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s2016. 10. 23. 03:27


 커크는 제 여유 시간이 사라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끼며 피눈물을 쏟았다. 그는 막 CMO의 발언으로 함선 그 누구보다도 바빠졌던 참이다. 그 본즈가 누구씨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지구였다면 그도 너 요새 걔랑 친하냐, 가볍게 넘겼겠지만 발 딛는 것 부터가 인공 중력 장치에 좌지우지 되는 곳에서는 작은 변화 하나 하나가 비상사태로 퍼지기 십상이니 꼭 함장이 아니더라도 함선에 탄 이들에게 이 정도의 편집증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기본이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전에도 이랬었나? 열심히 떠올렸지만 두 간부의 관계에 대해 그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서로가 서로를 까내리는 순간이었다. 그정도 수준으로 종족 차별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원시적인 까내림은 23세기 와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진짜배기 명장면이긴 했다. 그는 홍보팀에서 이런 촌극을 현 세기가 되고 나서야 아무런 가책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 친애의 상징으로 포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웃다 지쳐 물이 든 컵을 엎었다.

 그런 와중에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크루들은 서로가 서로의 조각을 조금씩 가지기 마련이다. 본즈는 언젠가 이런 굴레에서는 스팍도 훌륭한 예시가 되었다며 제게 낄낄댄 바 있다. 걔한테서 말똥같은 일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거든. 커크는 어떻게 듣게 된 거냐며 비결이나 들어보자 했고 그는 바로 대답했다.


 프랭클린 건 때 그랬어. 지금 와서야 웃긴 거지.


 비 정상적인 상태였다는 의미다. 그럴 일이 없고서야, 둘이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서로의 말버릇까지 옮겨받을 일은 없다고 단정 지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 본즈는 자각하지 못할 뿐 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까?


 이젠 스코티도 스코티 라고 부르는데? 


커크는 침착하려 애썼다. 하지만 곧장 들어온 반박에는 그도 대꾸할 수 없었다.


 요크 타운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을 때 부터 그랬던 거라면?




"마셔."


 그때쯤, 그 스코티는 얼빠진 표정으로 컵을 받아 들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호는 신뢰로 움직이는 함선이었다. 크루들이 자신의 업무 영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이들을 존중했기에 가능했다. 몽고메리 스콧은 그런 엔터프라이즈 호를 사랑했다. 본즈의 지시에는 당분간 제 업무가 끝날 때 마다 메디베이에 들락거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어 당분간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그는 얌전히 본즈의 말에 따랐다. 그 나름의 신뢰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게 있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는 했다. 얼마 전 함장과 이야기했던 크루 같은 경우는 꽤 자주 보였다. 블루셔츠의 손을 거친 그들이 보직을 옮기고 싶을 때 누구의 손을 거쳤겠는가? 스콧은 직접 인원을 다시 배치했고 인원이 비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생기면 직접 스패너를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업무를 임시로 맡아 처리하던 킨저에게 구시렁댔다. 메디베이에 승선할 수 있는 건 트레이너가 아냐, 의사지! CMO도 맨날 그러잖아. 젠장, 짐! 나는 의사야! 뭐시깽이가 아니고!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그런식으로 점점 순번이 줄더니 이제는 그의 차례까지 오고 말았다. 심지어 그는 만일 자기 자신까지 다른 분야로 보직을 변경한다면 공석이 될 기관실장 직은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면서 메디베이에 왔다. 그런데 정작 도착하고 보니 본즈가 한다는 행동이라곤 그를 흘끗 보더니 대뜸 컵을 건네며 이거나 마시고 가라는 식이 아닌가?


"끝이우?"

"마시면서 들어. 평소에 끼니 제때 챙겨먹지?"

"당연하지. 안 그러면 여덟 시간 볼 거 여섯 시간도 못 보거든. 안 그렇수?"


 말을 끝내자 마자 스콧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본즈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특별한 작업 때 아니면 잠도 꼬박꼬박 잘 거고."

"대부분은 그렇지."

"그런 작업 끝나고 나면 얼마나 자고 나오는지는 기억 나?"

"평소보다야 훨씬 많이 자고 나오지."

"일어나고 나면 어떻고."

"좀 뻐근하긴 한데 개운한 정도?"

"그게 문제야."


 그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추가 작업을 전부 빼버리라고 하면 골치 아픈데. 당장 보름 뒤면 한 행성에 정박할 예정이었다. 그때쯤 되면 그는 당분간 또다시 바쁠 수밖에 없다. 혹여나 본즈가 제 직권으로 기관실장을 그의 눈 건강에 대한 이슈로 업무에서 강제로 빼주십사 함장에게 찔러넣어도 그가 직접 나서겠다는 입장을 보이면 도리가 없을 정도로, 정박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함선 내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만일 그런 권고를 받는다고 치면 그 전에 관리자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최대한 몰아서 해 두어야 하니 역설적으로 당분간은 추가 근무를 왕창 넣어야 했다. 스콧은 여차하면 싹싹 빌 각오를 하며 침을 삼켰다.


"집힐만한 짓을 안 해."


 그는 스콧을 마주 보았다. 뭐요? 말만 안했지 의뭉스런 눈빛이 스콧의 입을 대신했다.


"끼니도 안 거르고 필요하면 잠도 잘 자. 음주도 허용 가능치 안쪽이고 차도 즐길만큼 정신적으로도 여유롭고. 누구랑 다르게 백신도 꼬박꼬박 잘 맞지. 부상 때문에 올 일은 많아도 찰과상이 눈이랑 직접 관련된 것도 아니고."

"그럼 그냥 두고 보면 안 되는 거요?"

"그럴까 했는데, 심해지는 거 자체는 눈에 보여. 처방이 필요하긴 해. 다 마셨지?"


 스콧은 빈 컵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 그를 본 본즈는 상자 하나를 건넸다. 무게가 제법 됐다. 그 안에는 커다란 W가 써 있는 팩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팩 하나 하나 전부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물병 대용으로 들고 다녀. 근무 한 번에 다섯 팩 이상 비우고. 한 번에 몰아서 마시면 안 되고 틈틈이 마셔야 효과가 있는 거니까 시간 정해놓고 마셔."

"이게 다 뭔데?"

"물."


 생각외로 싱겁게 끝난 1일차에 스콧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팩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메디베이를 나섰다.

 

Posted by _zl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