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욱도 안 남은 뒷덜미를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본즈는 그런 그를 볼 수 없었는데, 밀린 보고서 다 끝낸 양 개운해하며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는 함장의 데이터만 마저 입력하면 당분간 볼 일 없을 예방 접종 바로가기 버튼을 날려버릴 생각에 조금 들떠 있었다.
"본즈."
"왜."
"스코티랑 친해?"
그 자리에 특별 관리 명단 바로가기 버튼이 자리할 것이라는 점을 옆에 계신 누군가가 일깨워 주지만 않았다면 더 기뻤을 것이다.
에디슨 사건 직후, 스타플릿은 사건을 수습하는 한편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뇌하고 있었다. 좋은 소식은 그들이 정답이 없는 문제를 마주하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는 집단이라는 점이었다. 논쟁은 엔터프라이즈 호가 다시 탐사를 떠난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한 가지 가치를 내거는 데에는 성공했다.
스타플릿은 수 세기 전의 스타플릿이 보낸 메시지를 받아 들이고 더 나아가야 한다.
기본적으로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벌써부터 절망을 절망을 담기에는 그들이 지켜낸 요크 타운이 오늘도 우주 한복판을 가로 지르며 서 있었다. 그렇다면 엔터프라이즈 호에 타는 크루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종전과 완전히 동일하게 대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됐다. 이런 기조 아래, 우선 크루들은 충분한 휴식과 지원이 제공되고 있었는지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다소 번거로울 수 있는 과정이었지만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인식한 크루들은 협조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들은 요크 타운에서 쉴 공간과 약간의 여비를 포함한 공식적, 혹은 비 공식적인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면 오랜만에 만난 세 크루가 모인 바는 한참 체콥과 잘 되어 가던 요크 타운의 시민이 알려준 곳이고, 주문한 칵테일은 그들을 알아본 주인장이 첫 잔을 공짜로 내어준 것이다.
하지만 스타플릿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문 하나를 보냈다.
"호출인가?"
본즈, 체콥, 둘과 함께 술을 축낼 각오로 앉아 있었던 스콧은 대수롭지 않게 PADD를 활성화 해 공문을 켰고,
"잘못 왔나?"
현실 부정을 했다. 그렇지만 어디, 현실이 부정한다고 바뀌는 것이었던가. 그랬다면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장은 그들이 익히 아는 그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미스터 체콥?"
"저는 못 받았슴니다."
한 타이밍 먼저 받아 충격도 먼저 받은 본즈는 제 PADD를 그에게 보이며 친절하게 확인 사살했다.
"제대로 온거 맞아."
같은 내용의 공문이 두 인간의 PADD를 빛내고 있었다. 스콧은 약 사 분 전의 저를 두들겨 패고 싶어졌다.
함선에 승선한 크루 간 마찰이 생겼을 때, 이를 제때 해결하지 못하면 크루 전원이 떼죽음 당하는 건 일도 아니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그 이상의 파장이 일 수도 있다... 첫 문단을 읽을때 까지만 해도 당연한 이야기를 왜 써 놓았는지 스콧은 알지 못했다. 그는 이때쯤에 모른 척 PADD를 닫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약간의 의무감과 호기심이 그를 자극했다. 요약하면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스타플릿 내부에서는 크루 간의 관계에 대해 장교들이 좀 더 깊게 관여해야 한다고 판단한 듯 했다. 여기까지도 별 다를 것 없는 정기 보고 관련 공문인가보다 결론 내리고 PADD를 내렸어야 했지만, 그는 결국 제 뒤통수를 때릴 맨 밑 단락까지 보고 말았다.
함선에 타는 구성원 중 직위가 소령 이상인 크루는 5년 내에 심리 상담에 관련된 자격을 얻을 것.
커트라인에 걸친 두 소령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 작자는 죽어서도 왜 이래? 사정을 들은 체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밖에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술잔을 머리 위로 들며 외쳤다.
"마씝싀다!"
결과적으로, 퍼질러 자다가 열 한시 반 쯤 일어나서 씻은 다음 밖에 나가 끼니를 때우고, 밤에는 또 신나게 술이나 풀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스콧은 전날 저와 신나게 달린 본즈와 함께 아침 일곱시 반 부터 스타플릿 요크타운 지부 내의 한 사무실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함선이 건조되는 대로 다시 탐사를 떠나야 했고, 이는 스타플릿에서 제시한 기간 안에 요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의미였다. 본부 측에서는 사정을 감안해 자격을 증명하는 것 대신 탐사를 시작하기 전 별도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라며 아침 댓바람부터 둘을 불렀던 것이다.
"심리 상담사 8주 완성 코스라도 시키는건 아니겠지?"
무심코 본즈가 중얼거렸다. 제 몫으로 주어진 펜을 요리조리 돌리던 스콧이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며 가볍게 타박했으나, 곧 두 소령은 한참 머리를 짜 내던 아카데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요크 타운의 호의를 받아 들이며 삶을 즐기고 있었건만, 소령 급이 되지 않은 다른 크루들은 오늘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눈 앞에 보였지만, AM에 시작한 강의는 PM이 되고서도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둘은 그 날의 일정이 끝나자 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그냥은 못 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날처럼 퍼재꼈다. 강의는 이틀 걸러 한 번 씩 있었고 그들은 이틀 걸러 한 번 씩 제 휴가를 강탈해간 스타플릿을 신명나게 까댔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은 본즈가 먼저 취해 스콧이 트랜스포터에 그를 쑤셔넣은 뒤 목적지를 대신 입력했고, 어느 날은 스콧이 인사불성이 되는 바람에 본즈가 그의 몫까지 땀을 흘려가며 그를 행성 내부를 도는 횡단 열차에 던져 놓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스콧의 입장에서는 스타플릿을 까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십만 년을 가져다 줘도 모자랐다. 하지만 수료기간은 십만 년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길었고, 둘 간의 술자리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두 인간이 술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점점 넓고 깊어졌다. 간혹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삼천포로 샐 때면 그들은 제 상관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한 명이 먼저 커크의 어떤 모습을 따라하면 나머지 한 명은 언젠가는 상대방의 얼굴 거죽을 쓴 커크를 떠올리며 낄낄거렸다. 그러면 웃는 모습을 들킨 사람이 그날 한 잔 사고, 커크를 따라하고, 그걸 맞은편에서 본 사람이 며칠 뒤에 술 사고, 또 따라하고... 전형적인 알코올 선순환 구도였다. 본즈 with 스콧, feat.커크.
본즈는 그 과정에서 그를 스코티로 지칭하는 입버릇이 넘어 왔다고 추측했다. 커크의 입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굴러가던 호칭이 당사자를 거쳐 본즈에게 돌아 커크에게 다시 돌아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둘은 크루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총 책임자라는 직위상의 위치를 떼어 놓더라도 그 전보다 좀 더 깊은 친분 관계를 가지게 됐으므로 스타플릿이 의도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성과는 거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런 거였어?"
커크는 알다가도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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