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3.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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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2018. 7. 23. 16:30


 드렉슬러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자 말 한 마디 없이 쫓기듯 차에서 뛰쳐 나왔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친우의 끝날때 쯤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 더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았던 그는 바로 앞의 헬리오스 본사로 도망치듯 들어가 숨을 몰아 쉬었다.


"드렉슬러."


 그는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건 온갖 방향으로 생각을 펼쳐 나가는 그의 천재성이 그를 가만 두질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건 순전 로라스 덕이었다. 로라스는 그가 꺼릴 상황에 처하는 것 자체를 제 선에서 끊어 왔는데, 그는 그런 로라스의 행동 만큼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인 사이에서 귀찮은 일을 대신 쳐내는 배려로 받아 들였다. 뒤집어보면 지금까지 둘의 관계가 큰 탈 없이 이어진건 드렉슬러가 둘 사이의 관계를 친한 지인 관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드렉슬러가 자문하기를,


"드렉슬러?"

"어, 어. 카페로 가?"

"아뇨, 7층 갑니다. 방문대장 작성하러 가시죠."


 지인이 아니었나?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같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방금 전 로라스와의 대화를 되새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구태여 이야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별 것 아니던 일들이 로라스의 말 몇 마디에 하나 둘 의식 밖으로 끌려 나오면서 그 자신에게 정말 별 것 아닌 일이었던 건지 되묻고 있었다. 일단, 로라스 가의 사람들이 그에게 로라스 가에 오라 제안하는 것 자체는 드렉슬러의 기준에서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리오 드렉슬러와 드렉슬러 가의 관계가 부정적이라는 건 알 사람들은 다 알았고, 개중에 드렉슬러나 드렉슬러 가를 설득해 자신의 가문에 다리오 드렉슬러를 들이려는 사람들이 한두 명은 있었다. 실제로도 당사자만 동의한다면 혼맥이건 입양이건 방법은 많다며 제안 자체는 꾸준히 들어오고 있었지만 드렉슬러가 거절했을 뿐이다. 차를 얻어타는 것도 빈도가 잦긴 했어도 지인이라면 부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거기에, 제 일거리는 자기가 챙겼다. 헬리오스와의 연결 고리는 크루그먼 교수를 통해 직접 만들었던 그다. 


"그리고보니, 오늘은 로라스 경이 안 보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드렉슬러 씨가 헬리오스에 다녀가면 그 검은 차에 대한 이야기가 늘 도는 걸요."


 하지만 드렉슬러의 연구실 후배였던 룬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녀가 말하는 검은 차란 드렉슬러가 가끔씩, 혹은 매번 신세를 지는 로라스 가의 차를 뜻했다.

 

"친구 차 가끔 얻어타는 건데 유명은 무슨."

"친구라니?"

"나이 차이 두 살 밖에 안 나. 차이도 아니잖아."


 회의라고는 해도 참석자가 세 명 뿐인 회의였고, 세 명 모두 서로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회의인 듯 아닌 듯 근황을 주고받던 중 로라스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드렉슬러는 눈을 피했다. 평소에는 업무 이야기만 하고 깔끔히 보내주던 사람이 뜬금없이 신변잡기를 왜 터는 건지, 하필 왜 오늘 이러는 건지, 그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나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저런 건가요?"

"여전합니다."


 죽을 맛인건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드렉슬러는 자각하지 못하던 것들 중 하나는, 본의 아니게 그와 생활 동선이 겹쳤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로라스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로라스의 시선은 드렉슬러 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까지 닿아 있었다. 룬데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드렉슬러의 마지막 1 년차에 크루그먼의 랩에 들어갔는데, 그런 그녀마저 드렉슬러가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히스테리를 부릴 만 하면 귀신같이 랩을 찾아오는 로라스를 알고 있었다. 


"까먹을 만 하면 랩에 찾아와서 저 사람 찾던 사람이 그 로라스 경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람 맞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당연하다는듯 되물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책상 한 켠에는 그때 그 시절에 로라스가 선물한 작은 선인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안 사귄다고요?"

"내가 걔랑 왜 사귀냐."

"……?"

"친구끼리 무슨 사귀니 마니……."

"그런 관계에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당신들 밖에 없을 거예요."


 드렉슬러는 고개를 돌려 크루그먼에게 은근히 도움을 요청했지만, 크루그먼은 이미 룬데와 한 통 속이 다 되어선 모른척 자료 몇 장을 뒤적였다.


"이유나 들어보자. 왜?"

"정말로 이유를 몰라서 물어보는 것 같은데, 상태가 제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군요."


 드렉슬러는 별 헛소리를 다 한다는 듯 말을 무시하며 가방을 뒤졌다. 그새 사레가 들린 크루그먼은 숨을 고르고는 말을 받아쳤다.


"친구 사이에 포옹이 그렇게 일상적이진 않습니다."

"포옹 한 번 못 하냐?"

"한 번이 아니니까요. 박사 시절에 항상 로라스 경에게 안겨 출근했던 걸 제가 기억하는데."

"항상은……. 아니지. 가끔 졸릴때 부축 좀 해준 정도 가지고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이 괜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던 드렉슬러는 그에게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매일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둘둘 말려서 안겨 들어왔었죠. 커다란 체크무늬 담요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예, 그 담요 저도 기억 납니다. 그때 이미 결혼한 줄 알았는걸요, 그럴 사이거나. 로라스 경의 인내심을 생각하면 간혹 사람이 맞긴 한가 궁금할 정도입니다. 그 사람은 드렉슬러 씨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봄이었는데, 그대로 십 년 쭉 한결같다면 무섭기까지 하네요. 드렉슬러 씨 한테나 그렇지, 평소엔 진중한 사람이니 굶어죽진 않을 겁니다…….


"둘이 오늘 점심 뭐 먹었어? 뭐 이상한 거 먹은 거 아냐?" 

"이 회의실 안에 로라스 경과 당신의 관계만큼 이상한 건 없습니다."

"걔랑 내가 꼭 언젠가는 같이 살 것 처럼 이야기 하니까 그렇지."

"그렇게 될 테니까요. 그 로라스 경이 한 번 마음 먹으면 못 할 것 같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릴, 툭 내뱉으면서도 그의 동공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 번 마음 먹은 로라스가 어떤 일을 해내는 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드렉슬러를 바라보던 크루그먼은 혀를 한 번 차곤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행동을 돌아 보십시오. 로라스 경이 관여하지 않은 게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드렉슬러는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마자 몸을 벽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을 돌아볼수록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지인 한 명이 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 지나치게 익숙해 졌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기준에서 할 필요 없는 생각을 해야하는 상황을 가장 꺼렸다. 세금을 낼 일이 생겨도 세금 만큼이나 납부 절차를 싫어하는 사람이 그였고 인간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식의 생활 태도는 프리랜서로 살다보면 밥줄 끊기기에 딱 좋은 스타일이었지만, 그는 어째선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섭외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마저도 그의 인맥을 로라스가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자신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남아 있는지를 따져봤지만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편했지만, 역으로 그의 주변을 그가 아니라 로라스가 꾸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관계가 이어진지 한참 뒤인 이제서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로라스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정도까지 누군가를 신경쓰는 관계를 지인이라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지부터 다시 돌아봐야 했다. 그러려니 지나간 그에게 그러려니 맞춰준 로라스의 태도가 시너지를 내며 그에게 별 일 아니겠거니 신경쓰지 않도록 부추긴 탓에 그대로 넘어 갔더니, 정신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그렇게 하나 둘 넘기다가 제 삶의 주도권까지 넘긴 셈이 됐다. 그리고 인간은 삶의 주도권을 공유하는 관계를 지인 관계로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하고싶은 걸 하고 살기 위해 자신을 구속하려 드는 가문과 거리를 둔 것인데, 실은 알베르토 로라스의 배려를 기반으로 살고 있던 게 된다. 로라스와 그의 관계조차 원래부터 지인 관계라기엔 너무 멀리 나간 관계였던 게 맞았다. 그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을 때 로라스가 그런 그를 묵인했기 때문에 겉으로나마 지인 관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로라스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제 곁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드렉슬러는 눈을 뜨고 1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7층에서 멈춰 있던 엘레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이런 종류의 배려도 구속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실은 구속하는 주체나 방식이 바뀐 것일 뿐이라면? 자기 자신의 인생이 아닌 알베르토 로라스가 허락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거라면? 


 잘 생각해 보게. 자네가 제일 잘 하는 일 아닌가.


 차에서 로라스가 건넨 한 마디가 그의 머릿속에서 웅웅 메아리쳤다. 그 한 마디 만으로는 둘의 관계 사이에 알게모르게 그여 있던 경계선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말을 듣는 동안 자신이 차 뒷좌석에서 로라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마치고 왔나?"


 당연하다는 듯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모른척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래."


 무른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랬다. 삼십 사 년 한 평생을 살며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된 적은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어렵게 생각을 펼쳐 나가며 낸 결론은 자신과 알베르토 로라스는 더이상 지인 관계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곁에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자신을 데리러 온 이 사람만큼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며, 그런 로라스의 행동을 자신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사실 마저 부정하기엔 그가 이미 너무 깊게 종속되어 있었다. 


"얼굴 빛이 안 좋아. 고됐던 모양이지?"

"별 일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도 이런 종류의 제동이 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 세 명을 고르자면 드렉슬러의 차기 가주인 레오노르와 크루그먼 교수, 그리고 로라스가 있겠는데 레오노르는 가문 내 상하관계를 무시할 수 없어 그를 견딜 필요 없이 명령만 해도 충분한 사람이라 그를 어딘가에 묶어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크루그먼은 그에게 제동을 걸 필요성을 못 느꼈다. 결국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곤 못할 드렉슬러를 견뎌가며 그에게 제동을 걸 사람은 로라스 한 사람 뿐이었지만, 설마하니 그 알베르토 로라스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의 판단은 이런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건 됐고, 너."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이 직접 받아 들였다는 구실이라도 가지고 맞은편의 사내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그런 명분 마저 놓치고 사내의 뜻대로 얽힐 것인지를 고를 권한 뿐이었다. 그는 가까운 미래가 보였다. 그가 본 미래에서 그는 자신을 넝쿨째 뜯어다가 그에게 갖다 바치고 있었다.  


"……네 뜻대로 해, 결혼."

"진심……인가?"

"그래."


 그의 생이 마지막으로 한 번 들썩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2편 / 3,4편으로 나눠서 볼 걸 전제로 쓴 생님 리퀘글이었습니다. 

로라스가 드렉슬러 한정으로 달달한거 드렉슬러만 모르는 상황이었다가, 그걸 알게 된 내용이었는데 

아 게임의상태가.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notice/topic/2748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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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_zlos
Game2018. 7. 23. 16:30



"너네 응접실에 그거 아직도 있냐?"

"마상창을 말하는 거라면 늘 그 자리에 있지."

"여전하네."


 로라스 가의 초대를 받아 본가 응접실에 가면 누구든지 볼 수 있는 무구가 하나 있다. 손잡이만 남은 마상창이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그 창이 로라스 가의 용기사가 세상을 구했다는 증표라는 이야기를 갓 걷기 시작했을 때 부터 들었다. 창의 주인이었던 용기사는 유사시 자신의 무구를 가문의 그 누구라도 볼 수 있게 처리하라는 유언을 한참 전 부터 남겨 두었지만 그 용기사는 세상을 구한 전투에서 폭발의 여파로 마상창의 손잡이 부분만 남기고 보존이 불가능한 잔해만 남기고 사라졌기에 손잡이나마 보존한다는 다소 자세한 내막은 나이가 조금 들고난 뒤 부터 서른 살이 넘은 지금까지 듣고 있다. 학창시절의 그는 본가에 들러 그 무구를 볼 때면 창의 주인이었던 용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전쟁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을지 상상했다. 백 년이면 그리 먼 과거도 아닌데 그 용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가문에 전해지는 것 조차 심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 말고는 별 다를 게 없어 상상만 할 수 있었다.


"가문이 굳건하다면 몇십 년 뒤에 와도 그대로일걸세."

 

 그에게 용기사는 성역이었다. 가문의 사람들이 방향이 엇나간 정의를 실현하려다 모든 것을 잃은 선조들의 최후를 들려줄 때면 자신의 가치관에 혼란이 오던 어린날의 알베르토 로라스는 본가 응접실에 홀로 머무는 마상창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아 자신이 하려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었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건데, 손잡이만 남아있는 걸 그렇게 공개된 장소에 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귀한 거라며."

"창의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전했다더군. 마지막 임무 직전에 가문의 사람에게 부탁했다고 해."


 그는 그 용기사를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용기사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초상화로나 볼 수 있는 초대 가주보다도 먼 사람으로 생각하며 거리를 뒀다. 마음 한 구석에 막연한 지향점 하나 정도는 두고 싶었던 그의 선택이었다.


"그정도는 나도 알아. 유명하잖아. 잘 풀리건 그렇게 되지 않건 자신의 의지는……."

"…변하지 않으니, 본가에 들어오는 그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공개된 곳에 두라고."

"그래, 그래. 그러건 말건 부서지면 어쩌려고?"

"뜻이려니 하겠지. 느낌있지 않나?"


 아마도 그 용기사에 대한 알베르토 로라스의 태도는 성년식을 치른 날의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이번 생이 다할 때 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겹도록 봤으니까 하는 소리지. 다른 건 못 보냐? 검 같은 거."

"무슨 검 말인가?"
"왕실 하사품."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년식을 기점으로 뒤집혔다. 로라스 가의 성년식은 가문을 일으킨 초대 가주가 정한 방식을 기반으로 하되, 성년식을 주최하는 그 대의 가주가 성향을 반영했다. 이번 대의 가주는 초대 가주가 왕에게 하사받았다던 예식용 검을 꺼내 성년식을 주관했는데, 가문의 일원인 그 또한 실물은 자신의 성년식 날에 처음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귀한 보검이었다. 제 삶 한 부분을 가문에 두는 사람인 그에게 검은 제법 의미가 컸다.


"그 검은 본가 사람들도 가주님께서 성년식 때 꺼내신 것 말고는 본 적이 없어."


 그 당시, 그는 본가가 있는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에 있었다. 잉글랜드에 머물면서도 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식성은 그때 생겼다. 당연히 성년식은 본가로 가서 치러야 했다. 기말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본국에 다녀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 완성되는 바람에 누구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그는, 어렸을 적 부터 이상하게 동선이 안겹칠듯 겹치다 대학교까지 같은 곳으로 진학해 기숙사마저 옆방을 쓰던 다리오 드렉슬러를 붙잡았다. 그는 이야기를 쭉 듣더니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제 졸업 선물이나 챙겨 오라며 세상 태평한 소리나 좀 하다가 로라스의 방에서 맥주를 두어 캔 까고는 낮잠까지 자고 갔다. 조기 졸업을 앞두고 바쁘단 소리를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긋한 행동이었다. 얼결에 그의 태도에 휩쓸린 로라스는 덩달아 느긋해졌다. 성년식을 치르고 온다고 해서 제 주변이 송두리째 바뀌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은 덤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본가의 응접실에 들어서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느긋하게 미래를 생각하던 그는 응접실에서 마상창을 바라본 순간 20 세기를 살았던 가문의 용기사가, 마상창의 주인이었던 그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궁금한데."

"정 궁금하면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자네 도움이 필요해."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기억을 영혼에 새기기로 한 결정이 그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당사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가문의, 혹은 그 당시 가주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대 안타리우스 전쟁과 관련된 일도 아니었고, 아틀라티코 드라군과 관련된 일도 아니었다. 그가 기억을 영혼에 새기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건 다리오 드렉슬러를 붙잡겠다는 의지였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의지는 큰 굴곡없이 살며 갓 성년이 된 21 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가 받아 들이기엔 지나치게 강렬했다. 그는 그렇게 과거에 처박혔다.


"뭔데."

"가문 내에 성년식 급의 행사가 있으면 가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지."

"너희 가문에서 행사 하는 거랑 내가 무슨 상관이야."


 로라스 가의 성년식 이후, 그와 얼굴만 알고 지냈던 사람들조차 그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부분이 변한 건지 콕 찝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달라졌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게 체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받아 들이고 나니 알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용기사 시절의 기억에 잠식된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21 세기에 태어난 알베르토 로라스가 20 세기의 알베르토 로라스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는 타자기보다는 키보드가 익숙했다. 전화기에 선이 없다고 놀라지도 않았으며, 거리낌없이 터치 스크린을 썼다. 다만, 그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그는 망설임없이 대답할 것이다.


"자네가 로라스 가의 일원이 되는 걸세." 

"검 하나 보겠다고 성을 갈아치워?"

"어차피 뗄 성씨라면 바꾸는 것도 방법이지. 마침 자네에게 꾸준히 청혼하는 로라스 가의 사람도 있고 말이야."

"또 그 소리 하네."


 나는 과거의 내가 누군가를 어떻게 사랑했는지 알게 된 덕에 지금의 나 또한 누군가를 자각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힘들다고 해야 할 지 민망하다고 해야 할 지는 알수 없으나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너랑 결혼을 왜 하냐."

"스페인에서 성 하나만 가지고 살기엔 거슬리는 점이 많아서 귀찮단 이야기는 자네가 했었어."


 그 시절의 다리오 드렉슬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무구를 만들고 지원사격, 단어를 고르자면 지원투창이 좀 더 옳은 표현이겠지만, 어쨌건, 자신과 많은 순간을 함께 해왔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자신은 그런 사람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잉글랜드서 살잖아."


 20 세기의 자신과 함께했던 드렉슬러는 꽉 막힌 놈 관심 없다며 대번에 쳐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과거의 자신을 곁에 둔 걸 보면 인간적인 호감이 있었던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로라스가 두 번의 생을 살며 곱씹은 것과는 감정의 궤도가 다른 것 같았다. 그건 꼭 20 세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로라스는 여전히 양쪽 머리끝에 새치를 달고 사는 사내를 어떻게 요리해야 제 옆구리에 끼고 살 수 있을지 늘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민 거리가 생길 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했다. 본가를 떠올리거나, 무게를 덜어줄 사람을 찾거나, 기타등등, 기타등등.


"자네 부탁으로 끊은 스페인 행 비행기 표만 벌써 열 장이 넘어간 건 알고 있나?"

"너도 갈 일 있다고 매번 두 장씩 끊었으니 그렇지."

"자네가 간다고 하니 동행했을 뿐이야."


 이번에는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다리오 드렉슬러를 따라 다녔다. 그가 로라스 가의 사람으로 태어나 시간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금전이 부족하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 지금 내가 스페인 간다고 하니까 따라간 거라는 소리 하고 있는 거냐? 아니지?"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이번에는 내 청혼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 보겠나?"

"야." 

"가문의 사람들이 자네에게 로라스 가에 오라고 이야기 한건 항상 진심이었지. 왜 그랬을 것 같나?"


 지금까지도 그런 그를 자각하지 못했던, 그 와중에 어김없이 로라스 가의 차를 얻어탄 채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다리오 드렉슬러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렇게 살면 언젠가 한 번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 그의 친우이자 스승인 크루그먼 교수의 오 년도 더 된 일갈이 시간을 건너 내리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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