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지만 인간들은 늘, 언제나, 여전히 죄를 지었다. 명계의 존재는 믿는 이들이 절반에 그렇지 않은 이가 또 절반이지만 죄지을 만한 일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잘도 찾아내 꼭 한 번씩 사고를 쳤다. 당연하게도 산 자가 죄를 지어 망자가 되면 그 뒷처리는 애꿎은 김 차사들이 했다. 사자로써의 업무를 시키기 전에 망각차를 내리는 배려는 어떤 면에서는 세뇌 과정이기도 했다. 그 어떤 일을 시키더라도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겠거니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계해둔 명계의 장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망각차를 마셔도 저승사자는 근본이 인간이었다. 이는 그날 일해 그날의 죗값을 치르고 있는 차사들도 다른 차사들에 의해 쌩고생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명계에도 변화가 필요해."
여는 새로 부임한 제 직속 상관과 처음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소주잔을 비우며 생각했다. 망했다.
여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스마트한 저승시대 e-저승시대! 메일 제목부터가 명계에서 쓰는 제목이 아니었다. 여는 무심코 메일을 스팸 메일함에 넣을 뻔 했다. 제게 넘기는 서류는 전부 이승의 방식대로 처리할 것. 다음 달 부터 시행. 여는 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모르는 사이 그의 주변이 온통 서리 밭이었다. 잘 달라붙은 것들도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온 도깨비 터에 퍼져 놀란 신이 끝방 문을 두드렸다.
"자?"
자다가도 깰 게 온 판에 편한 소리였다. 여는 대꾸대신 문을 빤히 째려봤다.
"들어간, 왁!"
그런 안 사정을 모르던 신은 무심코 문을 열며 끝방에 발을 딛으려다 비명을 질렀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나뭇가지가 공연히 흔들렸다. 어……. 번쩍 정신이 든 여가 급히 힘을 거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침구가 엉망이었다. 신의 목소리가 묘하게 올라가며 웃음을 담았다.
"말을 하지 그랬어."
침대도 바꿔 놨는데. 양 팔을 벌리는 그의 앞에 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루만……. 으응. 그래. 걱정 말고 오거라. 푹 쉴 수 있게 품만 빌려줄 것이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지에 풀빛 향기가 진동했다. 여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지만 신의 어깨에 제 몸을 기댔다. 한 며칠 고생할 미래를 보면서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덕화는 뜬금없는 신의 호출에 헐레벌떡 달려갔다가 있는 힘껏 표정을 구기며 밖을 나다녀야 했다.
기존에도 인세에서 활동하는 차사들은 현세의 문명에 편승해 업무를 처리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계의 방식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 한정되어 있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신의 뜻이겠거니 따라야 하는 게 저승사자고 그건 여도 마찬가지 였건만, 상관이 바뀌었으니 바뀐 방식에도 적응 해야 했다. 하지만 pc방 까지 가서 파일을 업로드하는 저승사자가 될 줄은 몰랐던 여는 없는 돈을 털어서라도 컴퓨터건 노트북이건 한 대 장만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우울증이야?"
여기부터 저기까지 딱 봐도 신이 주문한듯 한 택배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일 주일 째였다. 들일 건 한참전에 다 들인 줄 알았더니 요즘 신은 발작이라도 하듯 전 세계를 돌며 주문을 넣어댔다.
"아니?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여는 신의 주변을 가득 메운 상자들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 여 자신의 업보였다.
"모르지?"
그날, 여가 끝방 전체를 서리로 뒤덮는 바람에 끝방 살림살이가 전부 못 쓸 물건이 됐다. 신의 탓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방이 그 모양 난장이 났으면 끝방부터 치웠어야 했는데 그때 신은 여를 제 방에 데려가 그의 속을 난장내는 데에 지나치게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그러고 끝났으면 세간살이만 다시 장만하고 끝냈겠지만, 그날의 그는 지은 죄가 있어 평소보다 훨씬 더 신에게 매달렸다. 그러다가 분위기에 휩쓸렸다고는 해도 말해선 안 될 말을 덜컥 했던 것이다.
하자는 거어… 다. 할게, 그만…좀. 애 태우고…….
진심으로 하는, 헉. ……소리야?
그래, 이 애만 태우는 도깨비.
못 무른다, 너.
내가 그 말을 왜 했을까. 후회는 언제나 늦었다. 그와중에 문이 또 덜컹, 열렸다. 덕화였다.
"계셨네요? 그럼 좀……. 받아가요. 이거 왜 이렇게 많아, 삼촌!"
그는 입으로는 제 삼촌에게 볼멘소리를 털어놓으면서도 양손 가득 들고 온 쇼핑백들을 막무가내로 여에게 넘겼다. 여는 얼떨결에 물건 더미를 넘겨 받았다. 슬쩍 열어보니 노트북, 구두, 시계, 셔츠, 넥타이, 기타등등, 기타등등. 종류도 종류거니와 이유를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뭔데."
"다 끝방삼촌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고."
"혼수요."
여는 참담한 심정으로 제 양손에 물건을 나눠 들었다. 훤칠한 몸이 휘청 흔들릴 기미가 보이자 마자 소파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던 신이 곧장 다가와 그의 뒤를 단단히 받쳤다. 자동 반사 수준으로 그의 고개가 돌아가 신의 볼을 찾았다.
"아, 진짜 삼촌들. 아."
덕화의 안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 삼촌이나 저 삼촌이나 다 똑같아. 인간 출신 아니랄까봐 인간미가 넘치셔들. 그제서야 자기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자각한 여가 새하얗게 얼었다. 이번에는 그런 그의 뺨에 신이 제차 제 입술을 눌러댔다.
"네 생에 봄이 너무 늦게 와서 그러니 좀 참아보거라."
그는 변한 게 없고, 그의 연인은 양 볼을 조금 붉혔으며, 그의 조카는 미간을 더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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