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2018. 7. 6. 00:52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텀블러에 담아서. 맞으시죠?"


 사내는 말없이 카운터에 제 텀블러를 내려 놓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넉살좋은 성격은 아니었으며 그런 그를 아는 카페의 직원들도 보통은 별 말 없이 주문만 받았다. 늘 그렇듯 그는 열 시 정각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카운터까지 걸어와선 가방을 뒤적여 텀블러를 찾아 카운터에 꺼내 놓은 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니, 조금 기다리면 그의 앞에 서 있던 끝자락을 푸른빛으로 물들인 금발 직원이 다른 손님에게 내어주는 것 보다 진한 농도로 커피를 내린 뒤, 텀블러에 얼음을 함께 담아 내놓을 것이다.

 그는 카운터 바로 앞 테이블에 대충 걸터 앉았다. 그의 집 주변에는 카페가 많았지만 규모가 있는 카페들은 너무 시끄러웠고 작은 카페는 꾸준히 들락거리면 자꾸 말을 걸어서 문제였는데, 프랜차이즈 카페의 틈바구니서 신기할정도로 오래 버티고 있는 카페 래빗은 그의 이런저런 조건을 다 만족하는 몇 안 되는 카페였다. 적당히 한산한 분위기에 직원이 자신에게 딱히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커피도 그럭저럭 괜찮았으니, 그가 카페 래빗의 단골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그가 카페 래빗의 쿠폰을 받기 시작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가끔은 카페 마감시간이 아슬아슬한 시간에도 슥 와서는 늘 시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어 잔을 포장해 가기도 했고, 서너시 쯤 와서는 커피와 함께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켜두고는 노트북으로 몇 시간 동안 작업을 하다 간 적도 제법 있었다. 이쯤 되니 일 좀 오래 했다 싶은 직원들은 사내를 발견하면 그가 텀블러를 꺼내기도 전에 커피 내릴 준비를 하러 갈 정도였는데, 클레임이 들어와도 할 말 없는 고객 응대를 그는 오히려 반겼다. 이런 면이 마음에 들어 매일같이 카페에 오는 사람에겐 오히려 제대로 된 응대였던 것이다.


"혼자 오셨네요."


 하지만 그것도 어제가 마지막 이었는지, 몇 개월 동안 주문 말고는 말을 한 적이 없던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못들은 척 텀블러만 받아들고 갈지 고민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늘 혼자 왔는데."

"요 며칠 새 일행이 생기셨대서."


 새로 이야기가 오가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어 제 집 근처까지 찾아온 사람들을 몇 번 데려온 게 화근이었다. 그는 직원이 건넨 제 텀블러를 받으면서 카페 래빗 대신 갈 만한 카페를 몇 군데 떠올렸다. 맞은편에 있는 길 건너 카페 하나는 끔찍하게 맛이 없는 커피를 판다. 두 블럭 옆 카페는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어느 시간대에 가도 사람이 바글거린다. 역 앞 카페는 쿠키를 자꾸 끼워팔려 수작질을 한다.


"누구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분위기 좀 무겁고 찬데 잘생긴 사람? 미아 언니가 그랬어요."

"짐작가는 사람이 없어. 다 따로면 모를까."


 그는 대체제가 없는 현실을 슬퍼하며 대강 대답했다. 내일도 카페 래빗의 첫 손님은 그일 듯 했다. 그는 담당자를 근처로 불러올 다른 카페를 찾을 시간에 제가 직접 찾아가는게 낫겠단 생각을 하며 막 손에 든 제 텀블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 닫힌 뚜껑 아래서 잘각이는 소리가 났다. 


"L 어쩌구라고 했었는데."

"L? …로라스?"

"어, 맞아요. 그 사람."

"걔 분위기가 무겁고 차다고?"


 그의 목소리가 괴상하게 튀었다.



 다리오 드렉슬러의 성격과 능력은 독보적인 면이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보단 어딘가 한 구석은 괴상하거나 특별한 사람이 많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도 그랬다. 두 사람 다 그 물이 그 물인 계층 사회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다가 지인이 된 경우라, 그 로라스 만큼은 드렉슬러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축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됐지만, 두 사람을 모두 아는 사람들은 로라스가 드렉슬러의 몇 안 되는 지인 중에서도 독보적인 사람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애초에 그의 곁에 다가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능력은 받아 들일지언정 성격은 감당하지 못하고 나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드렉슬러와 몇 십년째 연락을 이어간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그 로라스는 보통 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가문도 던져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맛에 인생을 사는 그 드렉슬러조차 그의 시선이 정중앙에 내리꽂히면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다만, 로라스는 그를 대할 때 언제나 밑바탕에 배려를 깔았다. 당사자인 드렉슬러도 그건 알았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친우의 눈길이 파스텔 톤의 빛깔과 온도를 띤다는 걸 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달려와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손길에는 자신을 향한 신뢰가 깃들어 있다는 것도 안다. 제 연락이 뜸할때면 가끔은 와인 한 병 사들고 와선 주말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로라스였고, 그에게 이런 저런 일이 있을 때면 가족보다도 먼저 연락하는 사람도 로라스 였으며, 때로는 아무말 없이 찾아가 초인종을 누른다 해도 별 말 없이 그를 안으로 들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도 로라스였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알베르토 로라스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때면, 그는 자신이 아는 알베르토 로라스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물러.

 그렇지만 그의 말만 듣고 알베르토 로라스를 찾아간 사람들은 늘 그의 말과는 한참 다른 알베르토 로라스를 감당하기 바빴다. 그를 처음 마주본 사람은 사람을 주눅들게 할 정도로 맑다 못해 시리기 까지 한 눈빛을 견뎌야 했고, 하나 하나가 절제된 행동거지는 저도 모르게 매무새를 정돈하게끔 행동을 경직시켜 지치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아틀라티코 드라군을 배출하는 가문이라 그런지 분위기마저 은근히 고압적인 그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맞은편에 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주눅들기까지 했다. 물론, 몇 마디 주고 받다 보면 그가 누군가를 찍어 누르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걸 쉽게 알게 된다. 원체 올곧아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려다 본의아니게 그런 분위기를 풍기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첫인상이야 어느정도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년 정도 교류를 이어가더라도 드렉슬러가 이야기했던 알베르토 로라스의 무른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을 본 사람들은 그 드렉슬러의 시선 조차 부드럽게 바꿔놓을 수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나이가 아예 적거나, 아예 많거나, 하는 식이다.


"로라스."


 그는 인연이 깊지 않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인간 관계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신경쓸 일이 생기면 철저히 사실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천재성은 통찰력과 함께하는 터라 체면이나 염치, 배려와 같은 것들은 그의 시선을 흐트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겪은 로라스와는 또 다르게 그가 아는 로라스는 실제로도 무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먼저 와 있었나? 내가 좀 늦었나 보군."


 그 부분까지 생각이 닿은 사람에겐 남는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그가 알베르토 로라스에 대한 시선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이야기한 게 아니라면, 역으로 알베르토 로라스 그를 대할 때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와는 좀 다른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분명 통상적인 사람들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만 한 선택지인데도, 그 대상이 알베르토 로라스가 되는 순간 가장 마지막까지 선택하지 못할 선택지가 되는 그것.


"안 늦었어. 이 근처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먼저 와 있었다."


 요컨대 이렇다. 누군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시선을 왜곡할 수 있는 사람이 알베르토 로라스란 말을 한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겠지만, 알베르토 로라스가 다른 사람과 다리오 드렉슬러를 차별대우 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 로라스가 그럴리가 없단 반응이 먼저 돌아올 것이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알베르토 로라스는 좀 딱딱하기는 해도 사람 가려가며 태도를 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라스의 곁에서 그를 직접 겪어온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베르토 로라스도 사람이었고, 개중에서도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연락해서 차를 보내둘 걸 그랬어."


 그런 그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건 그의 주변에선 다리오 드렉슬러밖에 없었다. 그의 지인들 중에선 그 드렉슬러만 빼고 다 아는 사실이었다.



 드렉슬러는 로라스가 자신을 찾아 올때면 늘 그랬듯 그의 차를, 정확히 말하면 로라스 가의 차를 얻어 탔다. 그는 드렉슬러를 만날 때면 늘 가문의 차와 기사를 대동해 마중 나왔던 터라, 어느새 맨 뒷 좌석, 그의 바로 옆자리는 드렉슬러의 고정석이 다 되어 있었다. 드렉슬러는 늘 그의 손에 이끌려서 에스코트 아닌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에 안기듯 앉곤 했다. 그러고 나면, 특유의 무관심으로 그 상황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걸 무시한 듯 굴었다. 그런 태도는 간혹 앞좌석에 로라스 가의 사람이 같이 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본래 제 지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이어갈 가치를 못 느끼는 드렉슬러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되도 않는 가십거리를 늘어놓는 대신,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로라스 가에 몸을 의탁하는 건 어떻냐며 드렉슬러에게 농인듯 아닌듯 제안을 던지곤 했다. 그마저도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서, 드렉슬러는 제 가문에서 성씨를 가지고 자신을 휘두르려 할때면 눈 딱 감고 로라스 가에 몸을 의탁해버릴까 가볍게 저울질을 할 정도였다. 그가 바라 마지 않는 방향이었다.


"요새는 좀 어떤가?"

"늘 똑같지. 카페가서 커피 사고, 집이나 사무실가서 근무하고, 운동 좀 하고 와서 일 좀 더 하다가 자고……. 아."


 드렉슬러는 저를 바라보며 한 손을 내민 그에게 제 코트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 왜, 예전에 내가 개인 교습하던 애 있잖아. 윗머리 노랗고 아랫머리 퍼런 애."

"맥고윈 양, 드렉슬러."

"와, 너 걔 이름 어떻게 기억했냐. 난 걔 이름 기억 안했는데."

"중요했나?"

"아니 별로. 여튼, 걔가 너보고 분위기 좀 무겁고 찬데 잘생긴 사람이라더라."


 너처럼 물렁대는 놈이 몇이나 된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 잘생긴 거 말고 맞는 게 없어서 네 얘기 하는지 처음엔 눈치도 못 챘다. 드렉슬러는 낄낄대며 시트에 몸을 기댔고, 그는 드렉슬러의 코트를 옆에 두는 척 하며 고개를 돌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숙녀에게 찬사를 다 듣다니, 오늘은 성공할 지도 모르겠군."

"왜, 생긴거로 밀고갈 일 있어?  잘 생겼잖아. 자신감을 가지라고."

"자네가 안 넘어 오잖나."


 그는 놀리듯 진심을 한 번 흘렸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유통기한 한참 전에 지난 장난 언제까지 치고 있냐."

"늘 말하지만, 장난,"

"이겠지."


 거절 아닌 거절도 일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어깨에는 착실히 기대는 사람이 드렉슬러기도 했다.


"……."

"그렇지?"


 하지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는 드렉슬러의 시선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이었으므로 드렉슬러의 길을 가문의 힘을 빌려서라도 미리 닦아 놓거나, 드렉슬러가 귀찮아 할 선자리 같은 것들은 제 손을 써 근본부터 잘라내거나, 긴 세월 내내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 자리를 놓치지 않는 등의 몇몇 사소한 일들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잘 해냈다. 그러다 가끔씩은 드렉슬러 가에 직접 찾아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처우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그정도까지 사려깊게 신경을 쓸 만한 사람은 거의 없어 그를 제지할 만한 사람도 차기 가주 정도 뿐이었는데, 차기 가주 조차 그의 이야기는 신중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히려 드렉슬러 가 내부에서는 가문의 이단아와 대화하고 싶다 직접 찾아가기 전에 그를 먼저 거쳐야 한다는 인식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아직은."


 아무렴, 꼭 그런 요소를 떠올리지 않아도 기억 속의 그는 테라듀에 꿰뚫린 드렉슬러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떤 상황을 갖다 대도 그 시절 그 순간 보다야 훨씬 나았다. 드렉슬러는 살아 있었고 전쟁이 터지지도 않았으며 몇십 년 새 그들의 조국은 동성혼을 포용하는 나라가 되어 있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제법 해볼 만 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21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였.


"피곤하지 않나? 가방도 이리 주게."

"어어, 도착하면 깨워줘."


 그는 제 품에 굴러들어 온 드렉슬러의 어깨 위에 담요를 둘러주며 잔잔하게 웃었다. 드렉슬러는 한 평생 그를 자신보다 이 년 덜 산 사람으로 대하겠지만 그의 뒤에는 몇십 년이 더 있었다. 상황은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곧 끝이 보일 참이었다. 그 때가 되면 드렉슬러는 그를 흘려보내지 못할 거란 걸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벌써부터 조바심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


 세월을 건넌 그에게는 이전에 쥐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제 손아귀에 떨어질 날이 머지 않았단 점이 더 중요했다. 기다림마저 행복이 된 그는 그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아직은 친우인 사람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내리며 제 앞에 펼쳐질 앞날을 그렸다.




생님 리퀘.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 다음편이 붙을진 잘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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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7. 3. 21:35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스페인 왕실 측에서 정말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용기사를 길러낸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세상을 구했다. 안타리우스가 세상을 판돈으로 내민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틀라티코 드라군이 꼭 필요했고, 상황을 지켜보며 비공식적으로 회사를 돕는 선에서 그쳤던 그들은 최후의 전투를 눈앞에 두고 나서야 기사단을 파견하며 공식적인 참전을 선언했다. 덕분에 회사-연합 연맹 측은 극비로 강습 작전을 꾸릴 수 있었고, 로라스는 그 작전에 적격 판정을 받아 차출되었다. 이전부터 강습 성공을 전제로 하는 임무를 수행해온 그를 선택한 건 연합의 두뇌요 연맹의 참모가 된 토니 리켓이었지만 그는 결단을 내리기 까지 시간을 더 요구했는데, 강습 직후 일시적으로 모든 공격이 집중될 그를 안전히 탈출하도록 지원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로라스를 엄호하려면 그와 같은 아틀라티코 드라군 소속인 드렉슬러를 함께 투입한 뒤 그의 지원을 받도록 작전을 짜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란 건 모두가 알았지만, 그 드렉슬러는 납치 당한 토니 리켓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안타리우스의 강화 인간에게 테라듀로 심장을 꿰뚫려 사망한 뒤였다. 거기에 기존 임무와는 다르게 작전을 완벽하게 성공시켜도 작전에 투입된 인원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걸, 로라스는 작전서를 받아든 순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 점 만큼은 안타리우스 조차 알고 있을 정도였으며 그 뜻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만에 하나, 동료의 죽음에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잠시 솟아 올랐다가도 오히려 드렉슬러의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안타리우스의 샘플이 되지 않도록 사체를 직접 불에 태우는 모습을 직접 본 토니 리켓은 그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견서를 연맹 측에 직접 전달하기까지 했다. 토니 리켓에게는, 혹은 사이퍼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바로 지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의 죽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쥔 임무를 해내야 하는 사람이었고, 보란듯이 해냈다. 그의 마상창은 비능력자를 한순간에 변이시킬 정도로 농도가 짙은 안개를 흩뿌리던 장치의 코어에 꽂히며 전쟁의 끝을 알렸다. 그렇게 그는 모든 것이 걸린 순간 모든 것을 지켰다. 명예를 지켰고, 그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며, 무의미한 사상자가 더 나올 수도 있었던 위기 상황을 제 선에서 끊었다. 로라스란 인간에게도, 그를 둘러싼 세상에게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는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나 그때 그 전쟁의 기억이 역사로 지나갈 무렵,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다가 가문에서 성년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근 백 년전의 전생을 송두리째 기억하고 만 알베르토 로라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용기사시절 모든 기억이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20세기를 살았던 알베르토 로라스의 결말이 그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든 순간 손에 쥐지 못한 단 한 가지에 사로잡혀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한 번의 삶을 끝내는 동안 그 많은 것을 이루고도 단 한 가지를 놓친 그는, 선택했다.

 사무친 것이 있으니 다음 생에서라도 잡고 말겠단 집념을 매개로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 째로 영혼에 새기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순간 영혼에 새긴 모든 기억을 열어 전생에 쥐지 못했던 것을 쥔다. 때로는 선지자로, 때로는 전생을 기억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혹자는 신의 은총으로, 혹자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부르는 이름도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도 갈리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나타났다. 하지만 자신의 전생을 기억해낸 사람들이 그 뒤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기억을 들고 다시금 태어난 알베르토 로라스는 스스로 제 길을 닦아 나아가기로 했다.

 그날부터 그는 단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바쁜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자신의 기억을 되짚을 때면, 자신의 감정을 한 가지 방향으로 말끔하게 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이 되고 나서야 누군가를 손에 넣고 싶단 감정을 자각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가도, 그 전에 자각했다면 말라 비틀어 졌을 거란 생각이 들때면 이런 상황이 된 것도 괜찮은 것 같다가, 이럴거라면 끝까지 모르고 죽는게 더 나았을 것이란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려 하면, 언젠가 제 곁에 서 있던 다정한 빛깔의 머리칼이 떠올라 가슴을 움켜 쥐어야 했다. 병인 듯 했다.

 아니, 쥐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한, 백 년쯤 전 부터 그랬던 것 같다.




생님 리퀘.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 짧게 몇 번 업로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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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6. 26. 01:27



  얼마 뒤 루이스는 박스가 있을 자리에 능력자들로 가득 찬 클랜 관리소를 볼 수 있었다. 클랜 지원금 제도가 개편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헬리오스의 대변인은 능력자들을 호주머니 사정으로 차별하지 않고자 결정했다며 빛깔좋은 이야기를 전했지만, 실상은 클랜 운영비 명목으로 회사에서 클랜 자금을 관리한다는 점에 대해 연합측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기에 변한 것이었다. 러쉬톤이 휴톤과 도일, 두 사람과 함께 뜬금없이 클랜을 신청했던 것도 상황을 직접 겪은 뒤 회의에 직접 참여하라던 앤지의 지시 때문이라는 걸 알게된 그는 클랜이 헬리오스의 손에 떨어졌다는 점을 꾸준히 못마땅해 하던 그녀가 조금 더 연합의 방식에 가깝게 제도를 바꿨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루이스 씨. 주인장 안에 계세요?"

"안쪽에 계십니다."


 대부분의 능력자들은 그런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클랜 운영비를 능력자 개인의 기부금을 받지 않고 연합, 회사, 재단측이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방향의 포인트 제도라는 건 알았다. 돈 빠질 구석 하나 줄이는 개편이니 기부금을 명목으로 제 배를 불리던 몇몇 클랜의 간부들이 아니고서야 바뀐 제도에 대해 거리낌없이 찬성표를 던진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온갖 일이 다 터지기 마련인데, 모든 일을 처리하는 공식적인 담당자가 한 명밖에 없어 일처리가 밀리고 있단 점이었다. 


"오늘도 저래요?"

"네."


 루이스는 아직 클랜에 소속된 능력자가 아니었기에 거리를 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평소 버릇 그대로 광장을 구경하려다 얼마 지나지않아 외근직 회사원 한 명이 광장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능력자들을 간신히 감당하는 꼴에 지켜보는 자신이 다 지칠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시선을 거뒀다. 짬을 내 서점에 들러 책 몇 권을 사며 주인과 별별 이야기를 다 하던 클랜 매니저의 모습을 그린듯이 떠올릴 수 있는 그조차 짜증을 부리면서도 착실히 서류를 쌓아가는 저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바빠 보여 약간의 연민마저 생긴 탓이었다.


"박스 다 치워서 저정도야. 무슨 일로 나를 다 찾고?"

"저번에 부탁드린 책 때문에요. 어, 그러네. 박스 다 치웠네요?"


 붐비는 바깥과는 다르게 서점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주인장이 손님과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며칠 됐지.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어디로 싹 가져 가더라고."


 제도가 바뀌기로 결정된 날, 삼자 회의에 참여했던 러쉬톤은 연합에서 술판을 벌이곤 문제의 그 박스를 회의장에서 볼 줄은 몰랐다며 한참을 떠들었다. SPEAR가 실무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진행되던 중엔 FAITH가 박스 하나를 들고 와서 직접 내용물을 공개했는데, 그 안에 클랜 제도를 도입한 이래 지금까지 모였던 클랜별 기부금 목록을 기록해둔 서류가 있던 모양이었다. 기밀 서류니 관계자 외엔 열람이 불가능해야 맞았고, 클랜 활동비 관련 자료였으니 이제와서 광장에 있을 물건은 아니었다.


"다행이예요."

"그럼. 그때 그게 그대로 쌓여 있었으면 저기 서 있는 사람 몇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서 있었을 거요."


 그는 주인장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창문 너머 광장으로 다시 옮겼다. 여전히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있었다. 클랜에 가입한 능력자들이 전부 트와일라잇에 찾아온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어느날 그가 느꼈던 밤의 광장과 달라도 너무 달랐고, 그렇게 무심코 어느날 밤의 어느 장면을 떠올리고 만 그는 넌덜머리를 내며 책 두어 권을 마저 쌓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럴 일은 없을 거고……. 저 부스에 있는 사람을 걱정해야 될 것 같은 걸요.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 이상한 놈팽이?"

"이미 박스는 치웠잖아요. 차라리 저 인파에 누구 한 명 깔려죽을 것 같은 걸요."

"그놈 용기사야."

"용기사요? 스페인의?"


 입을 쩍 벌린 손님과는 다르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이 해야할 일만 하고 있었다. 되짚어보면 그의 인생사에는 까먹을 만 하면 스페인의 용기사들이 얽혀 들었다. 2차 능력자 전쟁때의 FAITH가 그랬고, 광장에서의 일상엔 SPEAR가 그랬다. 그렇지만 여러 이유 때문에 루이스는 그들에 대해 여전히 잘 알지 못했다.


"뭘 놀라? 억양부터가 그쪽 억양이잖아."

"FAITH같은 사람들이나 용기사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저 말은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점 정도는 알았다. 그는 당장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주친 FAITH를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산 모양인지 봉투 몇 개를 들고 가던 FAITH와 인사를 할 때 까지만 해도 조금 의외였을 뿐 별다른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바로 뒤에  따라나오는 말들은 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 뿐이었다.


"그 FAITH도 가끔 그놈을 찾아가는 걸 본 적이 있어."

"왜요?"


 드렉슬러의 재능에 눈이 먼 사람은 많지. 하지만 곁에 선 이가 그리 많지는 않아.

 …….

 그 이유가 그의 성격 때문 만은 아니고.

 관심 없습니다.

 지난번에 나와 드렉슬러를 지켜본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했나?

 그 때도, SPEAR란 사람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야 할 걸세. 그 때도, 앞으로도.


"글쎄, 우리같은 사람들이 알 리가 있나."


 외골수라 그렇지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광장의 그놈이랑 어울리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주인장의 이야기를 듣던 루이스는 이왕이면 그가 FAITH의 그런 부분은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자기만 봐도 그랬다.



뤼스편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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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