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렉슬러 생일챙겨주겠다고 꿈질꿈질 뭔가 준비하다가 드렉슬러 본인이 생일까먹는바람에 연구실 문잠그고 안나와서 소박맞은(?) 로라스가 시무루기 츄우기(제딴엔 티안낸다고 하는데 다 보임) 하는걸 보다못한 드렉슬러의 화해떡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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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와 그 남자의 요지경
그날도 드렉슬러는 업무를 보고 있었다. 릭 톰슨이 공간의 문만 남겨두고 떠난 이후로 그는 가까운곳에 있는 서점 말고는 위안을 얻을만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도 능력자들이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때나 되어서야 가끔 들러 한두 권 집어들고 나올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제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하는천재였다. 그의 연구실에서는 대부분 별 볼일 없는 장난감이 나왔고, 간혹 세상을 뒤집을 역작이 나왔다.
드렉슬러는 기본적으로 효율을 따졌다. 그의 역작 중 하나인 전투 의상이 그랬다. 귀족들의 복식이 가지는 상징성만 생각했다면 거기에 갑옷을 덧댄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들은 그의 휴식시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는 발명품의 가치와는 상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비 효율적이었다. 부조리를 탓할 법도 하건만, 그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당연한 거 아냐?"
로라스는 가벼이 웃었다. 본디 그의 영역은 아니었다만, 그는 드렉슬러와 연인이 된 이후 절반쯤은 자신에게도 그 책임이 있는 양 굴었다. 드렉슬러는 그것을 간섭으로 받아 넘기고 싶어했지만, 연인이 되기 전부터 그가 한 말은 틀릴 적 보다야 맞을 때가 많았다.
"그렇다면 난 자네의 시간을 지켜야겠지."
로라스는 연인의 등 뒤로 성큼 다가서서 드렉슬러의 두 눈을 가렸다. 한참 클랜전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그는 연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지 네 시간 만에 고개를 들었다.
"로라스?"
"가세. 식사라도 같이 하지."
일상이었다. 덤덤한. 두 사람은 그런 일상에 대체로 만족했다. 로라스는 연인이 어디로 샐 지 몰라 항상 찾아 나서야 했던 과거를 마치고 트와일라잇 한복판에 가면 연인이 서 있는 현재를 손에 넣었다. 드렉슬러는 연인의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매 점심 마다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꼴을 볼 필요가 없어 만족스러웠다.
사람이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완전한 일탈을 꿈꾸기에는 그들의 현실이 제법 무거웠다. 자연히 그들은 아주 소소한 일탈만을 바랐다. 평소보다 십 분 일찍 트와일라잇에 도착하는 로라스나, 먼저 퇴근해서 두 사람 분의 빨래를 대신 해놓는 드렉슬러와 같은 것들이 그랬다. 해서 그들은 '당연히 특별한 날'을 알게모르게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그는 단 하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전, 비번인 날에 휴가를 쓰겠다며 회사에 들렀던 그는 얼마간의 휴가를 받아냈다. 그가 직접 휴가를 따낼때면 완급조절을 위한 휴식기거나 공식적인 일정이 있었기에, 직원들은 그러려니 하며 알베르토 로라스의 일정 며칠을 뺐다. 이 주일 전에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전화를 돌렸다.
"오늘도 고생이 많네."
"뒤치닥꺼리나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이번 주 화장실 청소는 자네였어."
"알아."
드렉슬러는 툴툴대기만 했다. 두 사람 다 그 이야기가 아닌 것은 알지만 이런 종류의 불만은 내뱉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들은 푸념을 안개속에 흩어버렸다. 신세 한탄은 가벼운 업무 한탄이 되었다. 조금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언제쯤 할 참인가? 시간이 정 나지 않으면 대신 하지."
그는 봉투 한 장을 꺼내며 대답했다.
"오늘 내일, 이틀 안에 다 할 거야."
"정말인가?"
"당분간 못 들어가니까 날 잡아서 미리 해놓고 가려고."
로라스는 그때 제 직감을 믿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인의 정복 바로 위, 저 대신 그의 어깨를 잡아주는 견장이 노을을 머금은 것을 보고 만 그는 고개만 몇 번 주억이고 말았다.
드렉슬러의 연구실은 몇 번의 헤프닝을 거치면서 유사시에는 방공호로도 기능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연구실 안에 들어가 있는 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문제는 그의 집중력이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가끔씩 제가 문을 걸어 잠궜다는 사실도 잊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도 로라스는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다른날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일인데, 연구실에 있을지라도 그를 찾아올 저의 존재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오랜만에 빼입은 정장이 조금 불편했지만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연구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드렉슬러. 있나?"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드렉슬러?"
로라스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로라스는 문 앞에 한참동안 서 있다가 대뜸 주저앉았다. 사무실로 돌아가 전화라도 걸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연구실 안에 전화기가 있다지만,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한 이상 이 소리나 저 소리나 그가 듣지 못하는 것은 같았다.
그는 완전히 잘못 짠 전략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모든 것을 다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패턴 하나를 간과해 다 망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러니까, 전날 밤부터 그와 함께 있었더라면 이야기는 또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자정이 되자 마자 24 시간을 모두 제 '여가 활동'에 쓸 드렉슬러에게 한 번 쯤은 브레이크의 존재를 알렸다면 예약한 곳에 가지는 않더라도 곁에 의자 하나 정도는 내 주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그가 알고 있는 다리오 드렉슬러라면 9월 3일이 자기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이 몇월 며칠인지는 누군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자각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로라스는 억지로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달았다.
드렉슬러는 요 며칠 새 제 곁을 맴도는 로라스를 지켜봤다. 복창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유도 뻔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 언질도 없이 무턱대고 연구실에 와 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는 평소에도 무턱대고 찾아오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못해도 일 주일 전에는 약속을 잡은 뒤 만나는 것이 그의 성향이었고 그것만큼은 헬리오스 안을 싸돌아다니며 물어봐도 백이면 백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었다.
지난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해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었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다리오 드렉슬러의 생일에 예약했던 곳을 단 한 군 데도 갈 수 없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제 생일을 생일인지도 모르고 보냈다. 사실, 그날이 자신의 생일이었다는 것도 그 다음 날에 알았다. 하루종일 연구실에 처박혀있다가 새벽이 다 되어 숙소에 들어왔더니 제 방 침대 위에 상자 하나가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카드를 펼치고 나서야 알았다.
¡Cumpleañosfeliz!
"생일 축하합니다?"
그는 그 말이 올해 자신이 내뱉은 말 중 가장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일인 줄 알았으면 하루만이라도 숙소에 돌아와 있을 걸 그랬나, 했지만 그는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로라스를 한 번 보고는 저 또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돌아와보면 속에 열불이나 끓게 하는 연인이 제 곁에 서 있었다. 말을 걸면 불렀나, 통조림을 까 샐러드를 만들어 두면 괜찮군, 기타등등, 기타등등.
드렉슬러는 이 상황이 무척 불편했다. 과거 다른 이들이 로라스를 앉혀두고 그를 예측하며 돈 내기를 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때와는 또 달랐다. 누구의 탓도 아닌 제 탓이었다.
드렉슬러는 한참동안 허우적대다 눈을 떴다. 다섯 시 반, 그는 한참을 소리없이 누워 있었다. 늘 보는 천장은 새벽빛을 받아내기엔 그릇이 작았다. 얼마간 눈을 꿈벅이다 시선을 돌리면 거기엔 연인이 있었다. 그들은 간혹 충족감을 위해 같은 공간에서 잠들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새삼 깨닫고 마는 것이다. 감정, 생각, 시선, 기타등등, 기타등등. 편린은 그의 머릿속으로 하나 둘 모여들어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정제된 욕망이 되었다.
네가 좋아.
영원을 부르짖는 것 만큼 헛된 일도 없을 것이다. 하여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떠올리고는, 영원보다 더 지독한 미련을 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허한 웃음만 몇 번 내보냈다.
"드렉슬러?"
"네 옆."
어쩌랴. 그의 존재만으로도 가득 들어찰 것을.
두 사람은 길을 걸었다. 그들은 주로 안개가 잔뜩 낀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 광명의 도시에서 살았던 그들에게는 썩 적응하기 힘든 도시였으나 그들의 연애는 은밀함이 완성시켰다. 서로의 손을 별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가끔은 서로의 볼에 입맞출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서 있는 이 곳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로라스는 평소 함께 걷던 모습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어디에나낭만은 있는 법이다.
"좋군."
"……."
허나 곁에 있는 이는 영 뚱했다. 한참동안 뒤척이다 늦게 잠든 것을 떠올린 그는
"졸린가?"
했으나, 드렉슬러는 고개만 몇 번 저었다. 오히려 그는 팔을뻗어 제 손을 잡아오는 드렉슬러를 보고 꿈을 꾸는가 싶었다. 믿기지가 않는 것과 기쁨은 별개였던 터라, 로라스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을 잡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다른 의미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로라스."
숨결이 다가와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그는 답례로 제 숨결을 나누기로 한다. 천천히 안겨드는 그가 기분 좋았다. 그럴수록 그는 깊게 뿌리내리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요즈음 드렉슬러는 모든것을 마뜩찮아 했다. 특히 저와 그 둘 사이에 다른이가 끼어드는 것은 무척 꺼려해 혐오의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곧잘 어울리던 아이들의 경우 그 정도가 과해 자신이 제제해야 할 정도였다. 평소 대부분의 사건을 흘려보내는 그 답지 않은 처사였다.
"그래, 드렉슬러."
그것은 로라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가 먼저 다가오는 일도 특벌한 날이 아니면 없다시피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이리 사랑스러운가?"
로라스는 그저 궁금했다. 그의 인생에 얼마 되지 않는, 옳고 그름을 떠난 일이었다. 연인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는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궁금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없어. 그런 거."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드렉슬러는 손을 씻다가 쏟아져내리는 물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그는 제 손을 수건에 박박 닦았다. 강박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제 손을 닦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물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굴었다.
그의 연인은 드렉슬러의 행동을 비범한 이들이 지고 가는 패널티 따위의 것으로 보았다. 재능이 꽃피기 위한 시련으로도 볼 수 있었다. 로라스는 그것이 재능에 대한 대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연인이 강박 관념 하나 정도 달고 사는것이야 일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걱정하는 것은 서른을 넘기도록 보인 적 없었던 행동이 최근에, 그것도 갑자기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연인의 변화에 신경이 쓰이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끝을 알고 있다. 예지몽 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다. 끔찍하게도 그는 몇 번이고 이미 겪어 본 현실이기에 알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본래 전투에 나가면 나가는 대로, 나가지 않으면 않는 대로, 그들의 곁에서는 죽음이 떠난 적이 없었다.처음 살상을 한 날?왕실에 발탁되었던 그 날? 언제부터 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것들을 썩 잘 견뎌내는 편이었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당장 닥친 일이 아니라는 가정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했다.
현실은 무거웠다. 애써 외면하던 것, 언젠가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무더기로 나타나 드렉슬러를 비웃으며 그 누구도 닿지 못할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그는 한 신문기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 기사, 시대의 마지막 경종이 되다 >
드렉슬러는 그의 죽음이 그가 원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는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행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해서, 드렉슬러는 한참을 고통스러워 했을지언정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도무지 끝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물, 불, 추락, 질식, 중독……. 온갖 것들을 넘나들며 제 자신의 끝을 바꿔내리는 로라스를 목도했다.
물.
손끝에서 피어나던.
"드렉슬러, 나 좀 보게. 자네 손이 다 상할 것 같아."
드렉슬러는 결국 짜증을 내고 만다.
그는 처음을 기억한다. 실은 그의 죽음이라면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래도 그는 항상 처음을 떠올렸다. 말 그대로, 처음이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한 아이 대신 죽었다.
불이야 본래 제어가 어려운 축에 속했다. 불을 다루는 사이퍼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곳저곳 실려있는데, 그중에서도 폭주의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명왕을 수행하던 드렉슬러가 본 것은 어떤 한도를 넘어 버린 것이었다.
검은 불꽃.
거리는 끝이 없는 불꽃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검은 불길은 사방으로 튀어 건물 사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집어삼켰다. 영역은 넓어져만 갔다. 평소라면 볼 일 없었을 검은 빛깔은 인간을 몰아넣었다. 불은 선과 악, 회사와 연합을 가리지 않고 공평했다. 평화를, 혹은 혼란을 조금이라도 손보기 위해 준비했던 회담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이 제법 있네.
안 돼.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야.
왜?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웃는다.
알베르토 로라스 아닌가. 자네가 사랑하는.
빌어먹을!
그는 다시금 밀려드는 감정을 휘휘 내저어 보지만 별 소용이 없어 책상이나 한 번 내려치고는 그대로 두고 만다.친애하는 이의 죽음을 몇 번이고 돌아봐도 결론은 같은 곳에서 났다.
칼라의 불꽃을 처리하지 못하면 알베르토 로라스는 어떤식으로든 죽었다. 회담장에 갇힌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길에 휩싸인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타들어가는 건물 옥상에 서 있는 아이를 데리고 땅으로 내려오다가, 건물 안에 갇힌 이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다가, 소속을 가리지 않고 구호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무장을 뺏겨서, 흑염과 함께 불타오른 것들의 망령이 그의 몸을 휘감아서, 그리고, 그리고…….
"역시 자네의 투창술은 대단하군. 나는 아직이야."
그의 능력으로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채 하루도 남지 않았다.
그의 곁에 안식은 없었다. 애도는 닿지 않았다. 드렉슬러가 끝없는 죽음에 미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렉슬러는 되풀이되는 영생보다는 한 번의 죽음을염원했다. 그에게 안식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라면 이제는 그 무엇을 요구한다고 해도 내밀 수 있었다. 지금껏 자신을 지탱해온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수 번의 죽음을 떠나보낸 뒤에야 알았다.
필요한 것은 자신을 지탱해줄 무언가가 아니라 알베르토 로라스 그 자체 였다. 거기에 자신의 것을 대어 보자, 놀랍게도 그 어느것보다 소중했던 것들은 형편없을 정도로 그 빛을 잃었다. 연심이 다 무어란 말인가. 살아야 했다. 그도, 저도.
고뇌는 끝났다. 연심이란 변덕스러운 것이니 지금이 아니면 바칠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공허 속에서 다시금 피어날 그들의 미래를 믿기로 했다. 얼마가 될지는 모른다. 그는 그 끝에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수 있으면 족했다.
그는 이왕이면 같은 불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심을 태워 그를 살리는 제 처지와 꼭 맞았다.
드렉슬러는 눈을 떴다. 공허함에 몸부림치며 그는 방을 나섰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도 알베르토 로라스는 살아 있었다. 그는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