게 서 있던 로라스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는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그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쳤다. 마왕은 냉큼 그의 손 위에 앉아 말했다.

"그럼 나랑 자자. 내가 알도 낳아줄게."

"?"

"최강의 자손을 만들자고."


 마왕의 기행이 하나 더 시작됐다. 로라스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시작인가 싶어 그냥 내버려두었다. 가끔 그의 이름을 딴 합금을 납품해달라며 사정하러 오는 드워프들이 귀띔해준 이야기였다. 저 놈은 흥미를 꺼뜨리기 전엔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으니 그대로 둬. 눈으로 보기엔 제 키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종족이었으나 곧 로라스는 그들의 지식에 탄복했다. 과연, 눈에 띄게 실망하는 모양새로 몇 일을 보내더니 곧 흥미를 버리곤 무구를 강화하느라 여념없는 마왕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왕. 또 찾아왔다."

"돌려보내."

 마왕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말했다. 로라스는 바깥의 드워프들에게 고개만 저어보였고, 실망한 드워프들은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다리오나이트라고 했던가?"

"엉."

"다른 이들에게 제조법을 풀 생각은 없는 것 같군."

"풀 거야."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이 아닐 뿐이지."

"그럼 저 자들에게 이유라도 알 수 있게 해 줘야지."

"노친네들도 알아."

"알면서도 늘 찾아온단 말인가?"

"저 영감쟁이들은 촉매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거거든."

 로라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졌다.

"내가 보기엔 자네의 다리오나이트는 이미 충분히 놀라운 합금 같았는데."

"당연하지!"

 마왕은 제 뿔을 벅벅 긁었다. 그와중에 조금 뿌듯했는지 로라스를 향해 몸을 돌려 제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족해. 다리오나이트는 꿈의 합금이 될 거야."

 로라스는 어린 시절 양성소에서 배운 전설의 광물을 떠올렸다. 부서지지 않는 광물은 꿈의 광물이 아니라 재앙의 광물에 가깝지 않을까. 로라스는 신을 믿지만 인간의 불완전함 또한 알고 있었다. 파멸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파멸을 겪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희생을 떠안는 것도 퍽 슬픈 일이다.

"부서지지 않는 광물을 말하는 거라면, 그건 꿈의 합금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군."

"아다만티움 말하는거냐?"

 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주가 쩔겅거렸다.

"그건 꿈의 합금이 아니지. 무식하게 안 부서지기만 해선 아무것도 못 할거 아니냐."

"자네의 합금은 다르단 말인가?"

"곧 그렇게 될 걸. 다리오나이트는……."

 마왕은 씩 웃었다. 

"의지를 따르는 합금이 될 거거든."

 로라스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에 휩싸였다. 파멸, 희생, 성장, 그 모든 것을 사용자의 의지에 맡길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꿈의 합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서 나 한 개체의 의지가지곤 부족하더라 이말이야."

"그들도 이걸 알고있다고 했나?"

"그래."

 그는 그제서야 드워프들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가면서 그의 공방에 들렀다 가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래서야, 입단속은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도 같은 대장장이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까 먼저 가 있다가 육포나 좀 들고 와."

 마왕은 자신의 세계를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바지마왕이라더니, 실로 그는 왕이 맞았다.


 처음으로, 로라스는 그런 신념을 가진 존재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면 어떨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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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2015. 4. 1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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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2015. 4. 9. 04:20

* 개양귀비님이 의뢰해주신 커미션입니다.

* 로라드렉(로라스x드렉슬러 // Chphers).

* "공부하고 서로에게 설레는 사관학생 로라드렉"

* 3500자 커미션(실제 : 4547자 내외)

* 전체공개 옵션으로, 본 글은 공개되었습니다.


파문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아닌 나라에서 귀족가의 아이로 태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덧붙여서, 사이퍼로 태어났으면서도 굶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순전 운 좋게 태어난 덕택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너와 나는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출발선을 한참 앞서나간 상태에서 모든 것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날이 올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갔을까?

 나는 그럴 기회를 받을 새도 없이 말을 뗄 무렵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 당시,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일 때 나는 내 자신이 '특별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에 따라 황실의 영광이 될 기회를 준다는 말과 함께 몇 가지 절차를 걸쳤다. 그들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 주일도 안 되어 내 발바닥은 물집이 팔 할을 차지했고, 이 주일 만에 황실의 영광이란 것은 아주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는 이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헤아려보니 이제 십 여년도 더 되었다.

 십 년간 이 곳에서 머무르며 내린 결론은 황실의 영광이란 실상은 썩 뒤가 구린 엿같은것이며, 이 곳에 한 번 온 이상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는 몇년 전에,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는 늦게 왔다. 그것도 꽤 된 일이라 내 머릿속에서도 조금 뿌연 공간에 들어가 있다. 능력은 빨리 발현되었는데 어머니 되는 이가 그 사실을 숨겼다고 했던가?

"들켰으니 왔겠지."

"선배님?"

"안 불렀다."

 그 이유 자체는 알 수 없었다. 네 그릇이 아깝지 않은 곳을 찾고 싶었던건지 비 사이퍼인 척 섞여들어가 살아가길 바랐던건지 뭔지. 그녀의 판단이 옳았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네가 오기에 이 곳은 좁았다. 이런 곳에서 매일 매일을 견뎌가며 살기에는 세상이 넓었다. 그 드넓은 곳에서 너를,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에 가문에서 편지와 함께 몇 가지 물건을 보내주셨습니다."

 간혹 네가 태어난 가문에서는 편지를 보냈다. 너는 편지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 이유가 네가 내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몇 안 되는 구실이라는 건 알면서도 모른척 했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들었다. 너는 언제 왔는지 항상 비어 있는 내 옆 자리를 차지한 채 무언가를 꿈질대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잘 안 풀리는군요."

"꼬였구만."

 혀차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꼬여있었다. 선배 노릇이나 해볼까 싶어 슬쩍 곁눈질도 했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항상 수석을 놓치지 않는다던 그가 고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귀한 구경을 좀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끙."

"가라."

"예……."

 그는 결국 전술 훈련시간이 다 되도록 그것을 풀지 못했다. 그의 가문에서 보냈다던 물건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는데, 상자가 쇠사슬로 묶여 있어 짧은 시간 안에는 풀지 못한 모양이었다. 풀라고 준 게 아니라 타고난 각력으로 우그러 뜨리라고 보낸 것 같았다. 몇년간 지켜본 바로는, 제 후배님께서는 그런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가문에 증명해 온 모양새다.

 하지만 이전에 보내던 것들과는 또 달랐다. 저 쯤 되면 우그러 뜨리는게 아니라 먼 옛날의 방식을 따라 사슬을 부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영 갈피를 못 잡으면 참견이나 좀 해 볼까, 따위의 잡생각을 하며 느적느적 걸어나갔다. 

"또 제비 뽑아야 되냐?"

"예.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공터에는 바로 아랫 기수의 생도들이 대련 준비를 마쳐놓고 서 있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상자 하나를 열지 못해 끙끙대던 모습을 투구 안에 숨기고 한 사람의 생도가 되어있었다. 저렇게 재미없어 보이는 놈이 지금와선 저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인생 모를 일이다.

"공정하지 않습니까."

 제비에도 수를 써두는 놈들이 있다는 건 안다. 그 방법을 슬쩍 흘린 당사자가 자신이니 모르면 섭하지. 예상한 대로 미래를 위해 제 실적을 부풀리고 싶은 놈들은 적당히 써 먹을 줄 알았다. 뽑는 놈도 거기서 거기니 간단한 문제 아닌가. 잘못 걸리면 그대로 퇴출이겠지만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오오냐."

 왕실의 은밀한 양성소에서 생긴 묘한 지하경제. 거기에 완전 면역인 사람은 저와 그 두 사람 밖에 없었다. 한 명은 너무 잘 알고 한 명은 정말 몰랐다. 무엇보다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실력이 있었다. 옳지, 오늘 밤엔 요놈한테 언제쯤 개미굴을 알려줄지나 고민해볼까. 아니지, 마침 그에게는 시련이 있던 참이다.

"아."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와 봐."

 귓가에 바싹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 이런저런 것들을 옮기느라 땀내가 조금 밴 열기가 넘어왔다.

"다 풀면 가져와."

"늘 그랬지 않습니까."

"여튼, 가져와."

 그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나는 손을 떼곤 창을 고쳐잡았다. 어디 한 번 잘 해봐라.


 대련은 언제나와 같았다. 저는 승자의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은 없었고 다만 볼이나 조금 내어주고 말았. 머저리들만 몰려 있다지만, 어느새 무게를 실 줄 아는 놈들만 남았다. 그 머저리들의 비효율적인 창술도 마냥 다 파악할 수는 없게 된 것이 못내 억울했다. 수만 쓸 줄 알았더니 훈련도 할 줄 아는 모양이지.

"다리오 드렉슬러."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조금 진보한 그네들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표시로, 피같은 공상시간을 조금 떼 내어 개인 훈련시간을 좀 더 늘리기로 했다. 마침 그도 없어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 대충 모자를 쑤셔넣고 숙소를 나섰다. 훈련장을 관리하는 놈의 낯짝엔 경멸이 조금 서려 있었는데(이놈저놈 상대하기 귀찮아 나태하기 이를데 없는 놈으로 소문을 퍼뜨려 놓은 보람이 있었다) 그건 또 알 게 뭐란말인가? 난 생도고, 그의 업무는 훈련장이 비는 시간에 한해 생도들에게 공간을 개방하는 것이었다. 말은 거창하지만 자재를 가져다 두지 않으면 공터일 뿐이라 한직이었고, 책잡힐 짓은 걸리지 않게 해 두었으므로 놈은 일지에 내 이름을 적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 내일부터 쓰실 수 있도록 써 두었습니다."

"당장 지금부터 쓰는건?"

"이미 쓰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이 시간에?"

"예에, 생도 한 분이 항상 빌리시지요. 운이 좋으셨습니다."

 공터 한 짝 빌리는 것 가지고 운이 좋긴 무슨?

"잘 썼네."

"오셨습니까?"

 전면 철회.

"너였냐?"

 각 잡힌 경례는 대충 손을 저으며 쳐냈다. 다른 놈들은 별 상관 없는 것이지만 그는 그런 걸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각도 딱 잡혀있고, 슬슬 몸도 물이 오를 시기라는걸 감안해도 저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멍청이들은 그에게 격식잡힌 인사를 받았다는 것 만으로도 자만에 빠지는 경우가 족족 있었다. 그의 창술 몇 번이면 바닥을 뒹굴고 있을 놈들이 꼴사납게 구는게 피곤해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몸이나 좀 풀러 왔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끝에 끝까지 가면 저를 찾아내는 사내라면 조금 귀찮아도 감안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렇습니까?"

"내일부터."

"마침 잘 되었군요.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해냈다. 제가 슬쩍 소재를 던져줄 적보다는 좀 걸려 친히 들러볼까 하던 참이었기에, 기쁨을 감추지 않는 그를 제지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귀걸이가 들어있었습니다."

"너 가문에 책잡힌 거 있냐? 귀 잡아 뜯기란 소리 같은데."

 어김없이 그는 제 가문을 대신해 변명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아닐겁니다. 두 쌍이었거든요. 

꾸준히 저를 도와주시는 분께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것도 도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쌍의 귀걸이, 감사를 표현할 것, 도리. 기숙사감이 두 명이라는 걸 감안하면…….

"뇌물."

"아닙니다."

"맞는 것 같은데."

 그걸 자기 능력까지 써야 얻을 수 있게 해둔 것 보면 그의 가문은 제 생각보다 현명하거나 더 멍청한 것 같았다.

"그러면 제가 선배님께 뇌물을 바치는 셈이 될텐데요."

 얜 더 멍청한 것 같고.

"내가 그걸 왜 받아."

 그는 이때다 싶어 이야기를 풀어댔다. 평소 모습과는 딴 판이다.

"가문에서 보내오는 것들에 고민할 때 도움을 주신 분도, 대련할 상대가 없을 때 도와주시는 분도, 제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지 아는 분도, 도리를 지켜야 할 분도 한 분입니다."

 그는 케이스 한 개를 내밀었다.

"받아 주십시오."

 그를 알게된 뒤로 그를 궁지에 모는 것은 몇 안 되는 제 낙이었다. 역으로 당할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온 천지를 울려댔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저건 사감에게 주기는 이미 글렀으니, 차라리 이 재미없는 놈에게 평생을 저당잡힐 사람에게 넘기는 게 백번천번 나을 것이다.

"이런 건 말이다……."

 저번 귀를 잡아당겼을 때와 비슷한 체온이 손끝을 감쌌다.

"!"

"나중에 이럴 사람한테나 줘라."

 나는 그를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긁힌 볼이 후끈거리는 것도 같았다. 


 다음 날, 그와 방을 같이 쓰는 생도 한 놈이 하루종일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의 이야기를 하자 나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


 그렇기 때문에 자네에게 다시 주는걸세. 받아 주겠나?

 이,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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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Commission2015. 4. 5. 18:15

* 아레님이 의뢰해주신 커미션입니다.

* 로라드렉(로라스x드렉슬러 // Cyphers).

* 대담(https://twitter.com/Faithpear_cp/status/570544391460298752)기반 이야기.

* 3500자 커미션(실제 : 3634자 내외)

* 전체공개 옵션으로, 본 글은 공개되었습니다.


대담


  모처럼 시간이 생기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의 시간을 묶었다. 연락을 취한 뒤 예약까지 전부 처리해놓고 전화를 끊은 게 벌써 며칠 전 일이다. 미리 이야기한 대로 한 공원 앞에서 만난 둘은 늘 만나는 사람인데도 공연히 기뻐 웃음 짓고는 보급품이 아닌 음식으로 식사를 했고, 부른 배를 문지르며 숙소에 들어와선 한탕 진하게 하고 나니 모든 감각이 무뎌져 지금은 컴컴한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존재하고 있었다.

"로라스."

"음."

 근래 들어 가장 느긋한 시간이었다. 삶을 누리고 있다, 로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교접이나 교전은 삶을 알게 했지만, 순간 순간을 온전히 누리기엔 모든 것이 너무 급하게 흘러갔다. 쾌락에 절어 울음보를 터뜨리는 연인의 모습이 특히 그랬다.

"몸 좀 돌려봐."

 로라스는 천천히 몸을 옮겼다. 사그작, 시트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드렉슬러의 눈에 그의 눈빛이 스며들었다. 그는 말없이 드렉슬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드렉슬러는 감길듯 말듯 한 두 눈을 그대로 두고 낮게 웃었다.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로라스는 그의 곁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다. 침묵이 그들을 쉬게 했다. 드렉슬러는 시간을 빠르게 보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으나 이런 고요함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같아."

 대뜸 그가 말했다. 이제 그는 로라스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었다. 로라스는 조금 내려간 이불을 그의 어깨 위로 올려주었다. 크리스마스란 여러 의미가 있는 날이지만 다리오 드렉슬러 한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는 몇 안 되는 날, 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었다. 평이한 날에는 그의 입에서 절대로 나올 일 없는 단어였기에 로라스는 조금 긴장하며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배로 몰아친 게 못내 거슬린 것일까?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

 드렉슬러는 그의 몸에 입을 맞췄다. 그보다 조금 더 탄탄한 몸이 그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건 두 사람 모두 같았지만 타고난 것 까지 바꾸는 건 지금와서는 바꾸기 어려워 진 것도 사실이라, 드렉슬러는 그 사실에 대해 절망하는 대신 제 것으로 만들어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저보다 여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명왕의 양녀 나이대 쯤? 그때는 이미 골격이 잡힐만큼 잡혔을 시기고. 드렉슬러는 제 몸을 둥글게 모으며 시곗바늘을 조금 더 감았다. 몸이 조금 땡겼다. 즐길 때는 좋았는데 지금 와서는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긴 글렀군. 괜시리 약이 올랐다.

"쯧." 

"드렉슬러?"

"좀 억울한데."

"무엇이?"

 훌륭한 조언을 하는 이는 우선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을 줄 알면서도 그들의 인생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로라스는, 당연하게도 드렉슬러의 몇 안 되는 조언자가 되었다.

"물 꼬맹이들 나이대 쯤엔 너도 좀 물렀을까 싶어서."

 로라스는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말했다.

"지킬 이가 있는 이는 무를 수가 없지."

"허."

 드렉슬러는 그의 대답이 어떤 방향일지 이미 알았다. 그래도 약오르는건 어쩔 수 없었는지 퉁명스럽게 툭 뱉었다.

"네가 침대에서 동화 찌끄래기나 듣고 있을 때 말이다, 난 가정교사한테 라틴어 배우고 있었다?"

"그 사람……. 삼 년도 안 되어 쫓겨났다고 안 했던가?"

"당연하지. 꼬맹이 다리오보다 더 멍청한 인간한테 돈 낭비 할 이유 없잖아?"

 드렉슬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이 그의 진가를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걸 익히 아는 로라스는 가벼이 한숨지었다. 드렉슬러 또한 로라스의 굽힐 줄 모르는 태도가 극복할 필요 없는 시련을 만든다고 생각했으므로, 두 사람은 연인의 신세 걱정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신세였다.

"이런, 잘못하면 이 나도 자네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너를?"

 그는 별 말을 다 한다는 듯 대답했다.

"그땐 내가 멍청해진거고."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그러나 장난스럽게 꺼낸 이야기는 나른함에 가라앉아 있던 두 사람의 머리속을 현실로 채워나갔다. 

"멍청한 다리오 드렉슬러라."

"잘 상상이 되지 않는군."

"내가 오죽 천재여야지."

 능구렁이처럼 넘어갔지만 그는 어지간히 끔찍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드렉슬러는 그것 또한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자신은 여전히 전쟁터에 있기 때문일 터다. 지금처럼 인간성을 끊임없이 시험받는 곳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종래에 저 한 사람 쯤 멍청해지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미래는 모르는거니까 하는 말인데."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알베르토 로라스는 과분할 것이다. 

"널 버릴 정도로 멍청해지면 네가 먼저 날 버리는게 더 낫겠지."

 드렉슬러는 언젠가 홀로 내린 결론을 연인에게 전했다. 두 사람 다 행복할 수 없다면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야지. 되뇌였으나 곧 로라스는 그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깜짝 놀란 드렉슬러는 눈을 질끈 감았고, 그의 귓가엔 확신과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걸세."

 그는 제가 깨문 어깨를 살살 핥아 내려갔다. 저를 두고 홀로 떠나가도록 풀어줄 것이었다면 애초에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렉슬러는 제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비볐다. 나름의 사과였다. 그가 로라스에게 먼저 안겨드는 일은 흔치 않았으므로 그는 별 수 없이 드렉슬러에게 입맞추며 그를 용서했다. 내용은 영 아니었지만, 그는 드렉슬러의 진심 한 조각을 본 대가인 셈 쳤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조금 기뻤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할 그의 이야기를 또 한 번. 

 잉글랜드에서 저만큼 연인의 이야기를 잘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족할 법도 한데 그에 대한 것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쌓여온 연인의 이야기도 전부 다 알 수는 없는데,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까지 생각하면 끝이 없었다. 로라스는 그 모든것이 욕심인걸 알면서도 한 조각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라스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까마득했다. 자신이 예전부터 바라던 명예로운 삶에 그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지, 지금처럼 살아갈 수는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갈림길에 선다면 그는 결국 명예가 부르는 길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드렉슬러 또한 그런 그를 존중할 것이다.

"그리고, 드렉슬러."

 하지만 이제 로라스는 갈림길을 생각하기 이전에 두 가치가 함께 가는 길을 찾고 있었다. 무한한 영광과 경애받아 마땅한 연인이 함께하는 그 곳에서 함께하는 삶. 비가 내리는 가로수 길을 함께 걷다가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삶. 지금과는 조금 다른 느긋한 삶이 어느덧 염원이 된 것은 순전 연인의 공이다. 정작 드렉슬러는 그런 삶을 심심해 못 견뎌 할텐데도.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그는 드렉슬러의 뒷목을 살살 쓸었다. 잘 마른 머리칼이 손끝에 스쳤다. 그는 조금 더 뒷목을 쓸다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연인의 온기가 멀어지는 느낌이 싫어, 드렉슬러는 허공을 더듬어 로라스를 찾았다. 그는 이제 드렉슬러의 바로 위에 있었다.

"알베르토?"

 그대로 그는 몸을 바싹 붙였다.

"지금 보여줄 수도 있는데."

 어둑한 방, 드렉슬러는 보일리 없는 그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Posted by _zlos
2015. 4. 4.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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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3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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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6.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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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2015. 3. 22. 03:14

* 소르다님이 의뢰해주신 커미션입니다.

* 로라드렉 (로라스x드렉슬러 // Cyphers)

* 로라스 사후 그의 기억을 이식받은 클론 로라스(사실을 모름)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드렉슬러.

* 3500자 커미션 (실제 : 4071자 내외)

* 의뢰인께 전달된 3/22일에서 15일이 지난 4월 6일부터 완전공개됩니다. 

* 4월 6일 00:07 공개처리 되었습니다.



Acceptance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상 많은 이들에게 지탄받을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 세상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운운할 것이다. 한편 제 말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얼간이들은 청탁하는 이와 잡아들이러 찾아온 이들로 분류되었다가, 제 연구실 앞에서 다시금 섞여 산이 될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큰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가끔은 같은 종족이라는 것 조차 믿어지지 않을정도로 아둔하게 구는 이들의 수군거림은 의미가 없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지난 삼십 여 년간 어찌저찌 섞여있을 수 있던 건, 자신의 이상이 그네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 별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자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것을 잃은 지금,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연구실 안에는 알베르토 로라스가 사랑해 마지 않는 연인이 있었다. 간혹 그의 작품이 세상을 놀라게 할때면 한껏 떠들썩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연구실 앞은 조용했다. 며칠밤낮을 연구실로만 출근하던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로라스는 업무가 끝나자 마자 달려왔고, 는 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한 번 가다듬고는,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두드린 뒤 손을 들어 노크했다.

"미안하네, 렉스. 오래 기다렸나?"

"들어와."

 그는 문을 열었다. 드렉슬러는 등돌린 채 종이 몇 장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로라스는 그런 그가 익숙하다는듯 천천히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온기가 좋았다. 

"무슨 날인지 잊지 않았겠지?"

"그래."

"옷 갈아입고 나오게."

 드렉슬러는 그의 볼에 입을 부볐다. 사랑이 그조차 바꿔놓은 것인가, 로라스는 조금 의아해했지만 곧 다시 나온 그와 함께 연구실을 나섰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본국만큼 따스한 공기는 아니었으나 적응하고 나니 나쁘지 않았다. 연인이 함께하는 한, 조금 찬 공기는 서로의 체온으로 덥히면 그만이었다. 잉글랜드에서 업무를 시작할때까지만 해도 함께 길을 거닐 수 있는 연인이 생기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 삶이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또한 그랬으면 바랄 것이 없다고, 로라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베르토."

"음?"

"난 이기적인 놈이야."

"그렇지 않아."

 드렉슬러는 발걸음을 멈췄다. 로라스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간혹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로라스는 연인의 몸을 돌려세운 뒤 양 어깨를 제 손으로 꽉 잡았다. 드렉슬러의 눈에 비친 그는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자네는 자네야."

 드렉슬러는 그런 제 연인이 좋았다. 이런 당신을 경배하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말할 수 없을 감정이 치솟아 저를 강타했다. 이 상태에서 그를 마주했다가는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우수수 쏟아낼 것만 같았다. 드렉슬러는 제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을 내려준 다음,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제 고개를 묻어버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드렉슬러?"

 그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곧 몸을 돌려 드렉슬러를 마주 안았다. 연인의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낫느라 고생 많았다."

 로라스는 멋쩍게 웃었다. 제 3차 능력자 전쟁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창룡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그는, 대 수술을 받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회사, 드라군 가릴 것 없이 검룡을 포기할 때, 드렉슬러는 온갖 방법을 수소문 하며 두 달이 넘도록 밤낮없이 그를 기다렸다고 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럴 엄두도 내지 못 했겠지. 모두 자네 덕분이야."

 기적처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각력 강화 능력자답게 신체 회복은 빨랐다. 대신 그는 끊이지 않는 정신적인 압박을 견뎌내야 했다. 버텨야 하는 로라스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드렉슬러,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로라스는 이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는 이 고통을 드렉슬러 한 사람이 전부 짊어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알면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마라."

 그는 딱잘라 말했다. 거절될 것을 알면서도 그리 했다.

"거절하지."

 대답을 듣자 마자 그는 말 대신 로라스의 머리에 냅다 꿀밤을 먹였다. 로라스는 머리를 문지르며 

"그새 손이 많이 매워졌어."

 가볍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발언은 끝까지 철회하지 않았다. 대신 로라스는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웬일이냐? 좋은 날 아닌가.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작은 골방, 두 사람만의 세계에서 그는 행복했다.


 삶은 곧 전쟁이었다. 장소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한 그곳은 전쟁터였다. 그들은 한 순간의 실수가 몸을 날려버리는 전쟁터에서 살았으므로 조금 더 직설적인 개념이기는 했다. 드렉슬러는 그의 재활을 도우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살린 그인데 다시 죽음을 전제하는 곳에 내보내야 할까?

"갑옷은 좀 어때."

"잘 맞는군."

 물론 드렉슬러는 답을 알았다. 그의 신념은 투쟁으로만 증명할 수 있었으므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는 다시 이 곳에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자네는 좀 어떤가? 몸이 많이 굳진 않았나?"

"날 뭘로보고 그러냐."

"자네답군."

 다시는 널 떠나보내지 않는다.


"드렉슬러? 내 말 들리나?"

 다리오 드렉슬러는 천재였다. 다른 이들에 비해 비상한 재주와 두뇌를 가진 이였다.

"안 죽었어, 망할 알베르토."

 ……인간이다. 

"지금 가겠네."

 그는 판단했다. 안타리우스는 회사, 연합 양 측에 사람을 심었다. 자신은 고립되었으며, 능력자 한 명 단위로는 상태를 바꿀 수 없다. 능력자들이 일당백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판을 뒤엎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므로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고립 상태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부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부대를 파견하는 것 만큼 바보같은 짓도 없었다. 이 정도는 회사의 참모진들 정도면 어렵잖게 저울질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렉슬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냉정하게 판단해."

 그를 살려 보낼 수 있다.

"알베르토 경."

"그래."

"지금 네가 가야 할 곳은 어디지?"

"……지원부대와 합류해야 하네."

 드렉슬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 되었다. 

"내가 네 신념이라는 말 아직 유효한 거, 맞지?"

 그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입맞춘 날, 그는 자신이 그의 신념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자신이 깨달았을 때에는 손 쓸 새도 없었기에 자신은 겸허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속삭였다. 

"언제까지나."

 드렉슬러는 통신기를 박살냈다.


 그 때와 똑같았다. 자신은 통신기를 부수고, 신나게 창을 놀리며 싸우다가,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을 때 거짓말처럼 부대와 함께 도착한 그가, 종래에는 자신 대신 목숨을 잃는―

"알베르토."

 드렉슬러는 처참하게 박살난 그의 투구를 벗겼다. 희번득하게 뜨여있는 눈을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감기고, 피로 범벅이 된 갑주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자신, 이란, 건, 다시 볼 수 없을 광경이었다.

"나의……."

 장장 육십 일 넘게 헤메어 너를 내 곁에 데려오면서 수없이 다짐했던 것이다. 나는 너를 다시는 먼저 떠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로라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왜."

 네 죽음을,

"왜."

 또다시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는 한참동안 시쳇더미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그는 '알베르토 로라스'를 하나 하나 되짚어갔다. 제 곁에 있는 그의 인생은 다리오 드렉슬러가 알베르토 로라스를 처음 알게 된 날이 아닌, 알베르토 로라스의 기억을 단백질덩이에 이식하면서 시작한다.

 인간은 열 달을 기생하며 자라난다. 몸체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며 기억은 기억의 주인 만큼이나 성실했다. 기간은 오분의 일 가량으로 줄었다.


 육십 육 일. 


 너를 처음 만난 그 날 나는 울었던가 웃었던가. 기억이 본능에 우선할 수는 없었으나 결국 너는 이기적인 나의 곁에 온 알베르토 로라스였다. 기억에 본능을 맞춰갔다. 그렇게 너는 내 미련이 되었다. 흔적이었다. 아픈 손가락이었다.

 너는 알베르토 로라스이자 알베르토 로라스였다. 너는 끝까지 너다웠으므로 나는 결국 널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 온전히 알베르토 로라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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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